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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동정군산(洞庭君山)과 개방문화(丐幇文化)

by 중은우시 2009. 1. 16.

 

 

글: 사지동(謝志東)

 

군산(君山)은 동정호(洞庭湖)의 안에 있는 작은 섬이다. 악양성(岳陽城)과는 1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천고의 명루(名樓) 악양루(岳陽樓)와 멀리서 마주보고 있다. 군산의 면적은 넓지 않다. 겨우 0.96평방킬로미터이다. 군산의 산도 높지 않다. 전체 섬에는 72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3.3미터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면적도 크지 않고, 산도 높지 않은 작은 섬이지만, 지명도에 있어서는 많은 명산대천을 능가한다.

 

군산이 명산이 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팔백리 동정호는 물안개가 넓게 퍼져 있는데, 수목이 울창한 군산은 마치 커다란 배 한 척이 넓디 넓은 호수위에 떠 있는 것같다. 악양루에 올라서 멀리 군산을 바라보면, 맑은 날에는 온통 물빛인데, 나무숲의 파란 색이 뚜렷이 보인다. 흐린 날에는 군산주위가 안개에 둘러쌓이고, 파도가 넘실거린다. 군산에 올라가면, 산위에서는 봉우리가 연속되어 있고, 골짜기도 연이어져 있으며, 새가 울고 꽃이 피어있다. 산위에서 동정호를 바라보면, 멀리는 물과 하늘이 하나로 합쳐져 있고, 가까이는 파도가 섬을 치고 있다. 이처럼 신기하고 수려한 경관을 보면, 대자연의 신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자연의 조화는 쉽게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에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런 경탄이 일단 문인소객(文人騷客)의 상상력과 결합되면, 무궁무진한 창작의 영감이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문인소객들이 군산에 대하여 부지기수의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이태백은 "제자소상거불환(帝子瀟湘去不還), 공여초색동정간(空餘草色洞庭間), 담소명호개옥경(淡明湖開玉鏡, 단청화출시군산(丹靑畵出是君山)"이라고 읊었고, 옹도(雍陶)는 "의시수선소세처(疑是水仙梳洗處), 일라청대경중심(一螺靑黛鏡中心)"이라고 노래하고, 유우석(劉禹錫)은 "요망동정산수취(遙望洞庭山水翠), 백은반리일청라(白銀盤里一靑螺)"라고 읊었으며, 황정견(黃庭堅)은 "미도강남선일소(未到江南先一笑), 악양루상대군산(岳陽樓上對君山)"이라는 글을 썼고, 원목(袁牧)은 "기점군산운외립(幾點君山雲外立), 의승풍거방봉래(擬乘風去訪蓬萊)"라고 감탄했다. 역대문인소객들이 군산에 대하여 많이 읊은 것도 군산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두번째 원인이 되었다.

 

군산이 명산이 된 것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러 신화전설이 군산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었다. 군산의 형성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곤룬산위의 한 커다란 돌맹이가, 태풍에 날려와서 동정호에 떨어져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동정호의 72 선라(仙螺)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군산의 명칭도 신화에서 왔다. 전설에 따르면 순(舜)임금이 남방을 순시하는데, 그의 두 왕비인 아황(娥皇), 여영(女英)은 그를 뒤쫓아 동정호까지 왔다. 그런데, 순임금이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두 왕비는 비통함이 극에 달하여 대나무를 붙들고 울었는데, 눈물이 대나무에 들어가서 나중에 반죽(斑竹)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두 왕비는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죽고, 나중에 상수의 여신이 된다. 그리하여 상군(湘君)이라고 불리운다. 이 산은 일찌기 상군이 놀고, 머물다 간 곳이므로, 후세인들이 이를 상산(湘山) 혹은 군산(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섬에는 이비묘(二妃墓), 상비사(湘妃祠)등의 유적이 있는데, 모두 이 전설과 관련이 있다.

 

유의전서(柳毅傳書)는 군산에 전해져 오는 또 하나의 심금을 울리는 사랑이야기이다. 서생 유의가 과거에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섬서(陝西)의 경하(涇河)의 북안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서 양을 치는 소녀가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연유를 물어본다. 그러자 그 여자는 동정용왕(洞庭龍王)의 딸인데, 경양군(涇陽君)에게 시집을 왔고, 갖은 학대를 다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의는 그 여인의 부탁을 받아 동정까지 서신을 전해주기로 한다. 유의는 동정군산에 도착하여 용녀가 말한 우물을 찾아서, 우물 곁의 대길수(大桔樹)를 세번 치자, 문을 지키던 신장(神將)이 그를 용궁으로 모시고 간다. 동정용왕의 동생인 전당군(錢塘君)이 그 사정을 듣고는 아주 분노하여, 적룡으로 변해서 경양군을 죽여버리고 용녀를 다시 데려온다. 나중에 우여곡절을 거쳐, 유의와 용녀는 부부로 맺어진다. 섬에는 유의정(柳毅井), 전서정(傳書亭)등의 유적이 있는데,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낭음정(朗吟亭)은 여동빈(呂洞賓)의 "삼취악양인불식, 낭음비과동정호(三醉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는 싯구에서 따왔다. 전해지는 바로는 여동빈이 악양루에서 술에 만취해서, 시가를 부르면서 동정호를 날아건너, 군산까지 왔다고 한다.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산을 베개로 삼아 누웠다고 하는데, 낭음정은 바로 술취한 후에 산을 베면서 머리를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 섬에는 진시황의 봉산인(封山印), 한무제의 사교대(射蛟臺), 송나라때의 비래종(飛來鐘) 그리고 양요채(楊寨)등의 여러 명승지가 있다. 군산의 봉우리하나 언덕하나, 골짜기 하나 시냇물 하나가 모두 신화고사와 연결되어 있고, 신화세계와도 같다.

 

그리고, 도교의 "칠십이복지(七十二福地)"중 군산이 11위에 올라 있고 지선(地仙) 후생(侯生)이 다스리는 곳이다. 천하제일대방이라는 개방(丐幇)의 총타(總舵, 본부)도 군산에 있다. 군산은 이것때문에, 무당산, 숭산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무림의 삼대승지(三大勝地)로 칭해진다. 빼어난 자연환경에 연원이 길고 깊은 인문환경까지 군산은 천하의 명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다.

 

무협소설에서 구축한 강호세계에는 개방이 가장 자주 나타나는 방파중 하나이다. 개방의 제자는 아주 많고, 분포도 널리 퍼져 있으며, 세력도 방대하다. 그리하여 천하제일대방이라고 불리운다. 비록 무협소설에서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이지만, 개방이 군산에서 시작되고, 군산이 총타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말이다. <<개방사화(丐幇史話)>>에 따르면, "개방은 처음에 당희종 건부4년(877년)에 창립되었다. 그때는 어린 임금이 멍청하고, 환관이 득세하여, 사람들의 원망이 드높았다. 하늘도 무심하여 동쪽은 황량하고 서쪽은 척박했다. 그리하여 길가에 굶어죽은 사람이 늘려 있었다. 복주사람인 왕선지(王仙之) 원구사람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켜서, 당나라조정에 항거했다. 건부4년, 황소의 대군이 운주에서 갇히자, 천하호걸들에게 구해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하의 대장인 장의방(庄義方)이 무림첩을 돌린다. 천하의 군웅들로 하여금 동정호의 군산에 모여달라고 한 것이다. 장의방은 황소의 부하이고, 무공이 뛰어나 무림에서 명망이 있었다. 황소보다도 오히려 높았다. 무립첩이 돌려지자, 천하의 군웅들이 속속 이에 응하였다. 7월 15일, 각로의 영웅이 군산에 모여서 개방을 창립한다. 장의방이 개방의 제1대방주로 추대된다. 나중에 황소의 반란은 실패한다. 장의방은 고대의 현인 노중련(魯仲連)을 본받아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자결하고 만다" 장의방이 죽은 후, 개방의 반당활동은 끝이 난다. 그러나, 개방의 조직은 비밀리에 존재했고, 발원지인 군산을 여전히 총타로 삼았다. 개방방주와 개방제자는 평소에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다가 매년 총타에서 한번씩 집회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많은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개방군산대회(丐幇君山大會)이다.

 

양송(兩宋, 북송, 남송)시대에 개방조직은 다시 활성화된다. 남송초기에 동정호지구의 종상(鍾相), 양요(楊)가 의거를 일으킨다. 실제로는 개방의거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종상이 당시 개방방주였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의거군은 역사교과서에서는 '우리걸식하는 농민'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개방제자들이었다.

 

종상과 양요의 의거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종상은 정주 무릉사람이다. 정강2년(1127년초)에 종상은 개방제자 삼백명을 조직하여, 장남 종자앙(鍾子昻)으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근왕(勤王, 왕을 보호함)하도록 명한다. 다만, 이 개방부대가 금나라군대와 접촉하기도 전에, 막 즉위한 송고종 조구는 되돌아오도록 명령한다. 일부 무협소설에서 묘사하는 남송시대의 개방방주는 민족대의를 중시하여, 금나라에 항거하는 깃발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개방의 금나라에 항거한 이야기는 무협소설에서 크게 과장하였던 것이다. 종상이 개방제자를 조직하여 금나라에 항거하려는 것은 실패한다.

 

나중에 이 무리를 기초로 동정호지구는 반남송조정의 반란을 다시 일으킨다. 반란이 일어난 후 1개월동안 동정호주위의 19개현을 점령한다. 남송조정은 아주 놀라서, 공언주(孔彦舟)를 착살사(捉殺使)로 임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한다.  공언주는 정면으로 싸워서는 종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먼저 간첩을 보내어 거지로 분장하게 한 후, 종상의 반란군에 섞여들어가게 한다. 그 후에 관군이 종상의 산채를 습격한다. 종상과 종자앙은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중상이 죽은 후, 양요는 새로운 개방방주로 추대된다. 그리고 계속하여 관군과 싸운다. 소흥5년(1135년) 봄, 송고종은 악비를 보내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한다. 그리고 재상 장준이 친히 나서서 전투를 격려한다. 그들은 호수의 길목에 병사를 배치하고, 포위망을 좁혀간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봉쇄하고, 대거 투항권유활동을 벌인다. 나중에 기의군의 장수 황좌(黃佐) 양흠(楊欽)이 배신하고 투항한다. 반란군은 내부분열로 와해된다. 양요는 끝까지 싸우다가 체포되어 희생당한다.

 

지금 산위에는 양요채의 유적이 있다. 바로 당시 개방방주 양요가 업무를 보던 장소이다. 청나라때의 <<파릉현지>>에 따르면, "양요채는 원래 청기와 황토벽이 9중으로 되어 있고, 건물이 30여칸이었다. 의사청, 백호당, 도창고(刀槍庫)등이 있었다." 청나라때의 <<악비전>>에서는 양요채에 대하여 과장을 하기는 했지만, "멀리서 바라보니, 그 군산위에는 궁전이 높이 솟아있고, 깃발이 빽빽했다, 아주 웅장했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개방의 본부는 상당히 기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이후, 개방은 온 지방에 다 존재하게 된다. 거의 모든 지역마다 상응하는 거지조직이 있고, 파벌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각문각파는 서로 각자의 체계가 있었다. 모시는 조사도 서로 달랐다. 군산을 이리하여 개방총타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역사의 각도에서 개방문화를 살펴보면, 군산은 여전히 개방문화의 비조이다.

 

군산은 개방의 발원지이자 초기의 총타로서, 이치대로라면, 무당산, 숭산처럼 중국의 역사문화유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지금의 군산은 이 때의 역사를 다 잊어버린 것같다. 군산관광지구의 선전자료를 보면, 개방과 관련된 어떤 소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개방의 사회지위가 미천하여, 개방문화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기 대문일 것이다.

 

군산이 최근들어 제시한 목표는 바로 "중국의 사랑섬"으로 만드는 것이다. 섬에는 중국의 애정박물관을 만들고, 모든 길, 다리, 호수, 점포, 꽃, 풀, 나무의 이름에도 애정의 이름을 부여했다. 온 섬이 사랑에 가득한 분위기이다. 2006년, 군산에서는 "중국당대10대사랑이야기"를 뽑는 이벤트도 열었다. 전국각지에서 모두 2900여개의 이야기와 단서가 응모했고, 최종적으로 10가지 감동적인 부부를 선발했다. CCTV에서는 시상식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2007년, 호남관광행사기간에, 군산에서는 '만인견수애정도(萬人牽手愛情島)"라는 대형 집단결혼이벤트도 열었다. 쌍쌍의 젊은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결혼식을 마쳤다. 아주 낭만적이고 따스하다..사랑은 마치 군산의 유일한 문화주제가 된 것같다.

 

보기에 이 아름다운 작은 섬에 개방문화는 이미 깨끗이 청소되고 없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