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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이준욱(李遵頊): 중국역사상 유일한 장원황제

by 중은우시 2011. 2. 8.

 

: 유병광(劉秉光)

 

중국의 과거제도는 역사가 길다. 당나라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1000여명의 무과장원, 문과장원을 배출했다. 어떤 사람은 군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자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학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한림이 되었으며, 심지어 관직이 순무, 재상에까지 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원의 신분으로 황제에까지 오른 인물은 단 1명이다. 그는 바로 서하(西夏)의 신종황제(神宗皇帝) 이준욱(李遵頊)이다.

 

이준욱(1163-1226)은 서하황실의 제왕(齊王) 이언종(李彦宗)의 아들이다. <<서하서사>>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널리 책들을 읽어 정통했고, 예서와 전서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박학다식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천경10(1203) 삼월, 이준욱은 서하의 계해과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다. <<금사.서하전>>에도 준욱은 먼저 장원급제했다고 적고 있다. 장원이라는 영예를 얻은 후 이준욱의 관운은 형통했다. 얼마후에는 제왕에 봉해진다. 나중에 대도독부주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며, 서하의 황족중에서 가장 명망있는 인물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는데도 재주가 있었지만, 이준욱은 황권을 차지하는데도 뛰어난 기술을 자랑했다. 황건2(1211) 칠월, 이준욱은 궁중정변을 일으켜, 양종 이안전을 쫓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연호는 광정(光定)으로 고치니, 그가 서하국의 제8대 황제이다. 이준욱은 이렇게 하여 중국역사상 유일한 장원황제가 된다. 그러나, 그는 과거시험에는 장원을 차지했지만,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은 없었고, 치국의 전략도 없었다. 결국 날로 쇠약해지는 서하국을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다.

 

서하국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으며, 전체적인 실력이 부족했다.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하에서, 통치자는 왕왕 강국을 배경으로 하여 생존하여야 한다. 그러다보니, 카멜레온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요나라가 강성할 때는 서하는 요나라에 붙어 송을 친다. 금나라가 기세를 올릴 때는 금나라에 붙어 몽골을 치게 된다. 나중에 몽골이 굴기하자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쳤다. 서하황제가 보기에, 영원한 맹방은 없고, 그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 누가 강하면 그를 따른다. 이안전이 집권할 때, 서하는 금나라에 붙어 몽골을 치는 단계에서,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치는 단계로 넘어가던 시기이다. 몽골은 천하통일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금나라를 치는 동시에 창끝을 서하로 향한다. 이준욱은 몽골의 서하에 대한 위협이 날로 가중될 때 황위에 오른다.

 

몽골의 당시 강력한 기세를 보아서는 서하와 금나라가 서로 연맹하여 대항해야만 호각을 이루고 몽골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장원출신의 이준욱이 이런 간단한 이치를 몰랐을리는 없다. 그러나, 이준욱은 즉위한 후에 이안전의 잘못된 방침을 수정하지 않고, 갈수록 더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치는 방향으로 나간다. 몽골이 금나라를 침략하는 틈을 타서 재물이나 챙기고 영토를 넓히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금나라에 대하여 계속하여 전쟁을 걸게 된다. 규모도 갈수록 커졌다. 토사구팽. 순망치한이라고, 몽골은 금나라를 멸망시키려 할 뿐아니라, 서하도 멸망시키려 했다. 송나라도 멸망시키려 했다. 이준욱이 몽골을 도와서 금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스스로 화를 불러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광정7(1217),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한다. 서하는 삼만의 병력을 파견해서 도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녕주(지금의 감숙성 녕현)에서 금나라에 대패한다. 얼마후 몽골은 서쪽으로 호라즘을 침공한다. 이때 다시 서하에 병력을 보낼 것을 요청한다. 매년 병력을 내보내다보니, 서하의 군비가 너무나 컸고, 사상자가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온나라가 전쟁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조정에서도 이견이 많았다. 녕주에서의 패배로 이준욱은 더 이상 몽골에 붙어 서쪽으로 정벌하는데 참가하지 않고, 출병을 거절한다. 몽골은 서하국이 말을 듣지 않자, 병력을 이끌고 서하국의 수도 중흥부를 포위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이준욱은 몽골군이 돌연 공격해 들어오자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량부로 도망친다. 태자 이덕임만 남겨두어서 성을 지키게 한다. 몽골군이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준욱은 조용히 수도로 돌아온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이준욱은 몽골의 패도를 실감한다. 그리고 몽골로부터의 위협을 직접 느꼈다. 그리하여 전략을 바꾸어, 금나라와 연맹하여 몽골에 항거하려 한다. 광정8(1218), 이준욱은 금나라와 연맹하여 몽골에 항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소인손을 추밀도승지로 임명한다. 그리고 금나라에 함께 몽골에 항거하자고 제의한다. 삼월, 이준욱은 금나라에 서신을 보낸다. 변경호시(邊境互市)를 다시 열고, 양국간에 화해하자고 한다. 금나라와 서하는 이미 십여년간 원한이 깊이 쌓여 있었다. 서로 물과 불같았다. 만일 양국이 이전의 원한을 잊고 서로 도와준다면, 몽골은 쉽게 서하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금나라를 공격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의 선제는 이준욱이 수시로 배신하는데 대하여 화가나 있었으므로 일거에 거절해버린다.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적이다. 금나라와 연맹하여 몽골에 항거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준욱은 송나라와 연맹하여 금나라에 항거하는 쪽을 택한다. 광정9(1219) 금선제는 송나라를 침략한다. 이준욱은 이때 사람을 사천으로 보내어 송나라장수에게 함께 금나라의 침입을 방어하자고 제안한다. 송나라장군은 이에 동의하지만, 이준욱이 배신을 밥먹듯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약속대로 병사를 출동시키지 않는다. 광정10(1220) 오월이 되어서야 송나라와 서하는 비로소 정식 맹약을 체결한다. 양국은 동시에 출병하여, 금나라병사에 항거하기로 한다. 팔월, 송나라와 서하는 약속대로 병력을 동원하여 금나라의 회주성(감숙성 정원)을 함락시킨다. 금나라의 수비장수는 투항한다. 금선제는 깜짝 놀라서, 급히 이준욱에게 화해를 요청하지만, 이번에는 이준욱이 한마디로 거절한다.

 

금선종과 이준욱은 서로 상대방이 급해져서 손을 잡자고 요구하면 성깔을 부려서 거절하곤 한다. 네가 나한테 한 것과 똑같이 너에게 해주겠다는 심리이다. 누구도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양국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그후, 금나라는 있는 힘을 다하여 서하와 송나라 연합군에 저항한다. 공주(감숙성 임조 남쪽)의 전투에서, 서하의 병사들은 금나라병사의 완강한 저항에 수만명이 사망한다. 할 수 없이 공성무기를 불태우고 후퇴를 한다. 그런데, 후퇴하는 길에 금나라의 매복에 걸려 사상자가 속출한다. 십월, 송나라장군은 다시 서하와 진주(감숙성 천수)를 공격하기로 약속한다. 이준욱은 공주에서의 패배 때문에 겁을 먹고 다시 출병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와 서하의 연맹은 좋지 않게 끝이 난다.

 

몽골에도 미움을 사고, 금나라와 화해할 기회도 놓치고, 송나라와의 맹약도 파기했다. 이준욱은 이렇게 하여 사방에 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때 몽골의 철기가 다시 쇄도해왔다. 이번에 서하를 침공하면서 두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다시 서하의 수도로 진격하고, 다른 하나는 서하의 하서의 여러 성을 공격한 것이다. 몽골군이 거대한 기세로 치고 들어오자, 이준욱은 놀라서 몽골군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고, 5만의 군사를 내어서 금나라로 진격한다. 한바퀴를 돌아서 이준욱은 다시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공격하는 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 광정13(1223), 몽골군이 봉상(섬서성 봉상)으로 진격했다. 이준욱은 10만의 병사를 보내어 몽골군의 공성을 도왔다. 그런데, 금나라에 패배한다. 사태가 좋지 않자, 이준욱은 몽골군에 통지하지도 않고, 서하병력을 후퇴시킨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떠나간다. 이렇게 하여 몽골과 서하간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서하는 큰 손실을 입는다. 나라는 계속된 전쟁에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고달퍼진다. 경제는 거의 붕괴상태가 된다. 광정13(1223) 오월, 서하의 흥주, 영주에 큰 가뭄이 든다. 그리하여 곡식을 한 톨도 거두지 못한다. 백성들은 사방을 유랑하고 심지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진다. 전쟁의 유린과 재난의 급습으로 이중고를 겪는 서하의 백성들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서하의 통치계급내부에서도 갈등이 날로 격화된다. 조정에서 태자 이덕임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몽골파는 이준욱이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공격하는 잘못된 정책에 격렬히 반대한다.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는 것을 거절한다. 태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겠다고까지 나선다. 이준욱은 화가나서 이덕임을 폐출시키고 그를 연금시킨다.

 

서하는 몽골이 시키는대로 십여년간 전쟁에 가담하면서, 정예군인들은 모조리 죽고, 백년동안 쌓아왔던 기반도 모두 사라진다. 나중에 몽골군이 응리현(지금의 영하 중위)을 함락시켰을 때, 창고에는 곡식이나 옷감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도 이준욱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십이감군사의 병마를 모아서, 계속하여 몽골을 도와 금나라를 공격했다. 어사중승 양덕의가 나서서,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 태자를 다시 불러들이고, 백성을 구휼하며,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백성과 신하들이 기뻐하고, 국가의 위기를 해소하라고 호소하였다. 양덕의의 상소를 이준욱은 전혀 듣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며 그의 관직을 박탈한다.

 

이준욱이 몽골의 주구로 지냈지만, 몽골인들의 환심도 사지 못했다. 몽골은 서하를 착취하는 동시에, 서하를 탄압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광정13(1223) 십월, 몽골은 서하의 병력이 봉상에서 아무 말없이 떠나버린 것을 징벌하기 위하여, 서하의 병력을 적석주(지금의 청해 순화)에 포위하고는 반달후에야 병력을 물렸다. 이에 대하여 조야에서 원성이 가득했고, 의분강개했다. 이준욱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몽골의 허수아비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가 배신을 자주 하고, 사람들의 인심을 잃어감에 따라, 몽골도 그에 대하여 흥미를 잃게 된다.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퇴위하도록 요구한다. 십이월, 몽골의 협박과 조정신하의 반대속에서 이준욱은 둘째아들 이덕왕(李德旺)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제가 된다.

 

이준욱이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능력이 없었지만, 불교에는 깊이 빠져서 여러가지 일을 벌인다. 이준욱이 즉위한 때는 서하국이 쇠락하는 때였다. 몽골군이 변방을 압박하자, 국가의 평안을 위하여, 이준욱은 어제발원문을 만들어, 황제의 명의로 금으로 <<금광명최승왕경>>을 쓰게 한다. 불교를 통하여 국가를 보호받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아무리 도와주어도, 이준욱이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공격하고, 금나라와 연합하여 몽골에 대항하고, 송나라와 연합하여 금나라에 대항하고, 다시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침공하는 잘못된 노선을 걷게 되니, 서하가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준욱의 대외관계에서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덕왕이 즉위한 후, 이준욱의 몽골에 붙어 금나라를 공격하는 정책을 시정한다. 다시 금나라와 연합하여 몽골에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늦었다. 몽골군의 강공하에, 서하는 패배가 기정사실화된다. 건정4(1226) 오월, 이준욱이 서거하니, 향년 64세이다. 시호는 영문황제이고, 묘호는 신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