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당나라 구시원년(700년): 15개월 442일의 가장 길었던 1년

중은우시 2009. 11. 16. 17:38

글: 유병광(劉秉光)

 

중국고대의 역법(曆法)은 하력(夏曆)이든, 은력(殷曆)이든, 주력(周曆)이든, 아니면 한나라의 태초력(太初曆)이든, 모두 1년을 12달로 규정했다. 그리고 윤달을 두는 것으로 규정했다. 즉, 3년에 윤달1달, 5년에 윤달2달, 19년에 윤달7달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1년은 12달이 아니면 13달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구시원년(久視元年, 서력700년)은 공전절후의 15개월이 된다.

 

한무제가 1월을 정월(正月)로 정한 이래로, 대부분의 왕조와 황제는 이를 본떠서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왕망, 조예, 무측천과 이형과 같은 예외적인 황제도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왕망은 "12월삭(朔, 초하루) 계유일을, 건국원년 정월의 삭(朔)으로 삼는다"(한서, 왕망전); 조예는 "건축지월(즉 12월)을 정월로 삼는다", "경초원년 3월을 4월고 고친다"(삼국지. 위지); 이형은 상원2년 9월에 "11월을 세수(歲首, 새해의 첫달)로 삼고...상원호를 없애고, 원년으로 칭한다." 7개월후에는 다시 '사월(巳月, 4월)을 4월로 삼는다"(신당서. 숙종본기).

 

이들은 옛날의 제도로 되돌아가려 하거나, 정통을 차지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려 했다. 왕망, 조예, 이형의 이러한 독특한 행동은 당시에 역법을 비교적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와 비교하자면, 무측천의 "변법"은 더더욱 어지럽다. 천수원년(690년) 9월, 무측천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고친다. 그리고 구무왕 희발(姬發)을 조상으로 제사지낸다. 그러면서 당나라가 정월을 세수(한해의 첫해)로 삼은 것을 폐지하고, 11월을 세수로 한다고 선포한다. 역사상 단지 주나라만이 11월을 세수로 하였다(사서. 역서). 필자는 이것을 무측천이 당나라를 대신하여 주나라를 세운 후에, 찬위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통치연원을 조작하는 정치수완이라고 본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1월, 2월, 3월...11월, 12월의 순서는 11월, 12월, 1월...9월, 10월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에, 상황은 또 바뀐다. <<구당서. 측천황후>>의 기록에 따르면, 성력원년(聖曆元年, 700년) 5월, 무측천은 연호를 "구시(久視)"로 바꾸면서, 당나라전기의 "1월, 2월, 3월...11월, 12월"의 순서로 되돌아간다. 역법은 비록 회복시켰지만, "정월은 여전히 11월"이라고 하였고, 이는 바꾸지않았다. 이렇게 하여, 구시원년(700년)은 11월, 12월, 1월...9월, 10월, 11월, 12월"이 된다. 여기에 윤7월까지 끼어들어가서, 모두 15달이 되어버렸다.

 

음력은 매달 29.5일이므로 이에 따라 계산하면, 구시원년은 442일이나 된다. 이는 중국역사상 가장 길었던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역법사상 이 기이한 현상은 무측천이 수시로 연호를 바꾸고,역법을 교체한 결과이다. 이는 완전히 인위적인 요소로 인하여 조성된 것이다. 역법을 고치는 것은 사직의 안정에 관련되는 중요한 일이다. 무측천은 걸출한 정치가인데, 그 이치를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대여황인 무측천은 왜 대주의 역법을 포기했을까? 왜 스스로 주례로 복귀한다는 겉옷을 벗어버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무측천의 이 조치는 정치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일 뿐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무주혁명'을 통하여 67세의 무측천은 그녀의 여황제의 꿈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당왕조의 옛신하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태자의 심복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하여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이에 대하여 무측천은 혹리를 기르고, 신하들에게 고압적인 정치를 실행한다. 한편으로는 수시로 연호를 바꾸고, 이를 기화로 천하에 사면령을 내림으로써 인심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외에 그는 적인걸을 대표로 하는 능신들을 기용해서, 대주를 위하여 일하게 한다. 그러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신하들이 겉으로는 그녀를 따르는 척하나 속으로는 그녀를 반대했고, 이당왕조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10년후, 무측천이 나이가 들고 병이 든다. 체력과 정력이 이전같지 않았다. 대주정권은 점점 곤경에 빠져든다.

 

구시원년 정월, 무측천은 "장생약"을 복용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병이 악화되었다. 병을 치료한 후, 무측천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천책금륜대성의 호"를 취소한다(자치통감). 금륜은 불가용어이다. 천하를 통치한 제일의 성왕이다. 천책금륜은 차안세계와 피안세계의 두 권위를 합친 것이다. 무측천은 스스로 이 존호를 버린다. 이는 정치적인 새로운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9월, "당나라의 대들보'이던 적인걸이 병사한다. 무측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마디 한다. "조정이 텅 비었다"(자치통감). 이는 일대여황이 자신의 오른팔을 잃은 후의 애상과 무기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적인걸이 죽고 얼마되지 않아, 무측천은 '당나라의 정월을 회복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그녀가 혼자서 분전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어떻게 민심을 다시 얻을지 고민하면서 생각해낸 정치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대주력을 실행할 때는, 나라를 새로 세워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을 드러낸 고조기라면, 대당력을 회복한 것은 여황의 생애에서 저조기라고 할 수 있다. 5년후, 무측천은 강제로 퇴위당한다. 임종유언에서 "황제호칭을 없애고, 황후로 개칭한다. 건릉에 묻어달라"고 한다. 이 결말은 사실 구시원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구시원년(700년)은 중국역사상 가장 길었던 한 해이다. 그리고 무측천의 정치생애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한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