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위병(路衛兵)
누소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편을 골랐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남편을 고르는 것이 지금은 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에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속한 부속물이었다. 그저 골라주는대로 따라야 했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헛소리이다. 아예 그럴 기회도 주지 않는다. 부모가 혼약을 해주면,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르고,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모두 운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그건 네 운이다. 추악한 괴물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저 운이 없음을 탓하고, 천천히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소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는 바로 손을 써서 혼인을 했다. 당시 남자집이 가난해서 예물을 준비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마련했다.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시집간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누소군은 황후를 지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골랐던 남자인 고환(高歡)이 비록 찬위를 하려는 뜻은 있었지만, 실제로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황제는 아니다. 이는 조조와 마찬가지이다. 고환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2대에 걸친 사업’을 기획하였다. 그는 효무제 원수를 내세워 동위를 만들었다. 이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도기였다. 그는 조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북제를 건립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닦아 놓는다. 마지막 업무완수는 그의 아들인 고양(高洋)에게 맡긴다. 고양은 동위에서 황제위를 빼앗아 북제를 건립한다. 그리고는 부친인 고환을 고조(高祖)로 추존한다. 비록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권력을 놓고 보자면, 고환은 황제와 다름이 없었다. 이것은 누소군이 원래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누소군은 고환보다 오래 살아서, 황후는 되지 못했지만, 황태후(皇太后)의 자리에는 오른다. 나중에는 태황태후(太皇太后)까지 된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에게 준 모든 영광을 누렸고, 이는 그녀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해준다. 바로 그녀의 혜안으로, 이 역사책에 기록된 전설적인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누소군이 고환에게 시집갈 때, 고환은 북위에서 평성(지금의 산서 대동)을 수비하는 일개 병졸이었다. 분대장급도 아닌 보통병사였다. 전혀 왕이나 황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없는 사병이 언젠가 팔방에 위세를 떨치는 대장군이 될 줄은. 그러나, 누소군은 그를 알아보았다. 딱 한번 보고는 이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낭군임을 확신한다. 안목이 이처럼 날카로왔던 것을 보면 누소군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던 것같다.
우연한 만남은 고환이 평소와 같이 성벽위를 순찰돌던 때 일어났다. 매일이 같았다. 오늘만 햇살이 찬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행운의 여신이 다가오는 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더구나 신경쓰지도 않았다. 성아래의 멀지 않은 곳에 한 아름답고 다정한 아가씨가, 아름답고 다정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즐은. 성벽위에 서 있는 위풍당당한 모습때문인지,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불어온 따스한 바람 때문인지, 누소군의 마음의 빗장은 활짝 열린다. 한마디로, 누소군은 고환은 본 후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를 못했다. 그리고 격정에 대갓집 규수로서의 긍지도 잊어버렸다. 말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곁에 있던 시녀에게 그만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저 분이야말로 장래의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다.”(此眞吾夫也)
고대에는 물론이고, 현대라고 하더라도, 이런 여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잘생긴 남자 혹은 마음이 움직이는 남자를 보고서, 한두번 눈길을 주고, 두세번 한숨을 쉬고, 삼사초 마음이 뛰다가, 몇마디 얘기하고는 그를 따라 가버린 격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있다. 그걸 가지고 호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번 만난 다음에 바로 이 남자가 내 남편이다라고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보통이라면 나중에 이런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라든지, 그저 나중에 내 남편이 이렇게 잘생긴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누소군처럼 아예 그 자리에서 결정을 짓고, ‘바로 이 남자다’라고 한 후 일련의 실제행동에 나서는 것을 보면 이 누소군이 성격적으로 아주 시원시원하고 호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고환은 잘 생겼다. 이것이 아마 누소군의 눈길을 끈 점일 것이다. 고환은 “눈에 빛이 있고, 머리가 길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이빨이 희어서 옥과 같았다”고 한다. <<북제서>>에서는 그를 ‘드물게 보는 인걸’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우가 헌앙한 인재였던 것이다. 인물이건 맵시건 모두 여인들이 좋아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모두 똑 같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비슷하게 보인다(얼굴에 돌출한 특징이 있어서 한번 보면 잊어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여러 사람들 속에서 고환을 콕 집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고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아니고서야. 하물며 당시에 성벽은 아주 높았다. 시각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누소군 아가씨의 시력에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인 조건이 그렇게 열악한데도, 이 장기간 보유할 수 있는 잠재력있는 주식을 발굴해낸 것이다.
잘생겼다는 것만으로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 누소군의 조건이라면 잘생긴 남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누소군의 부친은 증사도(贈司徒) 누내건(婁內乾)이다. 비록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고관자제는 아니지만, 부잣집의 입고먹는 걱정이 없는 가정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이런 집안의 규수라면 시집갈 걱정은 없다. 당시의 많은 귀족들이 그녀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명문집안의 자제였다. 고관자제이거나 부호2세이다. 보통집안출신은 명함도 못내민다. 바로 이러한데도 누소군은 모두 거절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인연을 무슨 운명이라고 할 밖에 없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높은 성벽위에 있는 고환에 누소군은 한 눈에 반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일렀다면 고환이 성벽위에 없었을 것이고, 혹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고환이 순찰을 마쳤을 것이다. 더더구나 누소군이 마침 고개를 들어 성벽위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이 전설적인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규방에 머물러 있던 누소군이 이번에 바깥을 나와서 한 눈에 반해버리다니, 이게 인연이 아니면 무엇인가? 감정은 원래 기이한 것이다. 느낌이 오면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다. 감정은 어떤 대는 영혼의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마음에 둔 남자와 여자간에는 피차간에 무형의 파(波)가 전해진다. 공기중에 빠른 속도로 가서 부닥치고, 열량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따스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감싸고, 마음의 따스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누소군에 있어서, 고환에 반한 것은 만리장정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녀는 부모의 관문을 넘어야 했다. 학생들의 애정은 보통 부모의 반대에 부닥친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남녀는 왕왕 외부의 여러 요소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들은 신경쓰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먼저 고환과 누소군의 신분지위가 맞지 않았다. 집안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고환의 집은 가난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보병이므로 말도 없다. 고환은 성격이 호쾌했다. 아마도 월급을 받더라도 형제들끼리 술이나 마시버렸을 것이다. 이런 가난뱅이 사병을 누사도가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혼처중 그 어느 곳이 고환의 집안보다 못하던가. 딸을 이런 가난뱅이 군인에게 시집보낸다면 체면이 어떻게 될 것인가? 더더구나 이 가난뱅이는 결혼예물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에물은 누소군이 직면한 큰 난제였다. 고환은 확실히 낼 능력이 없다.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아예 결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시집가기 위하여, 누소군은 두 가지 준비작업을 한다. 첫째, “시비를 시켜 뜻을 전한다” 즉, 시비를 고환에게 보내어, 누소군이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고환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여러 번 사재를 털어서 보내고, 그것을 자신의 결혼예물로 쓰게 한다” 자신이 평소에 모아두었던 재산을 몰래 고환에게 보내고, 고환은 이것을 가지고 결혼예물로 썼다. 누소군이 먼저 시비를 보내어 뜻을 전했으므로, 한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부인을 얻었다. 이는 하늘에서 떡이 굴러떨어진 격이다. 흥분해서 기절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아주 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소군이 대범하고 호방한 성격이며, 생각과 주관이 뚜렷하며, 문제에 직면하면 전면적으로 보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소군을 취한 후에 고환은 기반이 생겼다. 돈이 있으니, 병사와 말을 모아서, 군대내에서 대주(隊主)로 직위가 오른다. 요즘으로 치면 소대장 정도가 되었다. 이제 군인으로서 성공의 길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고환은 점점 성공하여, 부하도 점점 늘어나고, 갈수록 많은 지방세력들로부터 중시된다. 북위말년에는 암암리에 여러가지 움직임이 나타났고, 위기가 사방에 잠재해 있었다. 국내는 이미 불안정했다. 고환은 먼저 진장(鎭將) 갈영(葛榮)에 의탁한다. 나중에 갈영이 북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호족두령 이주영(爾朱榮)에게 패배한다. 고환은 다시 이주영의 부하가 된다. 이주영은 반란진압에 공이 있어, 북위의 권신이 된다. 고환도 중용된다. 이주영이 효장제에 의하여 주살된 후, 고환은 이 기회를 틈타서 이주영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여 동위정권을 세운 후에는 고환이 대승상, 태사가 된다. 이때부터 대권을 손아귀에 쥐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다.
고환의 이런 모든 업적은 누소군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누소군은 혜안을 가지고 영웅을 알아봤다. 고환은 천하를 가질 뜻을 지녔는데, 이는 이상과 포부이다. 그는 그릇이 컸다. 이것은 성공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는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서 사람들과 사귀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누소군이 없었다면 고환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쓸 곳이 없었을 것이다. 고환이 사방으로 정벌을 하러 다니는 기간동안, 누소군는 힘을 다해 남편을 도운다. “밀모나 비책을 세울 때 태후가 항상 참여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고난을 함께하고 고환을 위하여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누소군이 고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잠재력있는 주식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갔지 내려가지 않았다. 이는 고환이 실의에 빠졌을 때도,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다시 웅심과 투지를 불사를 수 있었다. 사실상 누소군이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출발점과 도착점은 바로 남편의 사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번은 고환이 대외정벌을 나갔을 때, 누소군이 아들을 낳게 된다. 남,녀 쌍둥이였고, 난산이었다. ‘좌우에서 위급한 것을 보고 신무(고환)에게 알리자’고 했다. 그러나, 누소군은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대왕이 밖에 출병해있는데, 이런 일로 군대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내가 이 겁난을 견뎌낼 수 없다면, 그가 와도 방법이 없다. 보라 이 얼마나 총명한 여인인가. 자식을 낳으면서도 머리는 맑았다. 고환이 이 말을 들은 후 한참을 감탄했다고 한다.
후궁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누소군은 대범했다. 고환의 관직이 커지면서, 부인도 많이 거느리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누소군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삼처사첩이 허용되었고, 이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대장군이 부인이 한둘이면 그것이 비정상이다. 그러나 누소군은 성격이 너그롭고 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환의 다른 첩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그녀의 행동중 가장 탄복할만한 것은 남편의 앞날을 위하여 자신이 정실에서 물러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북방의 연연(蠕蠕)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연연의 공주를 고환이 취하게 되었다. 누소군은 이번 정략결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스스로 정실에서 물러나고, 연연의 공주를 정실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런 흉금은 고대의 여인에게서 보기는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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