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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항주서호의 소제(蘇堤)와 백제(白堤)

by 중은우시 2010. 7. 16.

글: 정계진(丁啓陣)

 

항주 서호에 가본 사람이면, 아마도 '소제' '백제'라는 두 유명한 제방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제방을 걸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그 이름의 유래 즉, 당송의 저명한 시인인 백거이와 소동파가 항주에서 지방관으로 있을 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두 제방의 내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상식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호의 북쪽에 위치하여, 동으로는 '단교잔설(斷橋殘雪)'부터, '금대교(錦帶橋)'를 지나 서쪽으로 '평호추월(平湖秋月)'에 이르는 항주시 서호의 유명한 제방은 통상적으로 '백제(白堤)"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은 당나라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항주자사를 지낼 때, 건설한 제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백거이가 항주에서 자사를 지내는 동안 확실히 제방 하나를 만든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 전당문(錢塘門) 바깥의 석함교(石涵橋) 부근으로 일찌기 백공제(白公堤)라고 불리운 제방이다. 다만, 그 제방은 도시지리의 변화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 현재의 이 '백제"는 "백공제"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백사제(白沙堤)"를 불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백사제"는 당나라때의 이름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제(沙堤)"라고도 불리웠다. 송나라때에는 "고산로(孤山路)", "십금당(十錦塘)"등의 명칭이 있었다. '백사제'는 비록 당나라때 만들어졌지만, 당초에는 저수지로 농업용 관개를 위한 것이었다. 다만 시간은 백거이가 항주자사를 맡았을 때보다는 훨씬 이르다. 백거이의 시 <<전당호춘유>>에 '백사제'가 나온다. 그 시를 보면, 그가 항주자사로 있을 때쯤에는 사람들이 주로 활동한 곳이 고산의 서쪽, 지금의 곡원풍아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사제는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 아니라 비교적 황량한 곳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거이가 말을 타고 백사제를 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제'를 만든 것은 백거이와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서호의 서쪽에 위치하고 남북으로 놓인 소제은 소식(蘇軾)이 만든 것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우5년(1090년) 소동파가 항주자사로 있을 때, 서호를 준설한 바 있고, 파낸 진흙과 모래등을 가지고 남북방향의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소동파가 만든 제방은 개략 남쪽의 남병산록에서 북으로 서하령아래에 이르는 제방의 원형이다. 비록 원형이기는 하지만, 이 제방의 유명한 육조교, 즉영파, 쇄란, 망산, 압제, 동포, 과홍은 모두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것들은 모두 소동파가 지은 이름이다. 소동파는 자신의 시에서 소제를 건설한 내용을 적기도 했다. 남송때부터, 소동파가 만든 이 제방은 서호십경중 첫번째로 꼽히고 있다. 소제춘효(蘇堤春曉).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이 보는 소제는 일찌감치 소동파가 만들었던 원모양이 아니다. 무수한 수리개축을 통하여 노면도 바뀌고, 나무도 심었다. 예를 들어, 서호에 '양공제"를 만든 명나라 홍치연간의 항주지주 양맹영은 서호의 흙을 준설하여 소제를 증축한 바 있다. 즉, 오늘날 소제의 아름다움은 소동파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서호의 두 제방의 이름이 지어진 연유를 보면, 하나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이고 다른 하나는 이편개전(以偏蓋全)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세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백거이, 소동파는 모두 괜찮은 지방관리였고, 일찌기 덕정을 베푼 바 있어, 현지 백성들이 그들을 잊지 않았다. 둘째, 백거이, 소동파는 유명한 시인이고, 현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외지인들도 존경하여, 쉽게 기억할 수 있었고, 사람들의 화제에 오를 수 있었다. 셋째, 그들은 모두 인구헤 회자되는 서호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사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시를 읊으면서 그들이 지방관리로 있을 때, 아름다운 서호를 만든데 대한 공을 기리고자 하였다.

 

각도를 바꾸어 보자면, 사람들이 두 제방을 옛날의 두 지방관리를 위한 기념비로 삼은 것이다. 혹은 사람들이 두 저명한 시인을 이 거세무쌍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대변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항주서호의 북쪽에 위치한 악비의 악왕묘에는, 유명한 대련이 걸려 있다. "청산유행매충골, 백철무고주영신(靑山有幸埋忠骨, 白鐵無辜鑄臣)" 전체 항주서호를 보자면 이 대련과 같이 "서호유행래백소, 송도무고용진가(西湖有幸來白蘇, 宋都無辜容秦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진은 진회(秦檜), 가는 가사도(賈似道)이다. 두 사람은 모두 송나라의 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