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자함(王子涵)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천샤오는 지금까지도 다리에 장애가 남아있다. 이재일주의 보도에 따르면, "한 사람의 경력을 얘기할 때, 어려서의 경력이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일생의 낙인으로 남는다"고 했다. 2003년, 천샤오는 상해의 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지난 경력을 언급한 바 있다.
1959년 천샤오는 상해의 남회구(南匯區, 지금은 포동신구에 합병됨)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대약진시대여서, 천샤오의 부모는 일에 바빴고, 자식을 돌볼 틈이 없었다. 자식이 아픈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그때는 아이를 돌보는 것도 문제였다. 당연히 우리는 부모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 천샤오는 1살 때 소아마비로 진단받는다.
병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기도 전에 운명은 또 한번 그를 심연속으로 빠트리게 된다. 천샤오가 10살이 되던 해에, 집안의 대들보인 부친이 사망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집안의 생활은 졸지에 곤경에 처한다. 생활의 모든 책임은 약한 여자에 불과한 모친의 어깨에 지워졌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때때로 생각을 해보면 정말로 식은 땀이 날 정도이다. 당시 모친은 삼십세였고, 나는 열살이었다. 게다가 남동생, 여동생이 있었다. 당시의 생활광경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천샤오는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라는 말을 두번이나 썼다.
"그러나 이 불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은 왕왕 역경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성격이 비교적 강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이념이 있었고,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창조하고 싶었다. 즉, 이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하면 뭔가를 창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1980년대 중반, 천샤오는 모 길거리의 공장에서 일을 한다. 거기서 뛰어난 실적을 보이고, 두뇌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오래지 않아 그 공장에서 상해시공업국삼산판(三産辦)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삼산판의 책임자가 되어 나중에 그의 일생부침을 함께 하는 '가전'의 경영을 책임진다.
그 당시, 칼라TV는 다른 공급부족인 물자들과 마찬가지로 표를 가져야 구매할 수 있었다. 천샤오는 끼워팔기로 가져온 재고물품은 외지에 팔고, 칼라TV는 시민들에게 팔았다. 3개월동안 삼산판의 사업은 상해탄에서 잘 나갔다. 그의 이러한 뛰어난 운영은 나중에 가전업에 지입하는 기반이 된다.
1990년, 상해의 남회현상업국은 그를 삼산판에서 빼내서, 그로 하여금 산업국의 가전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천샤오가 부임한 후, "남회현가전도매점"은 "용러가전도매총공사(永樂家電批發總公司)"로 명칭을 바꾼다.
1993년, 그는 이미 당시 용러가전공사의 상무부총경리에 오른다. 그러나 바로 이 해에 천샤오의 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당시 용러는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상무부총경리를 맡고 있으니 주요한 경영자이다. 그러나 내가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커다란 국영기업에서 상당한 직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가정에서 발생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적인 부담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천샤오는 혼자서 10여세의 딸을 데리고 40여만위안의 부채를 안고 처의 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천샤오는 시정해서 말한 바 있다. 부채가 40만이라는 것은 최고치의 숫자이다. 만일 당시의 국유기업의 보통간부수입으로 따지자면, 천샤오는 이 빚을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마음 속으로 불만도 있었다. 내가 쏟은 것과 얻은 것이 균형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나는 적지 않은 공허을 했는데, 나는 가족의 건강마저도 보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반드시 사업을 창업하고 나 자신이 부를 만들어가겠다고. 내가 자신의 가정의 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비극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1994년 처가 죽은 후, 천샤오는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근무한다. "나는 더욱 노력했다. 그러나 1996년,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만일 내가 기업의 운명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1996년 국유기업인 용러가전도매총공사는 파산한다.
"나는 당시 회사에서 한 사업을 나눠 맡고 있던 부총경리였다. 나는 이 브랜드를 위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잘나갔지만, 결국은 파산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장악하고 우리가 스스로 일을 한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인가?"
천샤오는 말했다. 당시 일부 직원들은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한 기업을 창업할 능력이 있고, 사회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샤오는 47명의 직원들과 이 회사를 떠난다. "즉 샤하이(下海)를 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돈을 내서 회사를 만들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시험이었다."
"원래 국유기업에서는 국유기업이 부도가 나더라도 개인에게는 손실이 크지가 않았다. 여전히 거기에 근무하고, 여전히 급여를 받아간다. 그러나 국유기업을 나오고 나면 이후의 모든 것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성공한다면 좋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천샤오는 말했다. 당시에 그를 따라 함께 창업한 사람들은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많은 사람들은 모은 재산을 전부 털어넣었다. "당시에 나는 일종의 책임을 느꼈다. 만일 내가 이 47명을 위하여 미래를 창조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면목이 없다"
2003년이 되어 당초 천샤오를 따라 함께 창업했던 47명은 갈 사람은 가고, 흩어질 사람은 흩어졌다. 당시 한 기자가 천샤오에게 물었다. 당시 그를 따라 함께 창업했던 옛부하들중 도대체 얼마나 용러그룹에 남아서 일하고 있는지. 천샤오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2/3의 사람들만이 용러에서 일하고 있다고.
천샤오가 다시 가전업으로 활로를 뚫어갈 때, 여전히 이전에 파산한 국영기업 용러와 같은 이름의 '용러'회사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천샤오의 이러한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샤오는 왜 옛회사의 이름을 그렇게 아쉬워하는가? 하필이면 망한 회사의 이름을 가지고 새 회사에 붙여야 하는가?
"이는 실제로 그저 소박한 감정이다. 우리는 이 기업을 위하여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천샤오의 말이다. 실제로 나중에 자신의 당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왜나하면 기업이 도산하면, 많은 측면의 악영향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을 시작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2005년 10월 14일, 용러전기는 홍콩에 성공적으로 상장한다. 134배의 프리미엄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10.26억홍콩달러의 자금을 모집한다. 모건 스탠리와 정휘는 5000만달러를 투자하여 용러가전의 20% 지분을 구매했다. 용러가 상장한 첫날 2.375홍콩달러의 종가를 나타내었고, 모집가격보다 5.56%정도 높은 평범한 출발을 했다.
그러나, 상장한지 1년만에, 용러는 궈메이로부터 매수를 당한다.
2006년 11월, 궈메이전기는 홍콩에서 1:3.08의 비율로 용러전기의 지분전부를 교환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용러의 주주에게 4.09억홍콩달러의 현금을 지급했다. 총대가는 52.68억위안이었다. 예전에 용러전기의 동사장을 맡고 있던 천샤오는 궈메이의 CEO가 된다.
황광위는 회사의 51.2%지분을 가지고 있고, 처샤오는 3.5%가량을 보유했다. 경영진을 대표한 지분비율은 12.5%이다. "만일 지나치게 주주이익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개인득실을 고려한다면, 합병은 아예 불가능하다." 천샤오는 합병을 하면, 이익차이는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와 황광위는 공통의 미래발전전망이 있었다. 이러한 미래이익은 당연히 눈앞의 이익보다 크다."
8월 18일, 당시 인수합병에 참여했던 인사에 따르면, 용러가 상장시에는 발전이 빨랐지만, 이때는 이미 경영이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천샤오에 있어서, 용러의 위기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당시 이미 아주 피곤한 상태였다. 또한 국내가전업의 악성경쟁으로, 천샤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궈메이와 손을 잡는 것이 하나의 출로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도 황광위가 용러를 인수해준 것은 그가 호의로 지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상술한 인사는 말한다: "황광위가 왜 천샤오를 도와주느냐. 그에게 이익이 없는 일을 황광위가 왜 하겠는가? 황광위가 용러를 인수한 것은 그저 궈메이가 상해시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궈메이가 용러를 인수한 후 얼마지나지 않아, 2007년 5월 천샤오는 기자회견을 연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궈메이 CEO로서의 역할에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금방 북경에 왔을 때는 먹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지금은 북겨에서 내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찼았을 뿐아니라, 매일 회사에서 먹는 음식은 황총의 집안에서 만든 것이다. 나는 조산사람들의 음식입맛이 상해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궈메이와 용러가 합병된지 4년이 지난 후 , 천샤오와 황광위라는 옛날의 "친밀한' 전우는 지금 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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