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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武則天)이 무자비(無字碑)를 남긴 이유는?

by 중은우시 2009. 2. 12.

 

 

 

글: 침묵과담(沈默寡談)

 

산서성 건현(乾縣)의 현성 북쪽에 있는 양산(梁山)에 위치한 건릉(乾陵)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제 무측천의 합장묘이다. 중국역대제왕의 능원중 유일한 부부황제 합장묘이다. 묘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술성기비(述聖記碑)"로 무측천이 글을 짓고, 당중중 이현(李顯)이 글을 썼으며, 주로 당고종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이 비는 일곱 마디로 구성되어 있고, 일곱마디를 서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예로부터 "칠절비(七節碑)"라고 불렀다.

 

그런데, 동쪽에 있는 비석은 무측천 자신이 스스로를 위하여 세운 "무자비(無字碑)", 즉, 아무런 비문도 쓰여있지 않은 비석이다. 비석의 머리부분은 8마리의 서로 얽히고 섥힌 이수(首)를 조각했으며, 천운룡문(天雲龍紋)으로 장식했다. 비석의 하단부분에는 준마음수(駿馬飮水), 웅사(雄獅), 운문(雲紋)등을 새겨두었다.

 

건릉건축에서의 대칭적인 배치라는 특징으로 볼 때, "무자비"와 "술성기비"는 분명히 당고종이 서거한 후 무측천이 동시에 세우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초 이 비석에는 글자 한 자 새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륭년간의 <<옹주금석기>>의 기록에 따르면: "비석의 측면에는 용과 봉을 새겼지만, 그 정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 1938년에 편찬된 <<건현신지>>에서도 "원래 글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무자비"에는 왜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까? 천여년이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각종 견해를 내놓았다. 종합해보면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공덕이 너무 커서 새길 필요가 없었다는 설, 둘째는 스스로 죄악이 큰 것을 알고 기록하기 곤란했다는 설, 셋째는 시비공과는 후세인들에게 맡기겠다는 설, 넷째는 후계자가 불만이 있어 글을 새기지 않았다는 설, 다섯째는 글자를 새겼었는데, 후인들이 지워버렸다는 설이 그것이다.

 

첫째, 공덕이 높고 커서 글자로 새길 필요가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스스로를 자랑하고, 공덕이 크고 높아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측천은 655년에 황후가 되고부터 705년 퇴위당할 때까지 50년간 최고권력의 자리에 있었다. 만일 당고종이 죽은 때로부터 계산한다면, 그래도 21년이나 된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고 걸출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명문세족을 타파하고, 과거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대량의 인재를 정치무대로 끌어들였고, 문벌귀족의 독점을 저지했다; 그녀는 농사, 잠업을 일으키고, 수리사업을 벌였으며, 요역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균전제를 정돈하여, 사회경제를 계속 발전시켰고, 인구수를 증가시켰다; 그녀는 사람을 잘 뽑아서 일을 맡겼고, 파격적으로 등용하며, 각급 관리들이 인재를 추천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건의를 잘 받아들여 이후 당나라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인물들이 이때 등용되었다. 그녀는 봉건국가의 변방도 잘 관리하고, 변방 각 민족과의 관계도 잘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무측천은 정치적인 재능과 이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의 통치기간동안 민중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들을 많이 처리했고, "정관지치"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역사가 일대 진보를 이루게 되며, 나중의 "개원지치"를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스스로 죄악이 깊고 무거워 말로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이 "무자비"를 세운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문을 아예 쓰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첫째, 무측천은 애교의 수단으로 저급의 "재인"에서 "황후"에까지 올라 후궁의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은 "황제"에 올라 천하의 대권을 훔쳤다. 둘째, 당파를 조장하고, 궁중에 간사한 무리들을 끌어모아서, 이씨 당나라조정을 무너뜨렸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제거했다. 셋째, 혹리를 기용하여, 밀고와 남형의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넷째, 당나라초기 사회경제발전은 말안장형인데, 무측천이 정권을 잡았을 때가 가장 낙후한 시기였다. 다섯째, 그녀가 정권을 잡은 동안 안서사진을 잃어, 국가통일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이유로 무측천은 스스로를 위하여 글을 남기기 곤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자비"를 세운 것이다.

 

셋째, 시비공과는 후세인들이 판단하도록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무측천은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무자비"를 세운 것은 아주 총명한 조치였다. 시비공과를 후세인들에게 논하라고 남겨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측천에게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있다. 무측천이 정권을 잡은 기간동안, 정관지치 이래로 경제는 발전하는 추세가 계속 되었다; 당고종이 사망한 후의 복잡한 국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다; 건의를 받아들이고 인재를 등용하는 두 가지 점에 있어서는 봉건정통사상을 지닌 인사들마저도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다만, 무측천의 부정적인 면도 아주 두드러진다. 그녀는 개인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혹리"를 등용했고, 무고한 자들을 많이 죽였다. 불교를 깊이 믿어 사치낭비가 심했다. 특히 통치후반기에는 조정의 정치가 날로 부패하고, 무측천이 등용한 새로운 특권귀족들이 등장한다. 무측천이 어쩔 수 없이 권력을 내놓게 되고, 정권을 당중종에게 넘기는데,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잘 알았다.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평가를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냥 "무자비"를 남겨서 후세인들에게 평가를 남긴 것이다.

 

넷째, 후계자가 원한을 품고 있어 비문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당중종 이현은 비록 무측천의 친아들이지만, 장기간 그녀의 위세에 눌려 공포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여러번 독수에 당할 뻔도 했다. 이현은 모친이 혹형을 남발하고,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데 대하여 아주 싫어하고 미워했다. 무측천은 태자 이홍, 즉 효경황제를 독살하고; 태자 이현(李賢)을 폐위시켰다. 즉, 장회태자는 서인으로 되었고, 나중에 자살한다. 당중종 이현은 당초에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무측천에 의하여 황위에서 쫓겨났고, 경성에서 축출된다. 20여년간, 이현은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리하여 매번 무측천이 보낸 사람이 왔다는 말만 들으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장남인 이중윤(李重潤), 즉 의덕태자, 딸인 이선혜(李仙蕙), 즉 영태공주는 모두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무측천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 무측천은 만년에 황위를 조카인 무씨(武氏)에게 넘겨주려고 기도했다. 이렇게 온갖 고통을 겪은 당중종이 다시 황위에 오른 후에 비록 공개적으로 모친에 대한 원한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아예 글자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에게는 "무자비"가 남겨지게 되었다.

 

다섯째, 새겨졌던 비문을 후세인들이 제거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원래 비문을 새겼었는데, 나중에 당현종이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목적은 무주(武周)정권이 이당(李唐)정권에 준 치욕을 철처히 씻어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무측천이 병사한 후, 당중종이 복위했다. 당중종은 비록 정치적 포부는 없었고, 연약하고 무능했지만, 그의 노력하에, 모친의 비문에 그녀의 공덕을 새기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비문을 새겼다면, 나중에 왜 없어졌는가?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나중에 집권자가 비문의 내용을 다시 지워버린 것이다. 당나라 개원2년, 714년 삼월, 당현종 이융기는 조서를 내려 천추(天樞)를 없애도록 한다. 이를 보면 당현종이 무측천이 남긴 잔존한 무씨집단을 제거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당현종은 병사를 이끌고 부친 이단, 즉 당예종을 다시 황제위에 올린 후,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를 천후(天后)로 명칭을 되돌리게 한다" 그리고, 무삼사, 무숭훈의 시호를 박탈하고, 부관참시하며 묘를 갈아서 평지로 만든다. 무씨 숭은묘(崇恩廟)와 호릉(昊陵), 순릉(順陵)을 없애버린다. 그는 자신이 등극한 후, 대거 무주정권이 남긴 문제를 처리한다. 개원 이년, 그는 "천추를 훼멸시키고, 그 쇠를 녹여서 돈을 만들게 했다" 그 목적중 하나는 바로 철저히 무씨가족이 이씨가족에 준 치욕을 씻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루어볼 때, 무씨정권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기 위하여, 그가 무측천의 능묘에 있는 석비에 이미 새겨진 비문을 지워버리게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 이런 다섯 가지 견해가 남아 있다. 이들 각각의 견해는 모두 각자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 어느 한 설이 정설로 굳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무자비"가 남긴 수수께끼는 아마도 후세인들이 계속 탐구하고 추측해야할 이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