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정사에 기록된 여인중 황제 3명에게 시집간 경우는 오로지 이주영아(爾朱英娥)뿐이다. 그러나, 그 세명의 황제 남편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것은 영예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다. 오히려 원망과 비분, 세태의 염량이었다. 효명제(孝明帝) 원후(元詡)의 편비(偏妃)에서 효장제(孝庄帝) 원자유(元子攸)의 황후(皇后), 다시 신무제(神武帝) 고환(高歡)의 별실(別室)까지, 권력다툼 속에서, 피비린내나는 정변 속에서, 거짓과 허위가 판치는 집안에서, 이주영아는 일엽편주처럼, 하나의 바둑돌차럼, 하나의 상징처럼,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질긴 생명은 마지막에 고환의 죽음과 함께 비장하게 막을 내린다.
이주영아가 태어난 해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북수용(北水容, 지금의 산서성 삭현) 사람이며, 북위(北魏)의 권신 이주영(爾朱榮)의 딸이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전체 왕조는 태평성대에서 신속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군대의 전투력도 예전만 못해졌다. 변방의 육진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효명제는 부득이 이주영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반란이 평정된 후, 효명제는 이주영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주영에게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었을 뿐아니라, 이주영아를 후궁으로 받아들여서 편비에 봉한다. 비록 황제의 여인이 되기는 했지만, 효명제는 모친 호태후와 권력다툼을 하는 외에는 그가 가장 총애하는 반비(潘妃)와 술을 마실 뿐이고, 다른 여인들은 그의 총애를 거의 받지 못했다. 여러해동안 고독과 적막을 겪으면서 묘령의 나이였던 이주영아는 하루하루 우울한 궁궐의 원부(怨婦)로 바뀌어간다.
북위 무태원년(528년), 효명제는 이주영에게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와서 권력을 빼앗는 것을 도와달라고 밀령을 내린다. 호태후는 이를 듣고는 효명제를 독살해버린다. 그리고 이주영아등 여러 후궁들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도록 강요한다. 곧이어 이주영이 호태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하음지변'을 일으키고, 호태후등 2천여명을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킨다. 그리고는 원자유를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효장제이다. 이주영은 야심만만한 인물이다. 효장제를 감시하고, 북위왕조를 통제하기 위하여 딸에게 환속하도록 명한다면 효장제를 핍박하여 이주영아를 황후로 삼게 만든다. 효장제는 처음에 이주영아가 효명제의 편비였으므로, 배분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당숙모뻘이 되므로, 마음 속으로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주영이 주변사람을 시켜 효장제를 설득하게 하여, 효장제가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박대받던 비에서 정정당당한 황후가 되었다. 이주영아는 원래 성격이 솔직한 여자이다. 부친이 그녀의 뒤를 받쳐주자, 성격이 더욱 날카로워져서 걸핏하면 효장제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다보니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효장제는 성격이 있는 사나이였다. 겉으로는 이주영, 이주영아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고, 그들이 하자는대로 해주었지만,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놓여있던 돌덩이 두 개를 치워버리고 싶어했다. 나중에 이주영아가 임신을 하고, 효장제의 이주영을 제거할 계획도 마련된다. 이주영아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미끼로 하여, 이주영이 입궁하도록 하여, 그 기회를 틈타 이주영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이주영아는 원래 부친 이주영이 사위의 곁에 심어놓은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효장제가 장인을 죽이는데 쓰이는 카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북위영안3년(530년), 이주영아가 임신9개월이 되었을 때, 효장제는 사람을 보내어 이주영에게 축하인사를 하고, 황후가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이주영이 입궁하도록 요청한다. 이주영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심복과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황궁으로 들어간다. 효장제를 만나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효장제의 곁에 있던 수하 2명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주영은 놀라서 어좌로 가서 효장제를 붙잡고 항거하려고 하였지만, 일찌감치 칼을 집어들고 있던 효장제는 그의 배를 찔러버린다. 일대효웅이 이렇게 죽임을 당하였다. 수행원들도 모두 살해당한다. 그후 효장제도 이주영아에 대하여는 독수를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이리라. 이 변고를 당하자, 이주영아의 위풍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자, 효장제는 아주 흥분한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이주영아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난 후,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爾朱兆)가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몰려와서, 이주영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워낙 급작스러운 일인데다가 금위가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효장제는 포로로 잡히고 황자는 피살당한다. 며칠 후 효장제도 목이 졸려 죽는다. 아들과 남편까지 졸지에 잃은 이주영아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된다. 얼마후 고환이 북위의 국면을 장악한다. 각 세력의 이익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고환은 여러 명문가의 여인을 별실로 맞이하는데, 그 중에는 이주영아도 있다. 고환은 비록 황제를 칭하지 않았지만, 북위왕조의 실질적인 지배자였고, 북제(北齊)왕조의 창시자이다. 사후에 '신무황제'에 추존되니 그도 일대의 제왕이라고 할 만하다.
고환은 이주영아에 대하여 아주 공경하고 존중했다. "신무(고환)은 이주영아를 별실로 맞이하고, 누비보다도 훨씬 공경하고 존중했다. 만날 때는 반드시 허리띠를 하고, 스스로 하관(下官)이라고 칭했다." 고환이 이주영아를 이렇게 대한 것을 보면, 그녀가 고환의 마음 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비중은 비중이고, 애정은 애정이다. 부부간의 생활분위기가 이렇게 장엄하고 융중했다는 것은 한가지를 증명할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에 보통부부의 애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환에게 있어서 이주영아는 상징적인 의미가 실질적인 의미보다도 훨씬 컸다. 전왕조의 황제의 황후가 그의 여인이 된 것이다. 북위 내지 나중의 동위왕조에서 그 누가 그보다 더 대단할 수 있겠는가? 이전의 두 남편이 모두 허수아비로 사내다움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이주영아는 고환의 사내다움과 기대에 상당히 만족했다. 그리고, 고환과의 사이에 고유(高浟)와 고응(高凝)의 두 아들을 낳는다.
나중에 이주영아는 이런 허위와 가식적인 생활에 싫증이 난다. 그리하여 다시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된다. 고환은 그녀를 위하여 돈을 들여서 절을 지어준다. 동위무정5년(547년), 고환이 병으로 죽는다. 불문에 이미 들어간 이주영아는 속세의 무상함을 깨닫고, 그다지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고양(高洋)이 북제를 건립한 후, 고유를 팽성경사왕에 봉하고, 이주영아도 팽성태비에 봉한다. 과거는 과거이고, 끝낼 것은 다 끝냈다. 이주영아는 원래 불문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자 했지만, 고양이 술을 마시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 만일 이주영아가 그저 연약한 여자였다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녀는 활로 날아가는 새를 한발에 맞추는 무림고수였다. 죽어도 고양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북제 천보7년(556년), 이주영아는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고양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이주영아의 운명은 가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흘러갔고, 남편이 바뀌는 것에 따라 기복이 있었다. 그녀는 일생동안 세번 시집을 가는데, 첫번째 혼인은 우울했고, 두번째 혼인은 슬픔과 기쁨이 함께 했고, 세번째 혼인은 담백했다. 그녀는 일생동안 세 왕조를 겪는데, 북위의 멸망을 보고, 동위의 침몰을 보고, 북제의 굴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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