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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진독수(陳獨秀)의 실종사건과 비밀부인

by 중은우시 2009. 10. 13.

글: 섭영렬(葉永烈)

 

2009년은 5.4운동 90주년의 해이다. 그리고 중국현대사상의 걸출한 인물인 진독수 탄신1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진독수는 한때 기이하게 실종된 적이 있었는데, 역사상 기록은 없다. 필자는 <<홍색의 기점>>을 쓰면서 진독수를 언급했고, 당시 진독수의 비서이자 친구였던 정초린(鄭超麟) 선생을 인터뷰했다. 정선생은 당시 이미 90고령이었는데도 기억력이 괜찮았다. 그는 진독수 실종에 관하여 남들이 잘 모르는 원인을 토로했다: "진독수는 상한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진독수는 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자기 집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서도, 그 여자가 생활을 돌봐주었는데, 다른 사람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정초린은 마침내 그 속에 숨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기이한 진독수실종사건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총서기가 실종된 사건이 딱 1번 발생했다.

 

사건은 1926년 1월 하순에 발생한다. 당시 중공중앙총서기인 진독수는 당중앙기관과 연락이 끊긴다. 총서기는 어디로 갔는가? 적들에게 비밀리에 체포되었는가, 암살당했는가? 아니면 사고라도 났는가?

 

진독수는 중공초기의 수뇌인물이다. 1921년 7월, 중공 "1대"때 진독수가 중앙국서기에 당선된다. 이는 총서기에 해당한다. 중공 "2대" "3대"때 진독수는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이 된다. 역시 총서기에 해당한다. 중공 "4대" "5대"때 진독수는 총서기가 된다. 진독수는 연속하여 5기나 총서기를 맡아왔다. 그리고 "5.4운동총사령관"(모택동의 표현)이기도 하여, 명성이 아주 높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그의 행동은 은밀했고, 국민당의 이목에 걸리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거처를 자주 옮겼으며, 주소는 절대기밀이었다. 당중앙기관과 그는 왕왕 단선연락을 취했다. 1926년초에 중공중앙의 회계겸 비서인 임작민(任作民, 任弼時의 동생)이 진독수와 단선연락을 취했다.

 

당시 진독수는 상해에 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은 1926년 1월중순 광주에서 국민당 "2대"에 참가하고 상해로 돌아온 주온산(朱蘊山)을 만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손님을 만나거나 회의를 할 때면 진독수는 상해 홍강대극원의 서쪽에 있는 광동가 정승리의 임작민의 집에서 했다. 손님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도록 한 적은 없다. 주온산을 회견할 때, 진독수는 보고를 듣고, 가경시, 설탁한과 함께 안휘로 가서 업무를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진독수는 여러날동안 임작민의 집으로 와서 일을 보지 않았다. 그전에 그가 자주가던 상해 장사로 아동도서관편집소에서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진독수의 집이 어디인지는 임작민조차도 알지 못했다.

 

중앙기관과 총서기의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진독수의 아들인 진연년(陳延年)이 상해로 왔고, 급히 부친을 만나겠다고 했다. 진연년은 진독수의 장남이다. 1922년에 입당하여, 일찌기 모스크바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했고, 귀국한 후에는 중공 광동구위서기(즉, 성위서기)로 있었다. 진연년이 상해 아동도서관으로 와서 경리 왕맹추(汪孟鄒)를 찾았다. 왕맹추는 진독수의 가까운 친구이다. 그러나 진독수의 행방을 몰랐다. 사방으로 찾아봤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모두 다급해졌다. 진연년은 마음이 급해져서 눈물까지 흘렸다. 모두 '흉다길소(凶多吉少)'라고 느낀 것이다. 진독수가 실정되었다는 소식은 소리소문없이 퍼져갔다. 국민당 우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민당우파는 이 기회에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진독수는 비밀리에 무한으로 갔다. 오패부와 결탁하려고 한다."

 

그래서, 중공중앙기관보 <<향도>>주간은 1926년 1월 21일에 출판된 143호에서 <<국민당우파의 소기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국민당우파의 유언비어에 반박한다.

 

그러나, 진독수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공중앙기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적(국민당)에게 몰래 붙잡힌 것일 것이다. 중앙에서는 청년단원 고이백(高爾柏)을 파견해서, 상해 원교의 송강현성으로 가게 했다. 고이박은 송강사람이다. 그리고 당시 강소성장인 진도유(陳陶遺)도송강사람이었다. 고이백, 진도유의 두 집안은 대대로 교분이 있었다. 고이백은 송강에 있는 진도유를 만났다. 우회적으로 동태를 파악해보았다. 겨러나 진도유는 진독수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마치 진독수를 붙잡지 못한 것처럼. 진독수를 찾을 수 없자, 할 수 없이 임작민은 <<민국일보>>에 '사람찾기'난에 싣는다(연락암호임). 신문에 난 이후에도 전혀 소식이 없었다.

 

2월하순이 되어, 진독수는 돌연 임작민의 거처에 나타난다. 진독수는 웃음을 띄고, 조금도 체포된 것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중앙기관의 업무인원은 총서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연년은 마침 배를 타고 상해를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급히 돌아와서 부자상봉을 했다. 그러니, 더욱 기뻐했다.

 

총서기가 1개월간 실종되다니 도대체 어디로 가 있었는가? 진독수의 해명에 따르면, 그가 1월하순에 돌연 상한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고, 그리하여 당과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그는 <<민국일보>>의 '사람찾기'난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조금 지나면 몸이 다 나을테니 그때 연락하려고 임작민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풍파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 일은 1926년 2월하순의 <<중공중앙특별회의문건>>에서 "진독수실종사건"이라고 불리워진다.

 

진독수의 세번에 걸친 혼인

 

진독수는 세번 결혼한 바 있다. 그의 세번의 결혼은 모두 공개적인 것이었다. 진독수의 첫째부인은 고효람(高曉嵐)이라고 한다. 결혼때 진독수는 17세이고, 고효람은 20세였다. 고효람은 청나라때 안휘 안경영통령 고등과의 장녀(진독수는 안경 사람이다)이다. 이 혼인은 진독수의 모친과 그의 숙부 진연서가 정한 것이다(진독수의 부친 진연중은 이미 사망했다). 결혼후 고효람은 3남1녀를 낳는다. 바로 진연년, 진교년(陳喬年), 진송년(陳松年), 진유수(陳秀)이다. 고효람은 구식여자였고, 문맹이었다. 진독수와 사상이 한 세대이상 차이났다. 진독수가 날로 진보적으로 되어가고, 혁명을 생각하면서 가정의 갈등이 심각해진다. 고효람에게는 동부이모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고군만(高君曼)이다. 아명은 소중(小衆)이다. 북경여자사범을 졸업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사상이 진보적이었다. 진독수는 고군만과 의기가 투합했다. 그러다가 사랑에 빠진다. 1909년, 31세의 진독수는 고군만과 정식 동거를 시작한다. 나중에 고군만이 1남1녀를 낳으니 진학년(陳鶴年)과 진자미(陳子美)이다.

 

고효람은 1930년 8월에 사망한다. 다음해 고군만도 병사한다. 진독수의 세번째 부인은 반란진(潘蘭珍)이다. 그보다 20살이나 어렸다. 상해영미연초공사의 여직공이었다. 1930년, 진독수는 반란진과 상해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당시, 반란진은 진독수의 정치신분을 몰랐다. 1932년 진독수가 국민당에 체포되고나서야 그녀는 진독수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진독수를 떠나지 않았다. 진독수가 출옥한 후, 그녀는 계속 진독수와 함께 생활했다. 진독수가 1942년 5월 27일 밤 사천 강진에서 병사할 때까지.

 

고효람, 고군만, 반란진은 모두 진독수와 여러해를 생활해왔다. 세 부인의 신분은 공개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바로 그 "총서기실종"사건을 일으킨 여인이다. 당시, 진독수는 고군만과 이미 별거했고 아직 이혼은 하지 않았다. 고군만은 두 자식을 데리고 남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진독수는 매월 그녀에게 30위안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진독수와 고군만의 불화를 조성한 원인은, 바로 진독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었다. 그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정초린은 그녀를 본 적이 없다. 진독수도 그녀를 얘기한 적이 없다. 그녀에 대하여, 중공 "1대"대표 이달(李達)은 1954년 2월 23일, 상해혁명역사기념관에 보낸 서신에서 몇 마디 언급하였다.

 

1922년 진독수가 출옥한 후, 여전히 상해 노어양리 2호에 살았다. 그가 구금된 기간은 2주일에 불과했다. 그의 거소에는 당의 문건이 없었다(당의 문건은 모두 보덕리 625호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래의 거소에 2개월을 더 머물렀다. 4월에 그 혼자서 상해 남성도로의 길에 연한 집에서 2층의 통상방을 1칸 빌려서 살았다. 나는 그 곳에 가 본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1개월만 살았다. 5월, 그는 다시 상해현 지계로 옮겼다. 그는 거소를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매 3,5일마다 나의 거소로 와서 일부 문건을 처리했다. 그가 상해현지계에 사는 곳은 그저 이계한(李啓漢)이라는 동지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계한은 상해현지계에서 우연히 진독수를 만났고, 그의 거소에 들어가보았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젊은 여자가 진독수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젊은 여자'는 누구인가? 이달은 모른다. 이달의 부인 왕회오(王會悟)는 그녀의 회고록 <<옛일을 기억하며>>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당시 당중앙은 비밀이었다. 이달은 낮에는 문을 나가지 않았다. 서신, 원고등 일상적인 업무는 내가 대신 처리했다. 나는 항상 애를 써서 겨우 진독수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진독수의 처의 입에서 알게 되었다. 진독수는 다른 작은 집을 빌려서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다고."

 

필자는 1989년, 1990년에 왕회오를 여러번 인터뷰한 바 있다. 그녀가 말할 '다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그녀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젊은 여자는 확실히 수수게끼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진독수의 딸"이라고 자처하는 여인

 

어쨌든 흔적은 남는 법이다. 정초린의 회고에 따르면, 진독수가 사망한 후, 반란진이 그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1937년 8월, 진독수는 남경에서 석방된다. 9월중순, 반란진과 함께 무한으로 간다. 한구 덕윤리에서 거주했다. 진독수는 일찌기 한구청년회에서 강연을 한 바 있다. 하루는 돌연 13,4살된 아가씨가 한구청년회로 진독수를 찾아왔다. 스스로 진독수의 딸이라고 밝혔다. 이름은 진홍(陳虹)이었다. 진독수가 진홍과 만날 때, 반란진도 곁에 있었다. 반란진은 이전에, 진독수에게 이런 딸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홍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진홍을 찾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모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또 다른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1980년, 중공상해시위 등소평의 사무실에서 전달해온 서신을 하나 받았다. 서신은 진홍의 딸인 장모가 신강에서 등소평에서 쓴 것이었다. 그 안에는 모친을 위하여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진홍은 상해에서 일을 했으므로, 이 서신을 상해로 보낸 것이었다. 서신에 다르면 진홍은 원래 상해에서 영화계통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문혁'때 죽었다. 중공상해시위는 연락원을 보내어, 진홍이 생전에 일하던 직장에 알아보았다. 이 직장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진홍의 사망경위를 조사했다. 진홍의 딸도 신강에서 상해로 날아왔다. 필자는 당시 조사업무를 책임졌던 왕장강(王長江)을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홍은 1924년 2월 15일에 태어났다. 해방전에 극을 배웠고, 배우생활을 했다. 중경에서 하(夏)씨성의 국민당 관리와 결혼했다. 나중에 하모와 이혼하고, 중경의 중국영화제작창에서 일했다. 이 창에서 장연(張燕)과 결혼한다. 그리하여 딸을 하나 낳는다. 해방후에 장연은 상해영화악단에서 일을 한다. 진홍은 상해의 영화제작창에서 화장품보관원으로 일한다. 그녀는 보통의 직원이었다. 1962년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잘 출근하지 않았다. '문혁'이 시작된 후, 부득이 매일 공장으로 나와서 활동에 참가했다. '문혁'초기에 그녀는 '3명고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투(批鬪)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저 화장조의 정치학습에 참가했을 뿐이다. 나중에 일부 사람들의 소위 역사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이 대자보를 붙였다. 진홍이 바로 '우경기회주의 우두머리 진독수의 딸'이라고. 진홍은 변명했다. 자신은 진독수의 양녀이지 친딸이 아니라고. 1969년, 진홍은 식도암이 걸려 사망한다. 당시에 45살이었다.

 

정초린의 회고에 따르면, 반란진은 진독수와 진홍이 한구에서 만났을 때, 중요한 한 마디 말을 했던 것을 언급했다: "나는 나의 딸이 아니다. 너는 네 모친의 딸이다" 이렇게 보자면, 진홍은 확실히 진독수의 양녀이지, 친생이 아니다. 그러나, 진홍이 생전에 가족들에게 남긴 자전에서는 자신이 진독수의 친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공장에서 자신이 진독수의 양녀라고 한 것은 자신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외에, 진홍은 1924년에 태어났다. 이때는 바로 진독수와 그 이름을 모르는 여인과 비밀리에 동거하던 시기(전후 약 3,4년간 동거함)이다. 진홍을 본 사람들은 진홍의 얼굴의 코 아랫부분이 진독수와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진홍은 진독수의 친딸이었을까? 이치대로라면 진홍의 인사기록에 기록이 있어야 한다. 진홍은 1960년 3월 및 1965년 6월, 두번에 걸쳐 '직공등기표'를 작성한 바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가정구성원'의 난에 그녀의 부모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회관계'에도 그저 그녀의 전남편인 하모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기는 해도, '문혁'중에 어떻게 누군가가 대자보에 그녀의 남들이 잘모르는 신세내력을 밝힐 수 있었을까? 이 소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자세히 진홍의 인사기록을 조사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진홍이 '직공등기표'를 쓸 때, 부전지가 하나 붙어 있다. 조직에 약간의 문제를 설명한 내용이다. 그 안에는 자신의 부친이 진독수라는 것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홍은 부친에 대한 인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진독수가 아주 일찌기 그녀의 모친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진홍은 어려서부터 극을 배우고, 자립했다. 그녀는 자신이 철이 든 이후에 유일하게 한번 진독수와 한구에서 만났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그녀를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만났을 때, 부친의 곁에는 다른 여인(즉, 반란진)이 있었다. 진홍은 그 광경을 보고, 진독수와 몇마디 말을 하고는 화를 내고 떠나버렸다.

 

진홍의 이 설명은 정초린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진홍은 진독수가 말한 그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너는 나의 딸이 아니다. 너는 네 어머니의 딸이다"

 

진홍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왕장강의 조사에 따르면, 진홍은 진독수의 양녀이다. 그러나, 진홍의 자전등에서는 그녀가 진독수의 친딸이다.

 

그러나, 필자는 진홍의 신세내력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진홍이 설명한 역사문제의 그 부전지에서 그녀의 모친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이름으로 원명이 시지영(施芝英)이었다.

 

진홍이 '직공등기표'를 작성할 때, 시지영은 아직 세상에 살아 있었다. 그저 진홍과 내왕이 거의 없었을 뿐이다. 진홍의 인사기록상으로 시지영의 거주지는 상해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60여년전의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는데 마침내 단서가 나타난 것이다.

 

호적기록으로 보내 대체적인 신세내력

 

상해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성황묘 일대이다. 그곳은 상해의 노성(老城)이다. 좁은 가로의 양측에, 구식 건물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주소를 따라, 필자는 짧고 좁은 길로 갔다. 안란로(安瀾路). 이 3층짜리 건물에서 나는 시지영이라는 노부인이 살았는지를 물어보았다. 한 노부인이 말했다. 이곳에는 왕씨 일가가 살았을 뿐이고 시씨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할수없이 파출소를 찾았다. 민경 갈학홍등이 열심히 도와주어, 호적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시지영의 이름을 찾아냈다. 호적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901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안휘 사주 쌍구하초만 사람이다.(현재의 강소 사홍현), 소학교2학녀까지 다녔다. 직업난에는 '집안일'이라고 되어 있다. 호적에 간단히 적힌대로 시지영의 신세내력을 개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정주부이므로 상세한 인사자료가 남아있지 않았다. 진독수가 1879년에 태어났으니, 그녀보다 22살이나 많았던 것이다.

 

호적에는 시지영의 남편이 기록되어 있었다. 왕울여(王蔚如), 일명 왕청림(王淸林)으로 1898년 1월 6일에 태어났다. 강소 남통사람이며, 원래 남통대생방직공사에서 근무했다. 1957년 3월 12일 남통시 사가에서 호구를 이 곳으로 이전했다. 시지영은 원래 상해 영길신촌에 거주했었다.

 

이렇게 보면, 그 노부인은 안란로의 작은 집에서 왕씨일가들과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상해사람들은 나이든 부녀에게는 남편의 성을 따서 '왕백모', '왕가아파(王家阿婆)"라고 부른다. 시지여 자신의 성명은 다른 사람들이 알기 어려울 것이다.

 

호적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1965년 1월 4일 상해회계로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파출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호적자료를 뒤져보았다. 조사해보내 그들의 이름 아래에, 모두 '사망'이라는 검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왕울여는 1969년 11월 3일에 위출혈로 사망했고 향년 71세였다. 4년후, 시지영이 1973년 12월 23일 뇌일혈로 사망한다. 향년 72세였다. 그들은 다른 가족이 있었는가? 호적에는 그저 그들 두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다. 가족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자세히 옛날 호적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왕울여, 시지영의 그 페이지 뒤에 "왕미진(王美珍)"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바로 그들의 딸이었다. 왕미진은 1927년 2월 16일에 태어났고, 비고난에 '홍콩에서 옮겨왔다'고 되어 있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호적책에는 그저 '전출'이라는 도장만 찍혀 있고, 언제 어디로 전출갔는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시지영, 왕울여, 진홍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인터뷰할 수도 없다. 왕미진은 행방을 모른다. 시지영은 아무런 인사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시지영의 일생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필자는 회계로의 그녀가 살던 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길다란 골목안에 양쪽으로 모두 3층짜리 집이 들어서 있었다. 필자는 시지영이 살았던 집을 찾아냈다. 문앞에서 30여세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나의 소개서신을 보더니, 깜짝 놀랄만한 말을 했다: "아. 시지영. 바로 진독수의 작은 마누라?!"

나의 소개신에는 그저 시지영의 상황을 적었을 뿐인데, 그가 어떻게 진독수를 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료가 아닌가? 자료실의 죽은 자료보다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있다. 그는 시지영의 이웃인 주아주머니를 불렀다. 주아주머니는 다시 여러 이웃들을 찾아주었다. 그들은 서로 한마디씩 했고, 시지영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지영은 마르고 키가 컸다고 한다. 얼굴은 각지고, 눈이 맑았다고 한다. 그녀와 진독수는 모두 안휘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상해에 살아서, 상해말도 유려했고, 보통화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신문과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그녀는 2층에 살았는데, 평소에 이웃과 한 부엌을 쓰면서도 다툰 적이 없었다. 인간관계가 아주 좋았다. 시지영은 평소에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녀와 남편 왕울여는 함께 살았는데, 오는 손님도 없었다. 우연히 여자 하나가 와서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가지는 않았고, 구정때도 찾아오지를 않았다. 평소에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는 남편과 공원을 산책했고, 태극권을 수련하고, 야채를 사고, 그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세끼 밥을 했다. 무료하면 마작을 했다.

 

그녀의 집에는 홍목가구가 있었는데, 괜찮아 보였다. 다만, 그녀는 급여가 없었다. 왕울여도 그저 퇴직급여만 있었따. 처음에는 남통에서 매월 부쳐왔는데, 나중에는 부근의 광달양말공장에서 수령했다. 시지영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원래 영길신촌의 집에서 살았고, 해방전에 전세임대하여 살았다고.

 

시지영의 옛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시지영이 스무살때쯤 찍은 큰 사진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26인치 텔레비젼의 브라운관보다 컸다. 홍목으로 된 액자에 넣어져 있는데, 그녀의 집에 와본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이 사진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녀의 반신사진이다. 젊고 예뻤다. 치파오를 입고, 손에는 비취팔찌를 여러개 차고 있다. 손가락에는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이 사진은 '문혁'중에도 여전히 그 곳에 걸려 있었다. 그녀의 집은 '문혁'때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금으로 된 관음보살이 놓여 있다. 이웃들에게 보여주니 평소에 집안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은으로 된 식기세트도 있었다.

 

1969년, 왕울여가 죽은 후, 시지영은 아무런 경제적 수입이 없었다. 그리하여 거민위원회에 보조금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녀는 겨우 1달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생활이 곤란하지 않다고 얘기했다. 이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보조금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다시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의 물건들을 팔아서 생활했다. 생활은 괜찮았다. 그녀는 평소에 집에서 혼자 패구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매번 음력제야가 되면, 그녀는 외로웠다. 다른 건물의 양씨할머니가 그녀를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 양씨할머니와 그녀는 자매처럼 수십년간 교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양씨할머니의 딸이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영이 술을 마신 후에는 말이 많아졌다고 한다. 항상 그녀를 가장 잘 대해준 것은 "노진(老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씨집안 사람들은 "노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진독수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진독수와 어떻게 함께 생활했는지도 얘기했다. 함께 숨어다니면서, 지하공작을 하였다고 했다. 양씨집안 사람들은 뭐가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시노부인이 술을 마시고 헛소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든 사람이 그저 젊었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웃인 주아주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시지영은 왕울여가 사망한 후, 여러번 그녀에게 '노진'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아주머니는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남의 집 전남편에 관하여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진'을 그리워했다.

 

시지영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

 

이웃 주아주머니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한다. 시지영이 1973년 동지 다음 날(필자가 만년력을 찾아보니 1973년 동지가 12월 22일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날은 12월 23일이다. 호적에 기재된 시지영의 사망일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죽었다고 한다. 동지는 상해인들이 '동절(冬節)'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몸을 보하는 것을 먹으면서 이 날을 보낸다. 이날 시지영은 채소시장에서 줄을 서서 돼지족발을 두 개 샀다. 그리고 인삼을 넣어서 함께 탕으로 끓였다. 그녀와 주아주머니는 같은 부엌을 썼으므로, 주아주머니는 그녀가 이번 동지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알고 있다. 이 날은 모든 게 정상이었다.

 

밤에, 주아주머니는 잠을 들었는데, 돌연 시지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서 시지영의 문을 밀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밀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거민위원회 간부를 소리쳐 불렀고, 힘을 써서 문을 밀어서 열었다. 시지영은 요강위에 앉아서 설사를 했다. 거민위원회간부는 '대고낭(大姑娘)'을 불렀다. 이 '대고낭'은 청소하는 일꾼이었다. 분뇨를 버리는 일을 해서 힘이 셌다. 모두 그녀를 '대고낭'이라고 불렀다. '대고낭'은 시지영을 들쳐 업고, 가까운 보안로 185호의 서광의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검사해보니, 병세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만일 입원하려면, 사람이 곁에서 간호해야 한다고 했다. 거민위원회 간부는 시지영이 혼자 살아서, 친척이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대고낭'으로 하여금 업어서 집으로 데려가게 한다. 집에 도착한 후, 시지영은 정신이 맑았다. '대고낭'이 그녀를 침대위에 놓자,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방문을 닫아달라고 한다. 주아주머니는 이것이 개략 밤12시에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시지영의 방안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주아주머니는 밖에서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을 열고 보니, 시지영이 침대위에서 죽어 있었다. 의사가 진단한 결과 뇌일혈로 죽었다고 하였다. 시지영은 곁에 아무도 없는데, 누가 후사를 처리할 것인가? 거민위원회 간부는 4년전에 왕울여가 죽은 후에, 유골함을 그의 자녀들이 남통으로 보내어 안장했던 것을 기억했다. 왕울여의 전처는 3남1녀를 낳았다. 모두 남통에 있었다. 그리하여, 전보를 남통으로 보냈다. 왕의 외손녀등이 달려와서, 후사를 처리했다. 그리고 시지영을 화장한 후, 유골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왕의 외손녀가 유물을 정리한 후, 트럭에 싣고 남통으로 가버렸다. 시지영의 사진을 넣었던 액자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이웃들 중에서 중학생이 있었다. 이름은 유과달(劉科達)이다. 그는 호기심에 버려진 사진을 뒤져보았다. 시지영의 큰 사진 뒤쪽에 같은 크기의 사진이 한 장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진에 나온 사람은 아주 멋있는 남자였다. 양복을 입고 머리도 잘 다듬어져 있었으며, 손에는 '스틱(지팡이)'를 집고 있었다. 유과달은 이 사진에 나오는 사람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웃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바로 시지영이 평소에 얘기하던 '노진'이라는 것을.

 

소식이 양씨집안에까지 들어갔다. 그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시지영이 술먹은 후에 했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노진'이 바로 진독수라는 것을. 그랬던 것이다. 필자가 문앞에서 만난 그 30여세의 남자가 바로 만나자마자 진독수를 언급하였는데, 바로 유과달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신문과 책에서 진독수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시지영이 잘 보관하고 있던 사진속의 그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왕울여의 후인은 그 액자를 버려버렸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시지영은 왕울여의 후처이다. 그들과는 간격이 있다. 하물며 액자 속에는 시지영의 전남편의 사진이 들어 있다.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 두장의 큰 사진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고난 다음의 운명은 알 수가 없다.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아마도 진귀한 역사사진이 되었을 것이다.

 

이외에 이웃들이 목격한 것은, 왕씨후손들이 떠난 후, 시지영의 집에는 해방전의 구지폐가 가득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시지영과 왕울여가 결합한 후,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 왕미진의 신세내력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진독수이후 왕울여이전에 시지영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시지영의 경력은 이렇게 여러 곳으로 찾아봐서 겨우 대략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독수와 몇년간 같이 산 적이 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총서기실종'의 진상도 분명해졌다. 당연히 더욱 상세한 자료를 나중에 찾게 된다면, 진독수의 이 기간동안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경력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