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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단발(剪辮): 혁명의 상징

by 중은우시 2010. 1. 20.

글: 부국용(傅國涌)

 

1911년의 마지막 날, 바로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날이다. 나중에 화가가 된 섬서청년 왕군여(王軍餘)는 당시 남경에서, 조폐창의 접수업무에 참여했다. 임시정부가 강제단발령을 내린다는 말을 듣고, 그는 조폐창의 황포차를 타고 하관(下關)으로 갔다. 가는 길에 재미있는 광경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과연 조폐창의 문을 나서자, 경찰이 그의 차부(車夫)를 붙잡고, 변발을 자르려고 했다. 차부는 즉시 땅바닥에 꿇어앉아서, 나에게 변발을 남겨둘 수 있게 말좀 잘해달라고 간청했다. 일찌감치 변발을 잘라버린 일본유학생출신인 그는 변발을 자르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어찌 그를 위하여 변발을 남겨두라고 하겠는가? 그는 오히려 경찰에게 말했다: "신경쓰지 말고, 자르고 보자." 가는 길에 변발을 자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길거리, 기차, 강가에서 변발을 기르고 있는 사람만 만나면 바로 가서 잘라버렸다. 특히 배를 타는 곳에서는 한명 한명 탈때마다 변발을 잘랐다. 그중에는 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닥에 꿇어앉고 자르지 말아달라고 비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른 변발을 두 손으로 들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장탄식을 하거나, 가가대소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변발이 사라진데 대하여 보이는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는 좋은 구경거리라고 생각했고, 이를 보면서 통쾌해 했다. 그가 하관에서 돌아오면서 보니,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모조리 맨머리였다.

 

그날, 그는 길에서 고향사람이자 학교친구인 장계란(張季鸞)을 만난다. 그는 곧 총통부의 비서를 맡고, 나중에 유명한 신문계의 인사가 된다. 예전에 장계란이 일본에서 강제로 그의 변발을 잘랐었다. 장계란은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오늘 변발을 자르는 것을 보니, 예전에 우리가 네 변발을 자르던 때와 같지 않느냐?"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그 당시에 강제로 자르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아직까지 변발을 하고 있다가, 오늘 이 사람들과 같이 잘라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장계란은 다시 말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혁명의 성공은 바로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옛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옛날 습관을 강제로 없애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겠는가? 이후에 가야할 길이 멀다. 이것은 단지 작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계속 노력해야할 것이다."

 

이상은 왕군여가 장계란을 추억하면서 남긴 글이다.

 

나중에 중국문화에 걸출한 공헌을 한 장복총(蔣復)은 당시에 고향인 절강 해녕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소학교시절을 회고하면서, 어렸을 때 변발의 번뇌를 언급했다. 귀찮은 변발을 달고 다니면 땀이 배이고, 가렵기도 하고 악취도 났다. 견디기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귀찮은 것은 매일 아침에 변발을 땋는 일이었다. 학당에는 이를 위하여 아예 2명의 체두장(剃頭匠)을 고용했다. 학교에 살면서 학생들을 위하여 변발을 땋아주었다. 어린아이들은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을 인내심도 없고, 변발을 땋으려면 나무빗으로 빗어야 하는데, 변발을 푼 후에 빗으로 빗으면 아주 아팠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아침에 체두장을 만나기만 하면 도망쳤다. 체두장은 쫓아가면서 서라고 소리쳤다. 만일 당장(堂長)에게 들키면, 체두장에게 끌려가거나 아니면 변발을 땋은 후에 모퉁이에 서 있는 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기억에서, 신해혁명은 아주 기쁜 일이었다. 바로 변발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이때부터 어린이들은 아침마다 변발을 땋을 필요가 없어졌다.

 

확실히 중국인의 일상생활측면에서, 민국은 변발을 자르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수백년을 내려온 변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자르려고 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유민이나 유신들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1914년까지 신문에는 경찰청에서 사람들에게 변발을 자르라고 권하는 고시가 실렸다: "고독하고 편벽한 사람들은 스스로 시류를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공자도 시대에 맞게 살았던 성인이라는 것을. 공자가 만일 지금 세상에 살았다면, 그는 변발을 잘랐을 것이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변발을 자르는 것은 확실히 혁명의 상징이었다. 시대가 변하였다는 표지였다. 모두 알다시피,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온 후에 체두변발을 시켰다. 따르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였다. 북에서 남으로, 이 명령을 항거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한족들이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는지는 모른다. 2백여년이 지나면서, 머리 뒤에 길다란 변발을 남기는 것은 습관화되어버린다. 그러나, 청나라말기부터, 지식인들은 변발을 자르다고 주장한다. 1903년 천진 <<대공보>>의 글모집시 제목은 바로 <<전변역복설(剪辮易服說)>>이었다.

 

3월 15일에 1등에 뽑힌 것은 주지부(朱志父)의 <<전변역복설>>이었다. 그는 변발을 자르고, 옷을 바꿔입자고 극력 주장했다. 이것은 궁시(弓矢)를 폐하고 학당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모두 시대에 따라가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부터 양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다. 변발을 자르고 옷을 바꿔입는 것을 상무정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생각과 연결시켰다. <<대공보>>는 "신중국의 특별정신"이라고 부르고, "이백년동안 깨지 않은 깊은 잠에서 깨우고, 수백만 방리의 돌아오지 않는 국혼을 부르자"고 했다. 그해 10월 16일, "강남의 신학국민과 유학생들은 변발을 자르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향시에 참가할 때는 가짜변발을 하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호적의 회고에 따르면, 상해 중국공학에서 공부할 때, "일부 격렬한 학생들은 변발을 한 학생에게 강제로 변발을 자르게 했다"

 

1904년부터, 연병처에서는 군복을 바꾼다. 그러자, 변발이 장애가 되었다. 그후 신군의 관병, 경찰은 변발을 자르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를 막기가 어려웠으므로, 1910년이 되자, 군자대신 재풍은 아예 더 이상 금위군의 변발을 자르는 것을 금지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를 수 있다고 허용한다. 영국의 타임지 주중국기자인 모리슨이 남긴 사진에서, 그 당시 신군의 머리 뒤에 변발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몇년 더 전에, 5대신을 따라서 서양으로 헌정을 고찰하러갔던 40여명의 수행원중에는 변발을 자른 자들이 절반이었다. 그중에는 한림, 도부, 무원도 있었다.

 

신해혁명은 변발을 자르는데 있어서 최고조를 이룬다. 손중산의 남경임시정부가 변발을 자르라고 명령하기 전에, 1910년 10월 3일부터 1911년 1월 11일까지 거행된 자정원 제1기상무회의에서, '전발역복'의 의안이 통과된다. 신해혁명의 전날, 장원출신 장건은 강소성 남통에서 실업과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학생들이 변발을 자르는 것이 거의 유행하다시피 하자, 장건은 그 소식이 외부로 퍼져나갈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남통사범학교로 직접 가서, 이미 변발을 잘라버린 70여명의 학생들을 이화학교실에 모아놓고, 얘기했다: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다. 조정의 입헌과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것은 변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가짜변발을 빨리 준비하라고 분부한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학생 서해평의 회고에 따르면, 장건은 말을 하면서 눈물을 같이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장건 자신도 상해에서 변발을 잘라버린다. 그리고 남통에 있는 형에게 보내어 보존해달라고 한다. 그는 신해년 십월 이십사일의 일기에서 이를 일생의 기념일이라고 적었다. 1911년 12월 17일, 천진의 <<대공보>>에는 원세개가 12월 13일에 변발을 잘랐다고 보도한다. "이를 통하여 각계에 앞장섰다" 주변에 있는 사람에 따르면, 변발을 자르면서 원세개는 가가대소를 했다고 한다. 말하는데 아주 흥분하여 있었다고 한다. 변발을 자르는 것은 구시대를 끝낸다는 것이고, 새시대를 시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