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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부홍(苻洪): 3번의 투항으로 제국을 만든 인물

by 중은우시 2010. 1. 26.

글: 노위병(路衛兵)

 

'투항(投降)' 사전적으로 그다지 좋은 단어는 아니다. 그것은 연약함과 실패를 암시한다. 사람들은 죽어도 구부러지지 않는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지사들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두 손을 들고 백기를 든 사람에 대하여는 콧웃음을 치며 멸시한다. 그러나, 가로로 보면 언덕이지만 세로로 보면 봉우리이다.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다르면, 결과도 같이 않게 된다. '투항'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주체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정치가가 사용하면, 잠시의 타협은 일종의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는 수비를 함으로써 공격하고, 물러남으로써 앞으로 나가는 수단을 쓴다. 넓은 흉금과 은인자중하는 풍모가 없다면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 정치는 전쟁과 마찬가지이다.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기고 지는 것만 있을 뿐이다.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다. 따지는 것은 최종적인 결과이다. 누가 마지막에 웃는지가 중요하다. 이것은 "가(家)"의 법도이다. 그러나 "사(士)"의 방식은 아니다. 오호십육국시기의 전진(前秦)의 왕 부홍(洪)이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세번의 투항으로, 난세에 살 길을 마련하고, 산을 하나 차지하고 있던 도적무리에서, 일약 풍운을 가르는 강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부씨집안에 무한한 미래를 약속하는 제왕의 기반을 닦았다. 전진제국은 최종적으로 중원을 차지하고, 씨족역사상 가장 휘황한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부홍(285-350), 자는 광세(廣世)이고, 약양 임위(略陽臨渭, 지금의 감숙성 태안) 사람이다. 선조는 '대대로 서융(西戎)의 추장(酋長)"이었다. 귀족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홍의 원래 성씨는 포(蒲)씨이다. 성씨의 내력도 재미있다. 이웃들이 그의 집안에 있는 연못에 많은 부들(蒲)이 자라는 것을 보고(池中生蒲), 그들은 포가(蒲家)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씨로 삼는다. 부홍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당시에 민요가 있었는데, "비가 그치지 않으면 홍수가 날 것이다(雨若不止, 洪水必起)"라는 말이 있어 이름을 '홍(洪)'으로 짓는다. 포홍이 부홍으로 성을 고치게 되는 것은 그가 세번의 투항을 거쳐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 참언(讖言)에 "초부응왕(草付應王)"이라는 것을 따서 부()씨로 성을 고친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저 여론조작에 불과하다. 한고조의 '참백사(斬白蛇)"나 대택향의 "진승왕(陳勝王)"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이 황제에 오르기 위하여 여론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순조롭고 천하의 백성들도 따르기 때문이다.

 

난세를 만나서, 부홍은 난세에 아주 신축성있게 처신하는 도리를 익혔다. 부홍의 신축성은 그가 일생동안 3번의 투항경력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세번의 투항은 서로 배경이 다르지만, 효과는 같았다: 첫번째는 본의가 아니었다. 형세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단맛을 본 그는 흔쾌히 투항을 받아들였다; 세번째는 비록 형식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몰려서 한 것이지만 노련하게 그렇게 끌고간 점이 있다. 세번의 투항은 매번 그에게 중요한 순간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주었다. 매번 결과는 모두 그의 직위가 수직상승하여 새로운 높이까지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세의 흐름을 아는 자가 준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홍의 민첩성과 신축성을 잘 알 수가 있다. 은인자중과 대범함 그리고 그의 이상에 대한 끈기, 미래의 대업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다.

 

무릇 대업을 이룬 자들에게는 모두 넓은 흉금이 있었다. 부홍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대범했고, 심계가 깊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베풀기를 좋아하고(好施)", "권모술수와 책략이 많았다(多權略)". 왕의 풍모가 있었다. 그리고 무에 뛰어나고 화살을 잘 쏘았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주군감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따랐다. 현지에서 그의 명망은 아주 높았다. 백성들도 사납고 싸움을 잘한다는 씨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말을 잘타고 화살을 잘 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부홍의 특별한 점이라면, 그가 '잘 베풀고' '권모술수와 책략이 많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잘 베푸는 것'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권모술수와 책략'으로 대업을 이룬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그러나 영웅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회는 항상 준비하고 있는 강자에게 온다. 진(晋)나라 말기의 난세에 오호(五胡,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다섯 오랑캐)가 중원으로 밀고 들어와서 군웅이 할거하고 전쟁이 빈번해졌다. 부홍은 '집안의 재산을 털어서 뛰어난 자들을 불러모았다" 어느 정도의 무장세력을 갖춘 후에 산채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저 산적수준에 불과했다. 실력이 그다지 크지 못했다. 흉노족의 유요(劉曜)가 농우에서 병력을 일으키자, 부홍은 전조(前趙)에 투항한다. 이것이 첫번째 투항이다. 그는 산적에서 정규군으로 신분이 전환된다. 그리고 유요는 그를 "솔의후(率義侯)"에 봉한다. 만일 이번 투항이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다면(같은 씨족의 포광, 포돌등이 핍박하고 권한 것이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이어지는 두 번의 투항은 부홍이 단맛을 본 후에 기꺼이 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요는 후조(後趙)의 석호(石虎)에게 패배한다. 부홍도 농산(지금의 영하성 남부)까지 물러난다. 석호가 공격해 들어오자, 부홍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 석호는 기쁜 나머지, 그를 관군장군(冠軍將軍)에 봉하고, '서방의 일을 그에게 맡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후조의 권력핵심에 다가간다. 난세에는 실력이 말을 한다. 부홍이 후조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석호의 중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민첩한 정치적인 두뇌때문이다. 그는 석호에게 이렇게 건의한 바 있다: "관중의 호걸과 강족을 이사시켜 경사를 충실히 해야한다" 즉, 관중에서 능력있는 자들이나, 강족 오랑캐의 각족 세력들을 업(지금의 하북성 임장현 경내)으로 옮기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인재를 망라하여, 경사를 공고히 하며, 후조의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도, 다른 하나는 변방의 강족 오랑캐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자면, 부호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시국에 민감했다는 것도 말해준다. 그리하여 석호는 부홍은 용양장군(龍將軍), 유인도독(流人都督)으로 삼아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한다. 나중에 부홍의 전공이 혁혁하자 다시 서평군공(西平郡公)에 봉한다. 그의 후하들 중 관내후의 작위를 받은 자들만 이천여명에 이른다. 부홍은 관내영후장(關內領侯將)이 되어 권력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후조의 실력자로 성장한다.

 

부홍의 제3차투항은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지만, 여전히 그의 제왕기업을 건립하는 속도를 가속화시켜 주었다. 부홍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석호의 중용을 받자, 염민(閔)의 질시를 받는다. 염민(나중에 '살호령'을 반포하여 후조를 멸망시키고 염위국을 세워 황제가 된다)은 석호에게 부홍을 제거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석호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이를 보면 석호가 부홍을 아주 신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호가 죽은 후에 석준(石遵)이 즉위한다. 염민은 다시 석준을 교사한다. 석준은 염민의 뜻을 거스르기 힘들어서 부홍의 도독직위를 박탈한다. 부홍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후조에서는 더 이상 머물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방두(지금의 하남성 준현 서쪽)으로 물러나서 주둔하면서, 사신을 보내어 동진(東晋)에 투항한다. 부홍은 방투에서 금방 자리를 잡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간다. 예전의 명망때문에, 유민들이 그의 밑으로 속속 몰려든다. 금방 무리가 십여만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한 지방을 차지한 실력자가 된다.

 

실력이 있으면 매력도 있다. 사실상 부홍의 태도는 금방 180도 바뀐다. 염민이 석조(石趙)와 등을 돌린 후, 석감(石鑒)이 석준을 대신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부홍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옹주목, 영진주자사에 임명한다. 이번에는 부홍이 거들떠보지 않는다.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천자가 될 수 없단 말인가?" 말투가 이렇게 강해지게 된 것은 필자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일 것이다. 첫째, 부홍은 아직까지도 후조에 대하여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둘째, 부홍은 자신의 군대가 있고, 협상할 기반이 있다. 셋째,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홍은 이때 이미 실력이 커져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동진은 부홍을 아주 중시한다. 그를 정북대장군, 도독하북제군사, 기주자사, 광천군에 임명하여 북벌에 관한 일을 그에게 모두 맡긴다. 부홍이 동진에 투항한 것은 그저 미봉책이었지만, 큰 나무에 기대면 시원한 그늘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군대를 일으켜도 명분이 있다. 그는 어지러운 틈을 타서 관중을 차지하고 자신의 제국을 건설한다. 사실상 부홍은 군대를 이끌고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스스로를 대장군(大將軍), 대선우(大單于), 삼진왕(三秦王)으로 칭하고, 동진황실은 거들떠 보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하늘의 뜻만 같지 못하다. 부홍은 한때 영웅이었고, 일생동안 권모술수로 살아왔으며, 난세에도 자신의 살길을 잘 찾아갔지만,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이 어떨지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일생동안 투항함으로써 성공했던 그는 마지막에 역시 그에게 투항해왔던 장수 마추(麻秋)의 손에 죽는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마추는 원래 후조의 장군인데, 염민이 후조를 휩쓴 후, 마추는 부홍에게 포로로 잡힌다. 부홍은 마추를 군사(軍師)로 삼는다. 마추는 군사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관중을 빼앗을 때의 전략구상은 바로 마추가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마추는 야심이 컸따. 계속하여 부홍의 무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결국 연회석에서 부홍의 음식에 독을 넣어 그를 독살한다. 부홍은 죽기 전에, 아들 부건(健)에게 말한다: "내가 죽으면, 너는 빨리 관중으로 들어가라." 유언의 내용은 분명하다 정책을 바꾸지 말라, 관중을 차지하라. 그후 부건은 부홍의 유언대로, 요과중(姚戈仲)을 대표로 하는 강족세력을 물리치고, 관중을 독점한다. 그리고 강성한 전진제국을 건설한다. 나중에 부견(堅)은 다시 전량(前凉)과 대국(代國)을 멸망시키고, 동진의 양주, 익주 두 주를 점령한다. 모용씨의 전연과의 대치에서도 승리한다. 이리하여 오호십육국시기에 북방이 유일하게 통일된 시기를 맞이한다. 부홍은 전진제국을 세우는데 불후의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