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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누가 장작림(張作林)을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10. 8. 8.

글: 아억(阿憶)

 

여러가지 견해를 종합하면, 1920년대말에 최소한 5종의 세력이 장작림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중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일본이다. 역사서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1928년 여름, 장작림은 북벌군에게 패배한 후 북경에서 심양으로 철수했다. 일본 관동군은 황고둔에서 그의 전용열차를 폭파하였고, 장작림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원수부 소청루로 옮겨졌다. 장학량(張學良)에게 '모든 것에 국가가 중요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오부인은 일본군을 붙잡아놓기 위하여,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학량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결론에는 여러가지 의문이 있다. 일본군이 장작림을 암살하였다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얻는게 무엇일까? 장작림은 미국과 가까워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과 소련의 동북에서의 투쟁이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장작림은 군사적으로 장개석에게 계속 패퇴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민국정부에 대한 지배를 상실했으며, 외교적으로 소련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과의 갈등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각종 조약관계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장작림을 보호했을 때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작림을 죽였을 때 일본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저 다른 4종의 적대세력으로 하여금 나설 수 있는 핑계를 줄 뿐이다.

 

역사서중에서는 장작림이 북경을 떠날 때, 일본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방비를 강화했다고 한다. 이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장작림은 확실히 여러번 출발시간을 연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암살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북경을 떠날 때 당당하게 떠났다. 각계의 지도자들이 환송을 하고, 플랫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연도의 역마다 관련 요인들이 나타났다. 그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비밀로 한 것도 아니었다. 심양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봉천군이 지킨 것이 아니라, 일본군이 호위했다. 장작림이 보기에 일본군이 호위하면 더 믿을 수 있었다. 이외에 전용열차에는 일본고문 의아성(儀峨城)도 그와 동행했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죽이려 햇을 뿐아니라, 자신들이 통제하는 구간에서 암살을 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암살도 아니다. 그저 대놓고 죽이는 것이 더 간단하다. 그래서 일본은 계속하여 장작림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밝힌 것이고, 암살자는 장개석의 특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보충할 것이 있다. 장작림이 암살당할 때, 인후를 다쳐서, 유언을 남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소청루의 침실로 옮겨진지 얼마지나지 않아 장작림은 죽었다.

 

그렇다면, 국민당이 장작림을 암살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있다. 장개석의 북벌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장작림이었다. 비록 참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한 명만 죽이면, 굳이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었고, 장학량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미워하게 할 수 있다면, 중국은 통일될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정말로 이렇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지금, 장학량은 이미 죽었고, 타이페이정부는 아직도 비밀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장학량의 부친을 죽인 것이 바로 장개석이라는 점에 대하여. 그리고 당시 국민당이 일본이 통제하는 구간에 깊이 침투하여 폭약을 매설할 수 있는지, 폭발시간을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또 하나의 추측은, 북양군벌의 적대파벌이 장작림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북양의 장군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주 의견이 달랐고, 걸핏하면 싸웠다. 이긴 측이 통제하기는 해도,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피차간에는 서로 술을 마시고 만나곤 했다. 게다가 봉천계의 숙적이건 봉천계의 반도이건, 모두 첨단의 암살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의 복수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대쇠를 위하여 복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를 보면 이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때 중국공산당은 장개석, 왕정위로부터 '청당'을 당한지 얼마지나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이미 지하로 들어갔고, 북방에서는 원래부터 역량이 부족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대쇠는 당시에 중공의 지도자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소련공산당의 대변인이나 국민당 북방당무책임자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선양하고, 공산주의소조를 창건했지만, 중공1차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국민당대표대회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복수한다면 당연히 소련공산당이나 국민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바로 소련공산당이다. 1926년부터, 장작림은 소련이 중국침투를 저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이대쇠가 풍옥상의 변란을 책동한 것에 대하여 장작림은 혐오적이었다. 공개적으로 반소반공을 외쳤다. 사실상, 그는 민국정부 구세주의 신분으로 북경에 진주한 것이었다. 그의 구국방안은 일본인을 안정시키고, 북방에서 소련과 항쟁하며, 남방에서 소련공산당이 지원하는 북벌군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1928년, 풍옥상은 이미 국민당 제2집단군 총사령관으로 북벌군에 합류한다. 이대쇠는 소련대사과에서 체포된다. 소련에 군사정보를 제공한 죄로 처결당한다. 이와 동시에, 장작림은 동북철로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날로 분명히 한다. 이는 서로는 만주리에서 동으로 수분하까지 옛날 러시아가 건설한 철로를 중국이 빼앗아간다는 말이다. 남으로 대련에 이르는 노선은 이미 일본인에게 넘어갔으므로, 이는 스탈린이 원동을 지배하는데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가장 장작림을 죽이고 싶었고, 그를 죽게할 능력을 갖추고, 그 죄를 다른 측에 전가시키고, 혼란중에 최종적으로 이익을 얻은 곳은 소련뿐이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이 어떻게 일본군이 엄밀하게 통제하던 남만철도에 폭약을 설치하고, 아주 정확하게 폭발시킬 수 있었는지는 아직 해명되지 않는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