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매상유(梅桑楡)
음모와 폭력의 상징이며, 신비한 색채를 가득 띄고 있는 세력이 방대한 흑룡회는 1901년에 성립되었다. 흑룡회는 일본비밀결사의 시조인 현양사(玄洋社)에서 갈라져 나왔다. 흑룡회는 일본의 국경을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인 흑룡강까지 확대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흑룡회'라고 이름하였다. 유명한 낭인의 왕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를 흑룡회의 창시자이자 회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도야마 미쓰루는 흑룡회의 창시자도 회장도 아니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흑룡회의 창시자이고, 도야마 미쓰루는 그 막후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치다 료헤이는 도야마 미쓰루의 애제자이다. 그는 방회의 성격은 비교적 옅고, 정객의 성격이 비교적 짙다. 그는 평소에 정치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로 사귀었으며, 자주 글을 짓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고취시켰다. 1901년 1월, 그는 현양사의 몇몇 회원 및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흑룡회를 창립한다. 1901년 2월 3일, 동경의 간다(神田)의 금휘관(錦輝館)에서 성립대회를 열고, 사전에 논의한 "지취서(旨趣書)"와 "규약(規約)"을 통과시킨다.
흑룡회는 일본의 현재 급선무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시작하고. 그후에 동북, 몽골 및 시베리아로 치고 들어가서 대륙을 경영할 초석을 닦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룡회가 성립되고나서 바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흑룡회회보>> 및 <<흑룡>>월간을 발행한다. 여기에 회원들이 중국, 러시아, 조선의 삼국에서 정탐해낸 자료들을 싣고, 동시에 흑룡어학원을 세워서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이를 통해서 러시아통을 양성했다. <<흑룡회회보>> 제2집에는 70여페이지의 장문의 글이 실려있는데, 제목은 "일본러시아 실력의 계산과 전쟁의 이해득실"이었다. 일본정부는 국가기밀이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발행을 금지시킨다. 흑룡회는 <<최신만주국>>과 <<러시아동부경영부분전도>>등을 간행하는데, 이는 동부시베리아, 중국동북 및 조선의 정밀한 대지도였다.
우치다 료헤이는 흑룡회를 만들기 전에, 러시아에 잠입하여, 비밀정보수집을 한 바 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흑룡회가 성립된 후, 우치다 료헤이는 <<동아시론>>에 "러시아 내부의 대결함"이라는 글을 싣고, 러시아가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비어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러시아망국론>>이라는 책을 단행본으로 발간하여, 러시아의 여러 측면의 정보를 싣는다.
흑룡회 구성원들의 성분은 아주 복잡했다. 위로는 군정계요원, 학자명사로부터 아래로는 깡패건달, 직업간첩, 기녀마약거래꾼 및 고용된 킬러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사회각계각층의 인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흑룡회와 연결된 정계의 주요인물로는 히로다 코우키(廣田弘毅)가 있다. 그는 도야마 미쓰루와 동향이며 지기이다. 그는 일찌기 도야마 미쓰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흑룡회의 최초의 찬조자중 하나이고, 일부 원시자료에 따르면, 그도 흑룡회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야마 미쓰루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막후에 숨어 있었다. 그는 수상직을 수행한 후, 흑룡회에 많은 지원을 해준다. 그가 수상에 재임하는 기간동안, 외무성은 매년 흑룡회에 거액의 비밀활동경비를 제공한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흑룡회는 다시 회원을 대거 중국에 파견하여 활동한다. 그들은 사회각계각층에 파고들었고, 그들의 족적은 거의 전중국에 미쳤다. 이들 낭인 간첩은 정보수집이외에, 자주 사건을 일으키고, 소란을 부리고, 암살을 기획하고 납치 테러활동을 벌였다. 중국정부와 인민에 끼친 해악이 적지 않다.
신해혁명후, 흑룡회의 우두머리인 우치다 료헤이는 일부 저명한 낭인들과 이 기회를 틈타서 속속 중국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혁명당의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 그들이 혁명당을 지지한 목적은, 혁명당이 승리한 후 중국동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의 <<일본의 아세아>>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손중산은 그와 얘기하는 과정에 구두로 승락한 바 있다. 중국혁명이 승리를 거둔 후에, 만주몽고를 일본에 양보하겠다고. 이 책은 1932년 흑룡회에서 출판된 후, 일본의 적지않은 저작에서 인용되었다. 손중산이 확실히 우치다에게 '승락' '양해' 혹은 '군자협정'을 맺었다는 것이다.
우치다 료헤이가 이런 말을 조작한 이유는 그가 1931년 6월에 파시즘을 추종하는 대일본생산당(大日本生産黨)을 창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당은 전국적인 파시즘 정당이다. 당원이 1500명에 이르고, 우치다 료헤이가 총재이고, 도야마 미쓰루가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국내외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다음해에 당원이 16000명까지 증가한다. 이들의 '주의'는 "대일본주의를 국가를 다스리는 방략'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의 <<일본의 아세아>>는 바로 대일본생산당의 강령이었다. 9.18사변후에 일본정부의 중국동북침략활동을 도와주기 위하여, 그는 손중산의 명망을 빌어, 이런 '구두승락'을 위조하여 일본의 만주침략의 역사적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흑룡회의 중국에서의 활동경비는 일부는 일본정부와 재벌이 지원했고, 일부분은 동북, 화북 및 내몽고등지에서 마약거래, 기원개설등으로 얻은 수입이었다.
흑룡회는 일본국내에서 영향력이 컸다. 서적과 간행물을 출간하는 외에,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민중대회도 개최하고, 정부에 중국파병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테러활동도 빈번히 일으켰다. 암살대상은 은행가, 실업가, 내각대신, 심지어 수상까지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일본정부에 위협적이었다. 그리하여 내각에서 제정한 결정이 자주 흑룡회의 반대로 수정되곤 했다.
흑룡회등 비밀결사는 일본정부의 대외침략에 불가분의 구성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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