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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고구(高俅)는 어떻게 국가의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0. 4. 4.

글: 정만군(程萬軍)

 

세상사람들은 모두 고구는 '구기(球技, 축국기술)' 하나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를 너무 얕보는 말이다. 고구는 단왕(端王) 조길(趙佶)을 만나기 전에 확실히 사회의 한량이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한 것은 절대로 축국(蹴鞠)기술 몇가지때문인 것과 같이 간단하지는 않다.

 

고구가 타나나기 전에, 조길의 구우(球友, 축국친구)는 수없이 많았고,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이들 친구들 중에서 오로지 나중에 나타난 고구만이 중용된다. 이를 보면, 고구는 절대로 축국기술 하나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그가 조길의 축국진영에 가담했을 뿐아니라, 조길의 '인재풀'에도 들어갔다는 점이다. 조길의 '인재풀'에서 고구는 보기 드문 국가동량지재라 할 수 있었다.

 

고구는 도대체 어떻게 조길로 하여금 자신이 국가 동량지재라고 느끼게 만들었을까?

 

역사는 이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한한 사료를 뒤져보면, 고구가 성공한 족적을 찾아볼 수는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송나라는 과거제도와 문관제도가 최고조로 발달한 왕조이다. 송나라때에 현령이상의 문관을 맡으려면 기본적으로 모두 과거시험을 거친 진사여야 한다. 고구와 같은 한량이 과거시험을 쳐서 문관이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그는 '비상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송나라가 '양문억무(揚文抑武)'정책을 쓰고, 문관이 지위가 무관보다 높았지만, 무관에 대한 대우도 결코 낮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관이 되는 것은 문턱이 비교적 낮았다. 채용자격도 비교적 느슨했고, 승진의 신축성도 컸다. 고구와 같은 인물에 있어서는 관직으로 나가는 첩경이라 할 수 있다.

 

고구는 송나라의 상황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감추어야 했다. 송휘종의 앞에서 그는 반드시 '군사적 재능'을 드러내야 했다. 무관노선으로 관직을 뚫은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의 무관임용에도 제도가 있다. 변방의 전공이 없으면, 삼아(三衙)의 장관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변방의 전공을 얻기 위하여 고구는 하층으로 들어간다. 그는 송휘종의 부탁을 받고 변방을 수비하는 장군 유중무(劉仲武)에게 간다. 이를 통하여 자신을 포장하고, 나중에 승진하는 발판으로 삼는다.

 

고구는 도대체 어떤 '변방의 전공'을 세웠을까?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고구는 두 차례에 걸쳐 변방의 소규모전투에 참가한다. 다행히 이 두 번의 전투에서 송나라군대는 모두 작은 승리를 거둔다. 송휘종은 이에 대하여 아주 기뻐했다. 친히 전체 지휘관을 접견한다. 송휘종의 표정을 본다면, 그는 이를 두 번의 큰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가 승진한 자본은 바로 이 경력에서 나온다. 지방군 지휘관인 유중무는 송휘종이 고구를 자신에게 부탁한 이유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고구의 공로를 확대하여 보고해준다. 고구도 은혜를 잊지 않고, 중앙정부로 돌아온 후 유중무에 대하여 여러가지 좋은 말을 해준다. 유중무가 죽은 후에도, 고구는 송휘종에게 극력 그의 아들인 유기(劉琦)가 장군을 맡을 수 있도록 추천한다. 이를 보면, 고구는 지방의 장군들과의 관계를 아주 잘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변방의 전공'을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변방의 전공'을 얻은 고구는 경성으로 돌아가서, 금군(禁軍)을 관리한다.

 

금군을 관리하는 기간동안, 고구는 계속하여 재주를 드러낸다. 군대사열에서 여러가지를 발명창조하여, 보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화려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동경몽화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축국스타는 아마도 챔피온십경기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군대에서 '쟁표경새(爭標競賽)'를 벌인다. 쟁표이전에, 먼저 몸을 푼다. 쟁표가 시작되면, "횡열로 4척의 색깔있는 배가 나란히 있는데, 그 위에는 여러 군인들이 갖은 놀이를 한다. 예를 들어, 대기(大旗), 사표(獅豹), 도도(棹刀), 만패(蠻牌), 신귀(神鬼), 잡극(雜劇)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두 배를 나란히 두는데 모두 음악을 연주한다." 마지막으로 쟁표경새를 벌여서 랭킹을 정한다. 그리고 "선라(旋羅)", "해안(海眼)", "교두(交頭)"등의 각종 행사를 벌여서 아주 요란했다.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지도자는 이렇게 요란한 행사를 좋아한다. 송휘종은 고구의 군사쟁표경새에 아주 만족한다. 그리하여 고구는 관료로서 계속 승진하게 된다.

 

그러나, 고구의 이런 놀이는 전형적인 "화권수퇴(花拳繡腿, 보기는 좋으나 실용성이 없는 것)"이다. 쓸모가 없다. 거란이나 금나라 병사들을 막아낼 수 없을 뿐아니라, 국내의 농민군도 대적하지 못한다. 그러나, 평화시대에는 진정한 전투력을 검증할 수 없다. 고구의 군사공연은 '치군유방(治軍有方, 군대를 지휘하는데 재능이 있다)'의 평가를 받는다. 송휘종이 보기에 고구는 군사적 천재였다.

 

"변방의 전공"에다가 '군사쟁표경새'공연으로, 고구는 전수부(殿帥府) 태위(太尉)의 고관이 되고, 그 자리에 안정적으로 눌러앉는다.

 

이때 이 황제의 축국친구는 마침내 바라던대로 국가의 동량지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