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위병(路衛兵)
오호십육국시대라는 이 특수한 역사시기에, 영웅은 많이 배출되었고, 정치가도 많이 배출되었다. 강족인 요익중(姚弋仲)이 바로 그 중의 한 명이다. 강(羌).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소수민족은 오호십육국시대에 그들의 역사상 유일한 정권을 수립한다. 바로 후진(後秦)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제국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 바로 요익중이다. 그는 후진제국의 대업을 완성하는데, 강족역사상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정치에 능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격에 있어서, 그들은 왕왕 보통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인맥이 아주 좋고, 뛰어난 인간적 매력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이고,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아주 호쾌하고, 자잘한 일에 구애받지 않으며, 소소한 일을 가지고 하나하나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항상 멀리 있고, 눈앞의 곤경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쉽게 교란받지 않는다. 요익중은 거의 이러한 사람이었다.
요익중(280-352)은 남안 적정(지금의 감숙성 농서현 경내)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서강교위, 서강도독등의 직위를 지냈으니, 대대로 관료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관료의 기질이 있었다. 젊었을 때의 요익중은 성격이 과감하고 호쾌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른 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 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요익중에 대한 3가지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요익중이 군자의 풍모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의 거동은 동주시대의 사군자와 비슷했다. 식객들을 기르고 친구를 사귀기를 즐겼다. 둘째는 그는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리더가 되려는 욕심이 강했다. 규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셋째는 그가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난세에 성공하려면 사람이 결정적요소라는 것을. 한 무리를 이끌고, 자신의 세력이 있어야 비로소 발언권이 있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요익중이 이러한 남다른 특징은 그로 하여금 현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그에게 의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진나라말기에 중원이 대란에 빠지고, 요익중은 기회를 틈타서 유미(楡眉, 지금의 섬서성 천양현 경내)로 옮겨간다.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것은 그의 명망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무리가 많아지자, 요익중은 스스로 호서강도위, 옹주자사, 부풍공이라고 칭하며, 깃발을 세우고 한 지방을 차지하는 할거세력이 된다.
요익중은 군사재능이 있었다. 그가 훈련시킨 강족군대는 전투에서 용감하고, 규율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모두 서로 차지하고자 하게 된다. 요익중은 전조(前趙), 후조(後趙)에 차례로 의탁하며, 그들의 정벌전쟁에 큰 공을 세운다. 전공이 혁혁하여, 흉노왕 유요, 후조황제 석륵은 요익중을 아주 중시하고 예의를 다한다. 흉맹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흉노왕 석호도 요익중은 남다르게 취급했고, 그에게는 검을 차고 궁중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한다. 사람을 죽이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살인마들이 모두 그에게는 약간은 양보했으니, 그의 남다른 뛰어난 점을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요익중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성격과 관계가 있을 것같다. 요익중은 성격이 아주 강인했다. 석호같은 살인도 애들 장난처럼 여기는 마두급 인물을 모두 두려워했지만, 요익중은 그렇지 않았다. 석호가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축하행사를 할 때, 원래 석호의 큰 경사이므로 부하로서는 그에게 잘보일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요익중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참가하지 않는다. 나중에 석호가 여러번 부르고, 사람을 여러번 보내고 나서야 할 수 없이 참가한다. 그런데, 오히려 안가니만 못했다. 요익중은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석호를 난감하게 만든다: "당신은 어찌 부탁을 받았으면서도 오히려 황제자리를 빼앗았는가?"
황제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앞에서라면, 석호의 난감함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리다니,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목이 달아날 일이다. 그러나 석호는 그가 강직하다고 칭찬하고 처벌하지 않는다. 그를 처벌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를 십군육이대도독, 관군대장군으로 승진시킨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석호가 아끼는 후궁의 동생이 있는데, 당시 무성좌위였다. 요익중의 부대로 와서 술을 마시고 소동을 벌였다. 요익중은 그를 붙잡아 버렸다. 이 자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여러번 요익중을 협박하며, 오만무례한 모습을 보였다. 요익중을 눈에 두지 않았다. 요익중이 그런 것을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끄집어내어 참수하도록 명령한다. 그제서야 그는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피를 흘리면서 절을 했고, 좌우의 부하들도 선처를 부탁했다. 그제서야 요익중은 그를 용서해준다.
요익중은 성격이 호쾌했고, 말하는 것도 시원시원했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 '너'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장유유서의 개념은 없었다. 자신은 '노강(老羌)'이라고 칭했고, 황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석호와 얘기할 때도, "네가 보기에 노강이 적을 깨부시는게 어떻겠는가?" 석호도 용서하고 질책하지 않았다. 요익중의 이런 말투는 한편으로 그가 유목민족이어서 그다지 금기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가 직설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성격이 아주 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석호는 왜 요익중을 공경하고 두려워했을까? 아마도 세 가지정도 이유가 있는 것같다. 첫째, 석호는 아마도 습관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같은 유목민족으로서, 예절을 한족처럼 중시하지 않았다. 하물며 요익중은 직설적이고 호탕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평가되었다. 둘째, 석호는 강족군대를 중시하며 두려워했다. 이들 군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약간의 무례는 넘어가줄 수 있었다. 후조에서 일찌기 수졸(戍卒)의거가 일어난 적이 있다. 석호는 태자 석선을 혹형으로 죽였는데, 만여명의 호위병사를 변방으로 부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중간에 반란을 일으켰고, 사람수는 갈수록 많아졌다. 가담자가 많아지면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석호는 초조해졌고, 이로 인하여 병석에 눕게 된다. 마지막으로 석호는 할수없이 요익중을 불러들이고, 요익중이 친히 나서서 반란을 평정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요익중이 얻기 힘든 인재라는 점이다. 그는 석호에게 여러가지 쓸모있는 건의를 많이 했다. 석호는 그를 아주 중시했다. 한번은 요익중이 관중의 호걸을 수도로 모을 것을 건의한다. 이 조치는 후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나는 관중에 호걸들이 수도로 모이면서, 관중이 안정된다. 둘째는 수도에 인재들이 모이면서 후조의 정치력이 강화된다.
석호가 요익중을 잘 대해주었고, 요익중도 석씨집단에 충성을 다한다. 염위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요익중의 강족군대가 큰 역할을 한다. 염민이 후조를 멸하였을 때, 여러 족속들은 두려워하였고, 요익중은 강족군대를 이끌고 섭두(하북성 조강현)를 점거한다.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염민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흥왕 석저, 저족왕 포홍과 함께 염민을 공격했다. 나중에 염민이 석저를 공격하고, 양국(하북 형태)을 백여일간 포위한다. 석저는 요익중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기병 이만팔천을 이끌고 가서 구해주게 한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서 석씨를 도왔다. 이뿐 아니라, 그는 사신을 연에 보내어, 요동의 모용씨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모용씨도 이 틈을 타서 중원으로 진입한다.
석씨가 멸망한 후, 요익중은 한 때 관중을 점거하고자 생각한다. 그 결과 저족세력과의 투쟁에서, 포홍에게 패한다. 그러나 그가 길러놓은 강족군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 동진에 의탁한 적도 있고, 다시 그 다음에는 아들 요장이 군대를 이끌고 전진에 의탁한다. 전진이 멸망한 후 강족군대는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고 전진제국을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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