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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낙랑공주(樂浪公主): 소국의 역사를 바꾼 여인

by 중은우시 2010. 6. 1.

글: 노위병(路衛兵)

 

여인은 고대 전쟁이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어떤 때에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하여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고 가거나, 혹은 대립하는 쌍방이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진무제 사마염의 부인인 양염(楊艶)이 있다. 그녀는 여인으로서의 애교를 이용하여, 정계의 새로운 인물 가남풍을 끌어들이고, 순조롭게 백치아들 사마충을 서진의 두번째 황제로 올린다. 이로 인하여 서진의 정치는 돌풍에 휩싸인다. 후자의 예를 들자면, 근준(準)의 난을 악화시킨 근월화(月華)가 있다. 그녀는 베개송사를 통하여, 한조(漢趙)의 궁중혈안을 더욱 맹렬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인들은 고대에 더욱 두드러진 역할이 있었다. 바로 완화제이다. 그녀들은 일촉즉발의 원수들 간에 잠시 악수를 나누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주기도 했다. 이런 행위는 국가적 차원으로 부르자면 '화친정책'이다. 그 당시 이국의 변방국가들은 현재의 북미가 서구와 달리 여자들을 빼앗아가곤 했다. 그때의 여인들은 소나 양과 함께 하는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들은 No라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 만나보지도 못한 남자가 나이가 몇인지, 용모는 어떤지, 마누라는 몇명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예물이 되어 바쳐졌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위대한 비극이다.

 

고대의 황제는 누구라도 자신의 친딸을 먼 나라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때 자신과 죽기살기로 싸우던 원수라면 아무리 자신의 딸이 많거나, 평소에 자주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유방처럼 '종실여인을 공주라고 사칭하게 하여 모돈의 처로 보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항상 자신과 혈연관계가 먼 종실의 여인으로 대체하곤 했다. 그래서, 북연(北燕)의 개국황제 풍발(馮跋)이 유연(柔然)의 칸 용곡율(勇斛律)로부터 구혼서를 받았을 때, 그것도 자신의 친딸 낙랑공주의 이름을 직점 지명하여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글을 받았을 때, 내심은 분명 파란이 일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회의를 소집해서 이 일을 논의하게 된다.

 

고대인들의 우월감은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훨씬 강했다. 특히 당시 남보다 높다고 여겼던 황실귀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풍발이 회의를 소집하자 회의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동생 풍소불(馮素弗)는 대신을 대표하여 결사 반대했다. 낙랑공주를 '오랑캐에게 몸을 낮추어 시집보내는 것은 안된다(不宜下降非類)'는 것이다. '비류'는 바로 '이류(異類)'이고, 자신들과 같지 않은 무리를 말한다. 유연을 '비류'라고 한 것은 경멸하는 뜻이 분명하다. 우리의 딸을 이런 자에게 시집보내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빈의 딸로 바꾸어 허락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즉, 옛날의 유방을 본떠서 서출의 여인을 골라서 보내면 괜찮겠다는 것이다.

 

대신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풍발은 그래도 자신의 친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그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첫째, '여자는 남편을 따라야 하는데, 천리라고 하여 멀다고 할 수 없다" 딸은 길러서 결국 시집보내는데, 멀고 가까운 것은 관계없다. 게다가 그다지 멀다고 할 수도 없다. 둘째, 말을 뒤집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습속을 존중해왔는데,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딸을 유연으로 시집보낸다.

 

풍발은 말도 시원스럽게 했지만, 행동도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지만, 마음 속의 흔들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쓴 맛이야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풍발은 아마도 당시에 모순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기로 하는 결정은 일찌감치 내렸다. 그래도 회의를 소집해서 결정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딸을 유연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중의 북위 태무제 탁발도와 마찬가지로 아직 원시상태인 이 부락을 멸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정치상의 고려때문이다. 당시의 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풍발의 북연 정권은 후연(後燕)이 북위(北魏)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쇠퇴하는 상황하에서 일어섰다. 후연은 북위에 허리가 잘려, 중원의 영토를 대부분 잃게 된다. 모용덕(慕容德)은 청주,연주의 두 주 즉, 지금의 산동 일대에 자리를 잡고, 남연(南燕) 정권을 수립한다. 북방부분은 여전히 후연의 지도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 풍연이 찬탈한 후에 비로소 모용씨의 정권이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즉, 북연은 모용씨의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찬탈의 기회는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면서 가소로운 장례에서 시작된다. 후연의 소문제 모용희(慕容熙)가 부인의 장례를 치르다가 풍발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풍발은 원래 후연의 중위장군이었는데, 좌위장군 장흥과 함께 모용희에게 밉보이게 되어 도망은 쳐서, 깊은 산 속에 숨는다. 모용희는 부인의 장례를 위하여 황궁을 떠난다. 풍발은 이십여명과 연합하여, 몰래 입궁하여 모용운(慕容雲)을 황제로 세운다. 그후 모용희는 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하고 결국 피살당한다. 모용희가 포학했다는 것은 풍발이 내세운 이유이다. 모용희와 원수간이어서 복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모용운을 옹립한 것은 풍발의 정치적인 완충이었다. 자신이 바로 황제가 되려고 하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다. 모용운은 황제위를 찬탈할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풍발등이 강력히 요구하여, 황제위에 올렀다. 모용운은 후연의 두번째 황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이고, 고구려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고운(高雲)이었따. 성격이 중후하고 말이 적어서 당시사람들은 그가 어리석다고 말했다. 이런 인물이야 말로 허수아비로 세우기에 적합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이년후 모용운은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풍발은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하여 풍씨정권은 단단하지가 못했다. 어쨌든 그의 황제위는 모용씨로부터 빼앗아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위기가 잠복해 있었고, 국면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했다.

 

그런데 주변형세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모용씨의 적수인 탁발씨는 변방에서 계속 위협했고, 하필이면 이때 북방에서도 유연이 굴기했다. 유연에 대하여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는 "그들은 무지하고, 모습이 벌레와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연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멸시하는 칭호였다. 유연이 계속하여 북위를 침범하였기 때문에, 북위는 국력을 많이 소모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유연은 북연에도 위협적이었다. 북위는 내부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는데, 외부에도 강적이 있었다. 풍발로서는 유연이 쳐들어오는 것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유연의 칸인 용곡률이 사신을 보내어 풍발의 딸인 낙랑공주를 달라고 하며, 말 3천필을 보냈다. 직접 혼례품까지 보내면서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오만한 일이었다. 풍발이 당시 참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형세가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공주가 멀리 시집가는 것으로, 풍발이 골치아파하던 변방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북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유연과 화친하여 유연의 위협을 제거한다. 그리고 유연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할 수 있었다. 북연만이 십여년간 평화로왔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중에 풍발은 혁련발발의 대하(大夏)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그 뜻은 모두 북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북연이 북위에 신속히 멸망당하지 않은 주요한 이유였다. 비록 정치적인 고려에 의하여서이지만 풍발이 딸을 시집보낸 것은 아무 황제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풍발은 '오랑캐의 습속을 존중한다"고 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인종편견이 없다는 말이다. 그의 흉금은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당연히 풍발의 사상이 개방적이었던 것은 시대적인 이유가 있다. 풍발은 한족이기는 하지만, 계속하여 후연의 군대에서 일했고, 선비족화 많이 된 사람이다. 그가 모용씨를 대체한 후, 여전히 대연(大燕)의 기치를 들었는데, 이것도 그러한 점을 반영한다.

 

자신의 딸을 아끼는 것은 부모의 공통된 심정이다. 딸을 멀리 시집보낸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고, 부득이한 조치이다. 사실상 풍발은 사신을 국내의 곳곳에 보내어 병들고 힘들자들을 위문하고, 고아나 노인에게는 곡식과 의복을 내렸다" 약자들에 관심을 가지고 민생을 해결해주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황제가 자신의 딸을 아끼지 않을 리 없다. 풍발은 업적이 있는 황제이다. 그는 북연을 22년간 통치했다. 당연히 그가 거둔 성과는 멀리 유연으로 시집간 낙랑공주의 덕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