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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남경 대보은사탑(大報恩寺塔)의 7가지 수수께끼 (II)

by 중은우시 2008. 7. 28.

 

다섯째 수수께끼: 두 세트의 예비자재는 언제 출토될 수 있을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대보은사탑의 가장 뛰어난 점은 '유리'에 있다. 이것때문에 과거에 사람들이 이것을 '보탑(寶塔)'이라고 칭한 것이다. 공법이 실전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가장 어려운 점중의 하나이다. 민간의 전설에 의하면, 당시에도 이런 점을 인식해서, 다시 구워가지고는 똑같이 구울 수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주체는 장인들에게 예비물품을 준비해두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나중에 교체하거나 수리할 때 쓸 수 있도록.

 

당시 응천성을 건설하는데 쓰기 위하여, 주원장은 전국각지의 장인들을 모두 남경으로 불러모았다. 주체가 대보은사, 탑을 지을 때, 역시 대량의 장인들을 불러모았다. 특히 유리장인을 불렀다. 보탑산의 바깥에는 지금의 요강촌(村) 일대이다. 여기에 관요를 두고, 탑에 소요되는 대량의 유리자재를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에 모두 72개의 요장(場)이 있었고, 대보은사탐이 지어지자 이 요장은 모두 폐기시켰다고 한다.

 

명나라때의 장대가 쓴 <<도암몽억>>에 따르면, "다 구워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개의 탑에 쓸 것이 갖추어 졌따. 하나는 사용하고, 나머지 둘은 묻었다. 일련번호를 새겨서 알아볼 수 있게 하였으며, 지금의 탑에서 벽돌 하나가 부서지면 그 번호를 공부에 보고하여 벽돌 하나를 꺼내서 쓸 수 있게 하여,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문가는 이를 기초로 이 두 세트의 유리자재는 대보은사탑에서 멀지 않은 취보산의 명나라때 유리요지부근의 지하에 묻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신화가 주편한 <<금릉불사대관>>이라는 책에 따르면, 1958년 대륙의 '강철제련'붐이 일 때, 민간에서는 취보산의 요지에서 대량의 유리제품을 발굴했다. 위에는 모두 층수와 상하좌우위치가 묵필로 쓰여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보은사탑의 공문의 자재라고 감정했다. 남경박물원은 공문의 복원모형을 만들었으며, 지금도 전람관에 전시하고 있다. 1959년, 부근에서는 유리자재를 보관해둔 창고방이 발견되었는데, 불행히고 홰손되었다.

 

강철제련의 붐이 끝나갈 때쯤, "안향묘(眼香廟)"라는 곳의 동남쪽 약 4,50미터 지점에서, 지면에서 2미터 깊이의 지하에서 당시 촌민이 유리자재를 보관한 창고방을 발굴한다. 창고방은 커다런 벽돌로 쌓아서 이루어졌으며, 안에는 유리자재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다. 어떤 것은 무게가 2,3백근에 달하였다. 4미터 깊이 2미터 너비로 입구를 팠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촌민은 이 조각으로 강철제련의 내화벽돌로 사용하였다. 나중에 강철제련이 중단되었다. 이들 유리자재는 쓸모가 없어져서 파낸 것들은 모두 부숴버렸다. 이외에 반제품 창고도 발견되었다.

 

1987년, 남경정부측에서는 현재의 남경문문국 국장인 양신화를 조장으로 하는 "명초유리요유적지일제조사소조"를 만든다. 그리고, '예비품창고'에 대한 탐사에 착수한다. 결과에 따르면, 요지부근의 1미터 깊이의 지하에, 유리자재를 묻은 곳을 발견하였다. 이는 역사기록이 정확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위에는 농민의 집이 있어서, 아직까지 전면적인 발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몇년전에, 남경에서는 도시남쪽의 입체교차로를 만드는데, 고요지 일대에서 대량의 유리제품이 나왔다. 필자는 그 소식을 들은 후, 촬영기자 낙도를 데리고 가서 탐방을 했고, 일부를 가지고 왔다. 나중에 신문사를 옮기면서, 이들 물건들은 버려지게 된다. 필자가 당시에 본 것은 당시 출토된 제품에 확실히 먹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고, 이 것이 어느 위치에 들어가는 것인지를 표시해두었었다. 나중에 이들 유리제품들은 남경의 관련부서에서 부자묘의 강남공원안에 임시로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보은사탑의 두 세트의 예비물품은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발굴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여섯째 수수께끼: 태평군은 왜 탑을 폭파시켰는가?

 

대보은사탑은 남경의 남쪽에 400여년간 우뚝 서 있었다가 1856년에 파괴된다. 대보은사탑의 소실의 책임자는 '태평군'이다. "함풍6년, 홍양(홍수전, 양수청)에 의하여 불태워지고, 벽돌창고도 폭파된다"

 

"함풍6년"은 바로 1856년이다. 그해 가을, 태평군은 내분이 발생한다. 홍수전, 양수청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것이다. 당시 강서의 군대를 이끌던 북왕 위창휘는 천왕의 밀지를 받고(일설에는 밀지가 없다고도 함), 병사 3천을 이끌고 천경으로 밤애 몰래 돌아와 양수청과 그 가족을 죽여버린다. 위창휘는 불측한 마음을 품고 일을 크게 벌여서 양수청의 부하 2만명을 살륙한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천경사변'이다.

 

익왕 석달개는 이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릎쓰고 천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위창휘의 남살행위를 질책한다. 위창휘는 살심이 다시 일어, 석달개를 죽이고자 한다. 석달개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밤에 안휘의 안경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부대를 끌어모아 위창휘를 토벌하고자 하고, 홍수전에게 위창휘를 죽이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같은 해 10월 5일, 홍수전은 조서를 내려 위창휘를 죽이고, 봉호를 삭탈하며, '사얼(死孼)'로 폄하시킨다.

 

대보은사탑은 석달개와 위창휘가 대치하는 와중에 무너진다. 당시 위창휘는 성안에 있었는데, 석달개가 높은 탑을 이용하여 성으로 대포를 쏠 것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명을 내려 탑을 부숴버리게 한다. 이 천하제일탑은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대보은사의 소실은 근현대중국역사에 얼마나 재난이 많았던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이전에 이미 영국인들에 의하여 약탈을 당했었다. 1840년 아편전쟁기간동안, 영국인은 청나라정부를 강박하여 남경 정해사에서 중국근대사상 첫번째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에 서명하게 한다. 이 기간동은 "대자탑(즉, 대보은사탑)"안에 보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영국군은 선후로 여러차례 이 곳에 가서 약탈을 벌인다. 금불, 금장식등 가져갈 수 있는 장식물과, 탑내의 진열물은 모두 '기념품'으로 그들이 긁어갔다. 또한 탑의 표면에 도금이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어떤 영국군은 몸에 지니고 있던 칼로, 하나하나 금을 벗겨갔다. 나중에 중국측이 항의하자 영국군은 배상을 해주고는 끝냈다.

 

위창휘에 의하여 폭파된 후, 탑꼭대기의 두 개의 거대한 철반(鐵盤)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철반이 아니라, 실제로는 금반(金盤)이었다. 바깥에는 1촌두께의 금이 입혀져 있었다(일설에는 구리라고 함). 태평군이 가지고 가버린다. 나중에 하나가 원 부지에 남겨지게 되는데, 나중에 어떤 사람이 탑의 도남쪽에 있던 '금릉제조국(이홍장이 남경에 지은 병기공장)의 문에 앞에 놔둔다. 철반은 돌의 위에 놓아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여전히 문앞에 놓여 있었다.

 

남경박물원의 문화재담당자인 장정상은 2004년 필자가 취재갔을 때, 이 일을 언급한 바 있다. 항전승리후, 철반이 보이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일본군이 부숴서 용화시킨 다음 대포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지주민에 따르면, 1943년까지는 보였다고 하는데, 이후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해에 전략자원이 결핍되어, 일본군은 남경의 도처에서 폐구리나 고철을 수거했었다.

 

일곱째 수수께끼: 탑의 건축방식이 피라미드의 건축방식과 같았는가?

 

대보은사탑은 당시 남경의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일찌기 금릉의 "사십팔경"중의 하나로 꼽혔다. 고대로마의 콜롯세움, 고알렉산더지하능묘, 이탈리아의 피사사탑등과 더불어 서양전도사들은 중세기의 '칠대기관'중 하나로 꼽았다.

 

명나라때 황실유리제조는 유리창에서 책임을 졌다. 유리창은 공부의 영선청리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보은사는 당시 황실공사이므로, 건축재료등을 아주 꼼꼼히 따졌다. 모든 유리제품은 전문적인 요에서 구웠고, 태감을 파견해서 감독했다. 정화가 칠하서양에서 귀국한 후, 주체에 의하여 이 탑의 건축을 책임지도록 보내어졌다. 공법은 아주 엄격하게 감독되었고, 조금만 하자가 있으면 바로 버렸다. 적지 않은 장인과 역부가 이것때문에 목이 달아났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대보은사탑이 19년간 건축되면서 사용한 돈이 248.5만냥은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돈이 부족했으믈, 정화하서양에서 남겨온 1백여만냥을 여기에 전용했다고 한다.

 

왜 이처럼 돈이 많이 들었을까? 대량의 유리제조에 돈이 든 것을 제외하고, 건축방법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대보은사의 건축방법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피라미드건축방법과 비슷했다고 한다. 손발로 한층 한층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1층을 만든 다음에 주변에 흙을 한층 쌓고 건축을 했으며, 그 후에는 다시 흙을 쌓았다. 이렇게 9층을 쌓아올렸다. 그리하여 계속 평지에서 작업하는 것이 되었다. 준공을 하고는 흙을 걷어내니, 탑신이 나타났다" 이처럼 평지에서 작업한 것은 작업품질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보은사는 78미터 높이인데, 이같은 고도를 이루러면 사방에 흙을 적지 않게 쌓아야 했을 것이다. 흙을 쌓는 공사도 일반적인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피라미드의 건축기법을 연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방법이 같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