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정강2년(1127년) 봄, 금나라의 철기가 변경을 짓밟고, 북송이 멸망한다. 4월, 중원한족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금나라인들은 황제(송휘종, 송흠종) 및 황후, 황태자를 데리고 북으로 갔다. 북송에서 가치있는 물건과 사람은 모조리 데리고 가서, 개방의 창고는 텅텅 비게 된다. 이 사건을 후세인들은 '정강지난(靖康之難)'이라고 부른다. 이때 단 두명의 황실구성원이 난을 피하는데, 한 사람이 송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강왕(康王) 조구(趙構)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송철종(宋哲宗)의 첫번째 황후인 맹씨(孟氏)이다.
맹황후(1073-1131)는 명주(하북 영년) 사람이다. 명문집안출신으로, 미주방어사 마군도우후 맹원(孟元)의 손녀이고, 궁중에 들어간 후에 고태후(高太后)와 향태후(向太后)가 모두 그녀를 아끼고, 그녀에게 여러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었다. 원우7년(1092년), 맹씨는 황후에 책봉된다. 송철종은 어려서부터 색귀였는데, 맹씨는 용모가 평범한데다, 자신보다 3살이 많았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 맹황후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고태후는 이를 눈치채고 송철종에게 말한다: 이렇게 좋은 부인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송철종의 성격을 잘 아는 고태후는 여전히 맹씨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 현숙한데, 복은 없구나. 나중에 나라에 사변이 생기면 감당할 사람은 반드시 그녀일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바로 고태후가 예측한대로, 맹치의 운명은 기구했다.
맹씨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송철종은 가끔 한번씩 황후에게 가는 외에는 주로 어시(御侍)인 유씨(劉氏)와 함께 했다. 유씨는 송철종보다 3살이 어렸고, 젊었으며 미모가 뛰어났고, 시와 글을 잘했다. '후궁내에서 가장 예뻤고, 다재다능했다." 맹씨보다는 여성적인 매력이 훨씬 뛰어났다. 유씨는 애교도 있고 성격도 칼칼한 편이었다. 하루종일 맹씨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을 생각했다. 맹씨는 딸을 하나 낳았는데, 복경공주(福慶公主)이다. 소성3년(1096년) 구월, 복경공주가 병에 걸려서, 온갖 약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맹씨의 언니는 부적을 몰래 숨겨가지고 들어온다. 부적은 궁중의 금기이다. 맹씨는 대경실색하여 부적을 감추어둔다. 송철종이 딸을 보러왔을 때, 맹씨는 스스로 나서서 고백을 하고, 경위를 설명한 후, 송철종이 보는 앞에서 부적을 태워버린다. 송철종은 이를 '인지상정'이라고 보고 책임추궁을 하지 않았다. 얼마후 복경공주는 요절하고, 딸을 잃은 맹씨는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맹씨가 슬픔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횡액이 닥친다.
여인의 질투는 가장 무섭다. 일단 발작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하물며 황후의 자리를 호시탐탐노리는 유씨같은 경우에는. 과연, 유씨는 부적문제를 사방에 떠벌리고, 맹씨가 몰래 부적을 쓰려고 했다고 비난했다. 곧이어 맹씨의 양모가 황후를 위하여 기도한 일까지 덧붙여서 송철종에게 일러바친다. 맹씨가 나쁜 마음을 먹고 도교의 부적등을 써서 황제를 저주하려했다는 것이다. 송철종은 원래 맹씨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맹씨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대노하여, 즉시 이 일을 조사하게 시킨다. 유씨는 이 기회에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지시하여, 환관과 궁녀 수십명이 붙잡혀와서 팔다리가 잘리고, 혀가 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러한 혹독한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다. 당시 북송은 마침 신구당쟁이 벌어지는 때였고, 맹씨는 구당을 지지하는 고태후, 향태후의 편이었다. 송철종이 친정을 하면서, 구당을 극력 배제하고, 고태후의 당파에 타격을 가했다. 아마도 이것이 맹씨가 손쉽게 모함을 당하여 배제된 이유일 것이다.
곧이어, 송철종은 맹씨를 축출한다. 요화궁에 머물게 하며, 화양교주, 옥청묘정선사라고 부르며, 법명은 충진이라고 했다. 황후에서 머리를 깍지 않고 수행하는 비구니가 된 것이다. 요화궁이라는 이름은 화려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변경의 길거리에 있는 몇칸짜리 낡은 집이었다. 지위와 대우가 일락천장하고, 일상생활도 감시를 받았으니, 맹씨의 처지가 어떠할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원부3년(1100년), 송철종이 병사하고, 송휘종이 즉위한다. 구당은 향태후의 지지하에 다시 고개를 들고, 맹씨는 황궁으로 다시 모셔져서 황후의 명호를 회복한다. 그러나 이때는 유씨가 이미 원부황후에 봉해져 있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하여 맹씨는 원우황후로 불리운다. 생각도 못하게 다음 해에 향태후가 병사하고, 곧이어 원우당사건이 벌어진다. 송휘종은 신당을 기용하면서 구당을 배척했다. 향태후라는 배경을 잃은 맹씨는 다시 이 사건에 연루된다. 숭녕원년(1102년) 십월, 맹씨는 두번째로 폐위를 당하고, 다시 요화궁으로 돌아간다. 명호는 '희미원통지화묘정선사'로 바뀐다.
그후 25년동안 맹씨는 요화궁에서 힘든 나날을 보낸다. 비록 처량하기는 하지만, 평정한 시기였다. 그러나, 정강원년(1126년)에 큰 불이 나서 요화궁이 잿더미로 바뀐다. 맹씨는 할 수 없이 연녕궁(延寧宮)으로 옮긴다. 얼마후, 연녕궁도 화재로 불타버린다. 맹씨는 부득이 대상국사(大相國寺) 부근의 남동생 집에서 머물게 된다. 정강2년(1127년), 송흠종은 맹씨의 처지를 전해듣고, 가까운 신하들과 협의하여, 다시 맹씨를 황궁으로 모셔와서 다시 원우황후에 앉히려고 한다. 그러나, 조서가 미처 나가기도 전에 금나라에 의하여 변경이 함락된다. 금나라병사들은 금태종의 지시하에, 송나라에 가장 악독한 수단을 써서, 송나라황실의 인원을 모조리 금나라로 붙잡아가고, 이를 통하여 북송을 철저히 멸망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금나라병사들은 성내의 모든 황실구성원들을 체포한다. 맹씨는 이미 서인이 되었고, 사람들에 의하여 잊혀졌으므로, 운좋게 이번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금나라사람들에게 포로가 되어 붙잡혀가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후 지고무상한 영예까지 누리게 된다. 새옹지마라 할 수 있다.
금나라가 북방으로 물러간 후, 장방창이 초(楚)나라를 세운다. 사람들은 모두 송나라를 그리워하였고, 조구가 병력을 이끌고 외지에 있어서, 송왕조의 깃발은 아직 완전히 내려지지 않았다. 장방창은 자신의 후일을 위하여 맹씨를 황궁으로 모셔와서 송태후(宋太后)에 앉힌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시켜 전국옥새를 조구에게 보냈다. 오래지 않아, 장방창은 맹씨를 원우황후로 모시고, 그녀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한다. 오월일일, 조구는 응천부(하남 상구)에서 황제에 오르고, 남송을 건립한다. 맹씨는 그날로 수렴청정을 거둔다. 조구는 그녀를 원우태후로 모시고, 나중에 다시 융우태후로 명칭을 바꾼다. 건염3년(1129년) 삼월, 항주에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조구는 쿠데타를 겪고 부득이 퇴위하게 된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조구에게 "원자(즉, 조구의 아들)에게 양위하고 태후에게 수렴청정"하도록 요구한다. 맹씨는 정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다. 그러나 형세가 급박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반군을 다독거리게 된다. 오래지 않아. 한세충등이 지원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게 된다.
조구가 다시 황위에 오른 후, 맹씨는 다시 수렴청정을 거둔다. 조구는 맹씨를 황태후로 모신다. 얼마후, 금나라군대가 남하하고, 조구는 동남의 해안까지 도망간다. 맹씨는 서남의 홍주(남창)까지 도망간다. 맹씨는 겨우 반란을 견뎌냈는데, 다시 멀리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금나라가 물러간 후, 조구는 맹씨를 생각하여, 사방으로 찾는다. 나중에 그녀를 월주(소흥)로 모셔온다. 이때부터 맹씨는 안정된 생활을 시작한다. 정강지난 때부터 조구의 즉위까지, 맹황후의 존재는 어느 정도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과도기의 정치동란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따. 맹씨가 없었다면, 조구는 황제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맹씨가 없었다면, 조구는 쉽게 다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맹씨가 국가의 두번의 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조구는 맹황후에 효도를 다했다. 과일을 새로 얻으면 반드시 태후에게 먼저 맛보게 한 후에 자신이 먹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서인으로 생활했던 맹황후는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녀의 당시 지위로는 얼마든지 돈과 재물을 쓸 수 있었지만, 매월 그녀는 약간의 생활비만 가져다 썼고, 그저 생활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맹씨는 월주(越酒)를 좋아했다. 조구는 월주가 너무 쓰기 때문에 맛이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좋은 진공한 술을 보내주었다. 맹씨는 자신이 사람을 보내어 월주를 사오게 하여 마시곤 했다.
소흥원년(1131년) 봄, 맹씨가 풍질을 앓는다. 조구는 곁을 떠나지 않고 맹황후를 보살폈다. 며칠간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월, 맹씨가 병사하니, 향년 59세이다. 그녀의 영패는 송철종의 옆에 두었을 뿐아니라, 유황후보다 높은 자리에 놓인다. 나중에 조구는 맹씨에게 소자성헌황후라는 시호를 바친다. 두번이나 폐위되고, 두번 모두 복위되고, 두번의 국가위기때 수렴청정을 하였다. 맹씨의 경력은 특이하고 곡절이 많았다. 이런 경우도 중국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화와 복은 함께 하고, 득과 실도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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