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왕안석(王安石): 가장 재미없는 인물

by 중은우시 2010. 10. 17.

글: 왕일위(王一葦)

 

 

 

 

일반적인 추도사에서 하는 말로 하자면, 왕안석의 일생은 혁명의 일생이고, 전투의 일생이다. 그의 흥미는 아마도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데만 있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영감을 썩히게 된다. 그는 청렴했고, 집안에서도 청빈한 생활을 했다. 여색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정신적인 경지를 끌어올리는데 장애가 된다. 즐길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풍류를 알겠는가? 왕안석의 시가를 읽어보면, 그가 창작한 연대에 따라 그가 겪은 정치사건과 정치포부를 펼치는데 실패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사랑에 관한 것은 아예 찾으려고 생각도 말라.

 

왕안석의 개혁은 비교적 전형적인 서생의 개혁이었다. 그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명단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큰 벌집을 건드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마광, 구양수, 정이, 여공저, 부필, 문언박, 범중엄, 소식, 소철, 범조우, 조부지, 황정견, 진관, 왕안국....필자가 좋아하는 시인은 기본적으로 이 속에 다 들어 있다.

 

왕안석이 선택한 개혁파트너는 정말 형편없는 자들이었다. 죽지 않은 자는 나중에 모조리 간신이 된다. 한번은 왕안석이 집안에서 소인 여혜경(呂惠卿)등과 밀담을 나눌 때, 그의 동생 왕안국(王安國)이 퉁소를 불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왕안석이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왕안석은 동생에게 말한다: "속된 음악(鄭聲)은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왕안국이 대답했다: "간사한 자를 멀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안석의 개혁을 널리 추진하기 전에, 광범위한 타당성검토를 한 적이 없다. 추진하고난 후에도 적시에 결함을 수정하지 않았다. 임어당은 <<소동파전>>에서 왕안석변법을 요약한 것이 있는데, 필자가 본 것중에는 가장 웃기는 것이다: "왕안석의 변법은 9가지 제도가 있는데, 그 중의 3개는 국영기업이고, 3개는 새로운 세금이고, 3개는 인민의 등기제도를 통제하는 것이다" 대약진과 문혁을 거친 사람들은 그냥 한번 생각만 해보면 개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개혁조치중 상업계획은 황실의 것을 내다 파는 것이어서, 황제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부결시켜버렸다.

 

왕안석의 변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잘못은 황권을 이용하여 신정(新政)을 펼친 것이다. 그러면서 법률수단으로 약자집단의 권익을 보장하는데 소홀했다. 특히 중국문화는 역대이래로 상업을 경시해서, 중국의 상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효과적인 무역관리모델과 자금유통채널이 없었다. 경제법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거래쌍방의 권익을 제대로 보장해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개혁의 결과는 대량의 관상이 시장, 물자를 독점하고 자금흐름을 통제하여 백성들은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왕안석의 정책수준이 낮은 것은 그래도 용서가 된다. 그래도 그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지는 말았어야 한다. 사마광과 같이 온화한 사람도 신정을 반대했으나 효과가 없자, 왕안석을 찾아가서 얘기해보려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마광은 그와 결렬을 선언해버리는 것이다.

 

왕안석의 언행은 아들의 모범이 되었다. 아들은 누군가가 개혁을 반대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살(殺)'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다. 이 때도 왕안석은 아들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이 중병에 걸린 후 강제로 아들과 며느리를 별거하도록 조치한다. 아들은 처를 그리워하였지만, 감히 부친의 명을 어기지는 못했다. 할 수 없이 <<안아미(眼兒眉)>>라는 시를 써서 괴로운 마음을 읊었다.

 

그러나, 이 시도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아들은 한을 품고 죽는다. 아들이 죽은 후, 며느리는 개가한다. 이를 보면 왕안석은 마음이 냉막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미가 없는 것이다. 아들이 죽은 후에야 후회를 하여 관직을 사임한다.

 

왕안석은 말년에 옛 일을 회상하면서, 아마도 헛되이 세월을 보낸데 대하여 회한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성과를 내지 못한데 대하여 부끄러워했을 수도 있다. 그는 아마도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생명과 모든 정력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업에 바쳤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