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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0. 12.

작자: 미상

 

 

 

 

1840년대부터, 중국의 국가안전은 서방열강의 위협을 받아왔다. 신해혁명후, 어느 곳을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할 것인가는 혁명당인들이 직면한 중대한 정치이슈였다. 각파는 우선 새로운 정치중심을 놓고 무창(武昌)과 상해(上海)를 놓고 다투게 된다. 무창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무창의거가 일어난 후, 악군도독부는 1911 11 7, 신정부건립문제에 관하여 각지로 전통을 보내어, 각성에서는 전권위원을 무창으로 파견해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고 한다. 당시 혁명당 사람들의 정치적기반이 비교적 강한 곳은 동남연해지역이었다. 강소절강지역에서는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상해를 주장한다. 강소도독 정덕전, 절강도독 탕수잠은 연명으로 호군도독 진기미에게 전통을 보내어, 상해에 임시회의총기관을 설립하자고 요구한다.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는 남경을 점령하면서 혁명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다. 12 12, 각성대표는 무한, 상해에서 남경으로 모인다. 12 29, 각성대표회의가 남경에서 개최되고, 중앙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1912 1 1, 중화민국이 정식성립되고, 손중산은 남경에서 중화민국임시대총통에 오른다. 혁명파는 잠시 논쟁을 거쳐, 마침내 남경을 임시정치중심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중국정치지리국면에서 두 개의 정치중심이 생기게 된다: 하나는 청왕조의 북경이라는 정치중심, 하나는 혁명당의 남경이라는 정치중심.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을 맡을 때, 원세개가 공화제를 옹호하고,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면, 자신은 총통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한 바 있다. 수도에 관하여, 손중산은 남경이든 북경이든 모두 좋다는 입장이지만, 남경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2 12, 원세개는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고, 손중산은 사직하며, 원세개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한다. 그러나,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3개의 조건을 내민다. 그중의 2개조건은 남경을 수도로 하는 것과 관련된다. 첫째, 임시정부는 남경에 둔다. 둘째 신임 총통은 남경에서 취임한다. , 원세개를 남방혁명파의 감독과 통제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외에 일본의 손중산에 대한 영향력도 회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해혁명때, 중국의 남북정권에 모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조야는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 두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의 생각은 아주 명확했다. 중국정치중심이 남으로 옮겨오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의 북방의 방어력을 약화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해야 만주와 몽고에 대한 침략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참의원(동맹회원이 위주임)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 북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20, 남겨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8명이었다. 다만, 나중에 손중산, 황흥이 고집을 부리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참의원에서 재의에 붙여 남경을 수도로 확정한다.

 

원세개에 있어서, 자신의 세력권인 북방을 벗어나 남방으로 옮겨가서 혁명파의 견제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북방의 군인집단도 정치중심의 남쪽이전을 바라지 않았다.

 

1912 4 2, 참의원은 임시정부를 북경으로 옮기기로 결의한다. 손중산의 남경에 정치중심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무산된다. 원세개가 북경을 정치중심으로 고집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음모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도 있다. 첫째, 북경을 선택하는 자체가 바로 각지역이 원하는 바였다. 둘째,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지방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상황하에서 북경의 정치중심을 유지하는 것이 일본에 대응하는데 유리했고, 황제복벽파를 막는데도 유리했다.

 

북경의 정치중심으로서의 지위는 1912년에서 1927년까지 유지된다. 원세개의 통치기간동안 표면적으로는 강권정치였지만, 원세개 사후에는 환(), (), ()의 북양군벌 3대파와 다른 지방군벌이 할거하면서, 정치중심으로서의 북경의 지위는 약화된다.

 

1927, 국민당이 북방정권을 타도하려는 북벌을 시작한다. 새로운 정치중심을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국민혁명군총사령관인 장개석은 처음에는 무한에 두는데 찬성한다.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게 되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생지(唐生智)가 국민정부에 귀순한 후, 기본적으로 양호지역은 지배하게 된다. 장개석은 당생지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그가 총사령관의로서의 권위를 발휘하는게 어렵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북벌전에 광주지역은 적화(赤化)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무한으로 천도하는 것에 동의한 것은 공산주의운동의 기반이 약한 양호지역을 선택한 것이었고, 국민당내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북벌로 무한을 점령한 후, 무한의 적화정도는 광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한에 정치중심을 두는 것은 국민당내 좦에 유리할 것이 뻔했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장개석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게 되는 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정치중심을 두었지만, 당시에 무한에도 왕정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정치중심이 형성된다. 얼마후에는 서산회의파가 상해에 또 다른 국민당중앙당부를 결성한다. 이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정권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중국은 당시에 실제로 여러 정치중심이 병존하는 국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7 9, 국민당내 각 세력은 타협을 이루어, 특별위원회를 남경에 성립하기로 선포한다. 1928 2 2, 국민당은 제2기사중전회를 개최하여, 상해,무한,남경에 3개의 당중앙이 있던 국면을 끝낸다. 같은해 6,장개석은 다시 북벌을 시작하고, 북경을 함락시킨다. 곧이어 동북의 장학량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전국은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당시의 조건하에서, 국민당은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북경의 전통적인 정치중심으로서의 개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북경을 북평(北平)으로 개칭한다.

 

남경은 중국의 정치중심으로서 중국에서 근 천년동안 형성되었던 전통적인 정치지리국면을 뒤바꿔 버린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국방요지인 장성이북지역에 대한 방어능력이 상당히 약화되게 된다. 중국의 정치중심이 남으로 이전한 후, 장개석은 중심지역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됨에 따라, 정부가 동남지역에서 상인들과 이권을 다투는 현상이 심해진다. 이리하여 중국은 국가자본과 관료자본이 독점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바뀐다. 동남연해지역과는 달리 중국의 내륙지역에 대하여는 갈수록 덜 중시하게 된다. 그 결과 국민당의 농촌에 대한 통치력이 갈수록 약화된다.

 

국가의 대외방어력에서 보자면, 정치중심의 남쪽이전은 국민당이 열강과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미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에 대한 방어에 소홀하게 된다. 일본은 제1차대전기간동안,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전에 큰 위협을 미치는 상황이었다. 만주,몽고를 점령하는 것을 기본국책으로 정했다. 장개석은 군사력을 모아서, 2차북벌을 시도할 때, 일본은 장개석이 장강유역에 뿌리를 내리도록 요구하고, 북벌은 반대했다. 그 뜻은 중국이 통일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장개석이 남방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북방에 대한 방어는 갈수록 약해진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북에서의 세력확장을 도와준 격이 된다. 국민정부가 건립된 후 5년의 기간내에 일본은 동북에 군대를 출병시키고, 1937년에는 일본이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