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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육징상(陸徵祥): 매국노에서 벨기에수도원장까지

by 중은우시 2011. 6. 25.

 

: 고원(高遠)

 

육징상은 중국근대사에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일생동안 두 번의 유명한 사건에 관여한다. 첫째, 1915, 당시 외교총장(외무부장관)의 직에 있던 그는 원세개정부를 대표하여 일본과 <이십일조>의 매국조약을 체결하다. 둘째, 1919년 세계제1차대전이 끝나고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였다. 육징상은 대표단을 이끌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다. 거기에서 독일이 점령한 산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하기로 동의한다. 나중에 프랑스화교들의 저지로 서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악명을 떨치게 된다. 파리평화회의후 이는 5.4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중년이 된 후, 일찍이 8번이나 외교총장과 내각총리를 맡았던 중화민국의 풍운인물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교외지역에 있는 세인트앤드류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된다.

 

육징상이 왜 벨기에로 가서 은거했을까? 그는 회고록에서 <이십일조>의 체결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을까? 육징상은 당시 중국의 외교사무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선, 그의 가정과 혼인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육징상은 1871년 상해의 한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독교의 신교 신자였다. 육징상은 어려서부터 가정의 영향으로 서방언어를 배운다. 1862, 육징상은 총리아문이 주관하는 상해광방언관과 북경동문관에 들어가고, 성적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대청국 주러시아공사관의 4등비서 겸 통역으로 보내어진다.

 

러시아에 주재하는 동안, 육징상은 외교적인 댄스파티에서 러시아에서 귀족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키는 페이드 비프라는 벨기여 여인을 만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고, 결혼얘기까지 오간다. 육징상의 혼인선택은 당시로서는 대담한 것이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서양며느리와의 사이에 나온 혼혈아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고, 문중묘에 묻힐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육징상의 은사인 주러시아대사인 허경징(許景澄)도 육징상이 서양부인을 맞이하는데 반대했다. 그러나 육징상과 페이트 비프는 서로 마음이 굳었다. 두 사람은 1899 2 1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녀카타리나성당에서 혼례를 거행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허경징이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너는 외국을 너무 철저히 배웠다. 부인까지도 외국사람으로 취하는구나. 만일 나중에 자손이 있으면 몰라도, 자녀도 없고, 부인이 먼저 죽어버리면, 너는 수도원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외국인들의 관습이다.” 허경징의 이 말을 나중에 맞아떨어진다. 육징상 부부는 천주교회내에서 하늘이 그들에게 내려준 자녀를 기르겠다고 기도하였지만, 하늘은 그들 부부에게 자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생동안 자녀를 두지 못하다. 허경징의 이 농담은 육징상의 훗날을 그대로 보여준다.

 

육징상은 부인과 함께 귀국한 후, 육징상부인은 중국습관을 잘 따른다. 집밖출입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하한 사교활동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현숙한 이 서양여인은 그러나 뼛속으로는 강인한 기개가 있었다. 육징상이 외교부장으로 일본과 <이십일조>를 체결하기 전에 육징상부인은 그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국은 땅도 넓고 물건도 많으며, 인구도 일본보다 몇 배나 많은데, 왜 일본인만 만나면 고양이 앞의 쥐인가? 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가?

 

육부인은 1926년에 사망한다. 당시 주스위스공사로 있던 육징상은 부인의 상을 치른다는 이유로 공직을 사퇴한다. 다음 해에, 부인의 영구를 브뤼셀의 로얄 라이칸 공동묘지에 묻는다. 수일후, 육징상은 세인트 앤드류수도원의 성신강림절에 참가하고, 정식으로 수도원에 들어간다. 육징상은 왜 수도원에 들어갔는가?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동포와 친구들은 내 동기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속세를 버리고 수도를 택했다. 유럽의 이국타향의 한 천주교 수도원에 묻히고자 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광명을 구하지도 않았고, 행복을 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의 직책을 다하고자 할 뿐이다. 처가 죽은 후 나는 고독을 느꼈다. 나는 일생에서 이때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했다. 나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싶었다. 나는 물러나서 생각하면서, 인자한 천주의 집안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한 마음으로 천주의 의탁하고, 한 마음으로 자신에 의탁하며, 인자한 천주가 나를 이끈다. 나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거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국타향의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육징상은 시시때때로 고국과 가족을 생각했다. 중국의 전쟁시기에, 육징상은 조국의 운명에 시시때때로 관심을 나타냈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곤 했다.

 

1945년을 전후하여, 두 중국기자가 벨기에 수도원에 칩거하는 육징상을 취재하러 온다. 그리고 그에게 외교에 관한 옛 일들을 물어본다. 육징상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십일조>의 체결은 아주 급히 이루어졌다. 당시 귀국보고하러 갔던 일본공사가 돌아왔고, 원세개를 만나 일본천황의 뜻을 전달한다. 그리고 내가 다른 물건 하나도 가져왔는데 보십시오라고 말하는데 바로 그 물건이 <이십일조>였다. 원세개는 아주 매끄럽게 처신한다. 그 자리에서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돌아와서 이 뜨거운 감자를 외교총장 손보기에게 떠넘긴다. 손보기는 노련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육징상을 부른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하니 그에게 외교총장의 직책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한다. 육징상은 당시 44세로 한창 나이였다. 외교총장이 된다면 그것만한 다행이 없었다. 외교관출신인 육징상은 <이십일조>를 체결하는 것이 어떠 결과가 올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체결하기 전날, 그는 원세개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 육징상은 천추만대에 걸쳐 욕을 먹게 되었습니다.” 육징상은 스스로 나라의 은혜를 입엇으니, 국가가 어려울 때 극력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십일조>에 서명한다. 낮ㅇ에 그는 천주교사학자인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십일조>를 체결한 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으며, 원세개의 뜻을 따르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육징상이 만년에 약간이나마 위로되었던 것은 <이십일조>중 가장 중요한 제5항의 각조를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무기는 모조리 일본제를 쓴다거나, 경찰은 중국과 일본이 절반씩으로 한다거나, 고문을 전국에 설치한다거나, 일본불교의 전도를 도와준다는 것등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은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최소한 나라의 국격은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직업외교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인과는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다. ‘친일사대금강인 조여림, 장종상, 육종여와 비교하면 그는 약간은 용서받을 부분이 있다. 육징상은 두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30년동안, 나는 이를 깊이 후회한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 일을 꺼내지 않았다. 누가 묻더라도, 나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오늘 두 사람이 불원만리하고 찾아와서, 옛날일을 물으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약한 나라에 외교는 없다는 것이다.”

 

1949 1, 육징상의 병이 위중해진다. 수도원 원장이 그를 보러 가서 말한다: “중국은 너의 마음에서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자 육징상은 말을 하지 못하면서 손가락 3개를 내민다. 수도원장은 그 뜻을 알아듣고, “중국이 너의 마음에서 3/4을 차지한다고 하자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들은 육징상을 평가함에 있어서, 선량하고 연약한 서생성격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성격이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육징상이 죽은 후, 수도원 지하묘실 제2행 제1공에 묻힌다(1행은 사망한 전임원장이 묻혀 있다). 현재 수도원에는 육징상기념관이 있다. 관광객들, 특히 갈수록 많아지는 중국관광객들은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에 외교총장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으며, 나중에 서방수도원 원장이 되었던 육정상의 전설적인 일생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