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황포군관학교에 비견할 군사학교

중은우시 2010. 7. 12. 13:57

글: 유계흥(劉繼興)

 

군사학교는 장수의 요람이다. 요즘은 근대의 군사학교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얘기한다. 사실, 황포보다 더 대단했던 군관학교가 있었다. 이 군관학교에서는 모두 831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원수 주덕(朱德, 제3기 보병과), 섭검영(葉劍英, 제12기 포병과), 국민당의 육군상장 주배덕(朱培德), 왕균(王鈞), 김한정(金漢鼎), 당준원(唐準源), 범석생(范石生), 호영(胡瑛), 손도(孫渡), 용운(龍雲), 노한(盧漢), 성세재(盛世才)등을 배출했다.

 

더욱 기이한 일은 이들 졸업생중에는 한국의 제1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월남임시정부 정부주석 무해추(武海秋),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부주석, 최고인민회의상무위원회위원장을 지낸 최용건(崔庸健) 원수등도 있다.

 

이 군사학교가 바로 운남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이다. 1909년에 설립되어 1935년까지 26년간 모두 8313명의 졸업생응 배출했다. 1935년이후에는 이 곳이 중앙육군군관학교 곤명분교 즉 황포군관학교 곤명분교가 된다. 1938년 1월에는 다시 황포5분교로 개칭한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청나라정부는 신군을 확대개편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이홍장이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을 만들어 신군을 편제하고 전국으로 이를 보급한다. 운남에서는 1899년 육군무비학당이 설립된다. 이 학교가 바로 운남육군강무당의 전신이다.

 

1909년 9월 26일, 음력 8월 15일, 운남육군강무당은 정식으로 창립되고 개설된다. 나중에 장개유, 당계요, 나패금, 고품진, 경은양, 이열균, 유존후, 방성도등이 운남강무당에서 교편을 잡는다. 교관의 대다수는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동맹회의 비밀회원이었다.

 

운남강무당의 설립자는 고이등, 이근원, 장의, 사여익, 고품진, 유조무, 유음등이 있다. 그리고 21명이 총판(總辦)을 맡았었다. 이 21명의 총판중에서 공헌이 가장 크고 영향이 가장 컸던 사람은 이근원(李根源)이다. 이근원은 일본진무학당과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나중에 대한군정부 군정총장 겸 참의원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중화민국 국무총리를 딱 하루 지내기도 했다.

 

1909년 8월 29일, 이근원은 운남총독 심병곤을 만나서, 운남강무당 감독 겸 보경과교관이 된다. '감독'은 부교장에 해당한다. 1910년, 이근원은 총판이 되는데, 총판은 바로 교장이다. 이근원이 총판을 맡을 때, 심왕도가 감독(監督), 장개유가 제조(提調)를 맡았다. 이렇게 하여, 강무당의 1,2,3인자가 모조리 동맹회회원으로 채워진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정부는 전혀 몰랐다. 당시 동맹회원들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근원의 조상은 남명왕조때 반청복명이 핵심인물이다. 그는 강무당을 만들면서, 장소도 바로 명나라개국공신 목영이 운남을 지킬 때의 연무장으로 잡았다. 취호 가의 공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상의 유지를 이어, 만청을 몰아내는 정예를 키우고자 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거소를 "사목소서(思沐小墅)"라고 짓는데, 여기서 '목'은 바로 '목영(沐英)'을 가리킨다.

 

운남강무당에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의 4개병과를 두었다. 학생은 갑을병의 3개반으로 나누었다. 갑반과 을반은 주로 현역군관을 훈련시켰고, 학기는 1년이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병반이다. 이 반은 사회에서 16세 내지 22세의 중등학력이상을 지니고 품행이 방정하며 신체가 건강한 자로 200명을 뽑았다. 학기는 3년이다. 주덕은 병반 보병과에서 공부한 강무당 제3기 학생이다. 병반에서 49명의 장군과 원수가 배출되고, 이들은 중국근현대사의 풍운을 질타한다.

 

당시 운남강무당에는 아주 대단한 겸직스승이 있었다. 그는 바로 호국군신(護國軍神)이라고 불리던 채악(蔡鍔)장군이다. 채악은 운남강무당에서 겸직할 때 교재 <<증호치병어록>>을 만드는데, 학생들이 아주 좋아했다. 이 책은 1924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할 때 교장 장개석이 교재로 삼아 학생들에게 배우게 하고, 친히 자신의 "치심'이라는 장을 하나 넣고, 서문을 붙여서 발간한다. 이 책은 나중에 중국십대병서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채악은 운남에서 호국운동을 이끌면서, 운남강무당의 교관 학생과 함께, 공화의 기치를 죽을 때까지 보위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들은 무창의거후인 1911년 10월 30일 혁명을 일으켜 운남의 정권을 탈취한다. 그리고 채악을 도독으로 하는 새정부 운남도독부를 성립한다. 그리고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후에는 운남독립을 선포하고, 호국군정부를 구성한다. 채악은 거병하여 원세개를 토벌한다. 여러번의 혈전을 거쳐, 호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원세개가 죽은 후, 국가는 다시 통일되고, 다시 국회를 소집하여 국회에서는 1915년 12월 25일 운남호국의거일을 전국적인 기념일로 정하게 된다.

 

이 두번의 혁명에서, 운남강무당의 교관과 학생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 혁명의 중추가 되었다. 그들은 전투를 통해서 스스로를 단련시켰을 뿐아니라, 그들의 행위와 희생은 운남에서 높은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양계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운남의 한 귀퉁이를 버티고 천하와 대항하는 수천년역사의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천하를 우선시하고,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잃었으니, 전국인민이 감사해야할 일이다."

 

한국의 초대국무총리 이범석(당시 가명은 李國根), 조선인민군총사령관 최용건 원수, 월남임시정부 주석 무해추등이 모두 운남강무당을 졸업했다. 이범석등이 운남강무당에 들어갈 때는 비밀리에 들어갔다. 그는 15세때 중국으로 와서,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신규식과 손중산간의 연락원을 맡았다. 당시 상해에 망명해있던 한국임시정부는 중국에 군사인재를 키워달라고 요구한다. 이범석은 바로 이런 경로를 통하여 운남강무당으로 오게 되었다. 손중산은 당시 운남독군인 당계요장군에게 부탁하여 이범석을 비밀리에 입학하게 해준다.

 

당시 조선, 월남의 혁명청년이 강무당에 입학한 것은 기밀사항이었다. 당계요만이 알았고, 교관도 몰랐다. 교장인 정개문조차도 이들 학생의 진실한 신분을 모르고 있었다.

 

1919년, 일본점령군에 오랫동안 연금당해있던 조선국왕 고종이 서거한다. 장례식때 대규모의 '3.1'만세운동이 벌어진다. 이범석등은 급히 반일사업에 뛰어들기 위하여 당계요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범석이 보낸 서신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인민이 막 적수공권으로 일본제국주의와 대항하고 있다. 우리가 운남에서 배운 실력을 이때 공헌하지 않으면 언제 공헌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각하께서 우리가 귀국하도록 동의한다면, 조국독립후에, 우리 민족은 당신의 은덕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서신을 보낸 삼일째 저녁, 당계요가 보낸 부관이 학교로 와서 직접 이범석등을 찾는다. 그리고 당계요의 입장을 전해준다: "너희가 침략자를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지지한다. 만일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가 필요할 때면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라. 너희가 다시 돌아와서 공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

 

그리하여 이범석등은 학교를 떠나게 된다. 중국동북으로 가서, 중국조선국경지역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벌인다. 그때 이범석은 겨우 20살이었다. 그가 지휘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였다. 일본군 수천명을 사상시켰다. 이것은 한국독립사상 대표적인 전투이다. 그후 그는 한때 소련극동홍군에 가담하여 한국의 차바에프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 동북에서 마점산등을 따라 항일한다. 1940년 이범석은 중국작가 복내부를 알게 되어, 자신의 경력을 얘기해준다. 2년후, 복내부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역어 <<북극풍정화>>로 쓴다. 작자는 '무명씨'로 하여 신문에 연재하여 독자들의 인기를 얻는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후, 이범석은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된다. 그는 운남강무당을 떠날 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성립문에서 중국에서 이미 고인이 된 당계요 장군의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한다. 당계요는 88명의 대한민국건국훈장 수여자중 1명이다.

 

당시, 운남강무당의 아래에 분교에 해당하는 군사학교가 있었다. 1918년, 이근원이 만든 광동소주강무당, 진군이 사천에 만든 노주강무당은 실질적으로 모두 운남강무당의 분교들이다. 위풍당당한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도 운남강무당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할 때,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교관과 관리층은 아주 부족했다. 1924년 9월, 당계요는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계요는 즉석에서 도와주기로 결정한다. 당시 명을 받고 황포군관학교를 창립하는데 도와준 운남강무당의 교관은 포병과장 왕백령, 공병과장 수숭흥, 보병과장 유약양, 기병과장 임진웅 및 섭검영등 일부 졸업생들이 있었다. 왕백령은 손중산에 의하여 황포군관학교 교수부주임에 임명되고, 임진웅은 관리부주임에 임명된다. 섭검영은 황포군관학교 교수부부주임이 된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쓰던 교재는 운남강무당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은 운남강무당출신이 많았다. 일찌기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장을 지낸 왕백령이 회고에 따르면, 교관중에서 운남강무당출신이 60%였고, 보정군관학교출신이 20%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황포군관학교는 운남강무당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운남강무당에서 배양한 군인들은 항일전투에서 이름을 떨친다. 60군 3개사 4만5천명이 소리높여 부르던 작곡가 선성해의 <<육십군군가>>가 있다: "우리는 운남의거의 위대한 곳에서 왔다. 귀주 호남을 지나 적과 싸우는 전장으로 왔다. 숭산준령을 넘어 항일전장으로 왔다. 형제들이여, 피와 살로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고, 채송파가 우리에게 남긴 영광을 보위하자. 우리의 호국,정국의 영광을 드날리자. 적들이 우리의 국토를 횡행하게 하지 말라. 적기가 우리의 난창강을 폭격하게 하지 말라. 적기가 우리의 영공을 나르게 하지 말라. 운남은 육십군의 고향이다. 육십군은 중화를 보위하는 무장이다." 항일의 최전선까지 멀리 원정하여 태아장전투에 참가한다. 이는 중국군대가 처음으로 만명이상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군(滇軍)이 전국을 돌면서, 항일전쟁에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그들은 항일전쟁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완강했던 부대의 하나이다.

 

나라가 곤란할 때, 운남강무당이 졸업생인 군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항일전쟁이 개시된 후, 주덕의 강무당 동창인 당준원은 제3군군장을 맡아서, 중조산을 지켰다. 이외에 당준원의 참모 증만종, 부하 촌성기(寸性奇) 사단장등도 운남강무당 출신이다. 중조산에서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운남강무당 졸업생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당준원 군장은 패배후, 산하를 울리는 기백으로 유서를 썼다: "나의 몸은 국가의 은혜를 입어, 삼군이 중임을 맡았다. 이제 전사들이 전멸하고, 상황이 악독하여, 총군양부와 연락이 끊겼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총사령관 및 참모장은 본군의 나머지 인력을 이끌고 계속 항전하라. 그래야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그리고 자살하니 그의 나이 55세때였다.

 

촌성기 사단장은 친히 결사대를 이끌고 적군과 육박전을 벌였고, 불행히도 가슴에 총탄을 맞는다. 이때 그는 군장 당준원의 순국소식을 듣는다. 그는 크게 소리지르며 적군으로 뛰어들었고, 오른쪽 다리가 일본군의 포화에 날아간다. 촌성기는 중상을 입은 몸으로 나머지 수십명을 이끌고 포위만을 돌파하였다. 다시 일본군이 겹겹이 포위하였고, 교전중에 왼쪽 다리마저 잘려서 피가 샘솟듯이 흘렀다. 이때 촌성기는 단장 황선곡등에게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도록 지시한다: "나는 다리가 이미 잘렸으니, 나를 신경쓰지 말라. 나는 순국하기로 결심했고, 국격과 인격을 지키겠다" 말을 마친 후, 그는 검을 뽑아 자살한다.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과 장교는 모두 눈물을 흘렸고, 한 명도 떠나지 않고 장렬하게 희생했다.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고위장군들 중에서 항일의 전장터를 누빈 사람이 이 둘 만이 아니다. 운남강무당출신의 29군군장 왕갑본(王甲本)은 호남 동안현에서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순국한다. 나중에 백성들이 보니, 왕갑본이 희생된 이후 그의 얼굴에 있는 칼자국은 이미 뼈가 드러날 정도였고, 그의 배는 이미 칼이 관통했다. 그런데도 그의 두 눈은 시퍼렇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의 부관, 그의 호위병사, 참모, 그의 부하인 병사등이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우리는 영원히 중국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 운남강무당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을 졸업한 군인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