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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세리(勢利)의 역사(歷史)

by 중은우시 2009. 8. 19.

글: 진원(陳遠)

 

한 사람이 있다. 근대사상 아주 유명한 사람이고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람이다. 역사는 항상 그를 피해가고 싶어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근대역사에서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이다.

 

흥미를 위해서, 그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말고, 우선 소거법을 써보기로 하자.

 

그는 교육자가 아니다. 그러나 교육에 열정이 있었고, 산동대학의 전신인 산동대학당은 바로 그가 만든 것이다. 학당을 만들 때, 그는 말했다: "국력의 강약은 인재를 봐야 한다. 인재의 성쇠는 학교에서 나온다. 인재를 잘 기르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다. 학교는 바로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다." 이 말은 당시의 일류대학의 총장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말이다. 혹여 다른 사람이 대필해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의 견식을 엿볼 수 있다.

 

과거를 폐지한 것은 근대교육사의 대사이다. 이것은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일이었다. 그의 딸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부친은 자주 이 일을 언급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일생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쉽게도 후세사가들은 과거폐지를 언급할 때, 그의 이름을 드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당시 그가 대청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은 아직 남아있고, 증거도 확실하다.

 

직예(直隸, 지금의 하북성)가 근대이래로 비교적 일찌감치 완비된 교육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관계가 깊사: 바로 그의 지지하에, 엄수(嚴修)등의 인재가 직예에서 신식교육의 붐을 불러일으켰고, 각종유형 각종등급의 신식학교를 세우게 된다. 1907년, 남개중학의 전신인 천진사립제1중항에서 예당(禮堂)을 만들었는데, 예당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직예 최초의 공립여자학당도 그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다. 907년, 청나라정부의 학부에서 전국교육에 대하여 상세한 조사통계를 내었는데, 직예의 교육은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재정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나 1901년 12월, 그가 직예총독의 자리를 넘겨받을 때,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은 엉망인 재정상태였다(당시 직예총독의 재정창고에는 20만냥의 백은이 남아이었는데, 이것도 산동 재정창고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실업을 발전시켰고 효과가 현저했다.

 

1902년, 그의 주재하에, 보정(保定)에 농무국을 설립하고, 천진에는 공예총국을 설립한다. 1905년, 농무국은 미국의 면화 시험재배에 성공한다. 외국의 면화는 확실히 더 나았다. 그래서 이후 직예등 북방지역에서는 이 면화가 보급된다. 이는 농업발전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다. 직예성은 전통농업에서 현대농업으로의 전환과정에 있었는데, 바로 그가 직예총독으로 있을 때였다.

 

공예총국은 전성의 공상업건설을 이끄는 기구이다. 직예의 실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관청이 상인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1904년, 천진직염봉인공사를 만드는데, 자금이 부족했다. 그는 정부에서 15000위안을 출자하여 지분을 가지면서 도와준다. 1907년 천진기계유리공장을 건설하는데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했다. 그는 은5000냥을 출자해서 도와준다. 이런 방식은 지금보자면 시장경제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공상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청나라말기에는 기업의 발전에 큰 촉진역할을 했다. 천진은 이러한 정치환경하에서 발전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재미없는 데이타를 제시해보면, 당시 천진의 발전을 명확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경자(庚子)이전에 천진에는 4,5개의 근대공업기업이 있었고, 자본총액은 110만냥이었다. 신해(辛亥)에 이르러, 이미 137개로 늘고 자본총액은 2920만냥에 달하였다.

 

데이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가 직예총독으로 있던 시기가 천진의 공상업발전의 황금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는 사법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법학의 선구인 심가본(沈家本)이 수율관을 주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그의 동료인 장지동, 유곤일의 추천때문이다. 청나라정부가 사법개혁과정에서 얻은 많은 성과는 대부분 그의 노력과 관련있다. 예를 들어, 사법, 행정의 분리로 사법독립을 꾀한 것; 또한 총검찰청을 설립하여 법부의 감독을 받게 하며, 형사소송의 기소를 담당하게 한 것등이 있다. 직접적인 증거는 바로 당시 지방사법개혁의 시범을 직예에서 진행했고, 직예의 책임자는 바로 그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거하자면, 열거할 것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멈추자. 그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많이 하지 않을수록 좋다. 왜 그런가? 내가 그 답을 말하겠다.

 

원인은 바로 그가 원세개(袁世凱)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사학자들은 북양을 언급하면, 대부분 반동군벌로 취급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1928년 민국통일이후,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북양의 옛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이 시기의 자료들 중에서 많이 남아있는 것은 소문이거나 억측이다.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캠브리지중국사>>는 이 시기를 언급하면서 이런 상황을 얘기한다: "이 시기의 전체적인 견해는 오랜 기간동안 당시의 신문과 비사에 근거하여 쓴 저작에 좌우되었다. 핵심주제는 원세개와 그의 군벌후계자들의 스캔들이었다. 이 전통에서 가장 재능있는 대표자는 아마도 도국은(陶菊隱)일 것이고, 특히 그의 <<북양군벌통치시기사화>> 6권(1957년)이 대표작이다. 이런 상황 즉 깊이없는 연구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어떤 역사학자도 평가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최근들어 이견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완전히 상반된 해석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사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원세개는 청나라말기의 격변하는 상황하에서 손중산등 혁명가와 연합하여, 청나라황제를 퇴위하게 하고, 중화민국을 건립했다. 강산이 바뀌면서도 피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황제제도가 하룻밤만에 붕괴와해되었다. 중국역사상 이는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이후 원세개는 대총통에 오르는 것은, 손중산이 이전에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손중산이 양보한 것도 아니고, 원세개가 훔쳐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처럼 세리(勢利)적이다. 원세개가 집권할 때, 밖에는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고, 안에는 혁명당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수하로 있던 장군들도 세력이 커진 다음에는 야심도 점점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세개의 황금시대는 순간적으로 지나갔고, 다시는 옛날의 원궁보(袁宮保)가 아니었다.

 

일본이들이 <<21조>>를 내밀었다. 그는 싸울 힘이 안되어 굴욕적으로 받아들인다. 오랫동안 그는 "매국노"로 인식되어 왔다. <<북양집단굴기연구>>의 작자인 장화등 선생이 그의 연구에서 조심스럽게 원세개에게는 민족감정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역사학자들도 세리적이라고 감탄할 수박에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다면,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절대다수의 통치자는 민족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사관에서는 대립되는 모든 측은 매국노일 뿐이었다.

 

역사는 정말 미묘하다. 어떤 사람은 "일준차백추(一俊遮百醜. 한가지 잘한 일이 백가지 못한 일을 덮어준다)"이고 어떤 사람은 "일추차백준(一醜遮百俊, 한가지 못한 일이 백가지 잘한 일을 덮어버린다)" 그중의 변증법적 관계는 내가 잘 모르겠다. <<북양집단굴기연구>>를 읽으면 나는 북양의 쇠락을 떠올린다. 작자인 장화등교수의 조심스러운 결론을 읽으면, 역사라는게 어떤 때는 세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