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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췐저우(泉州): 중국 고대의 홍콩

by 중은우시 2012. 5. 1.

글: 옥곤(玉昆)

 

오늘날 중국영토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자유도가 가장 높으며, 대외개방도가 가장 높고, 국제화수준이 가장 높은 도시는 당연히 홍콩이다. 그뿐아니라, 홍콩은 일찌기 중국대외무역의 최대항구였고, 한때 대외교류의 유일한 창구인 적도 잇었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내지와는 다른 제도가 실행되었고, 자신의 독립적인 화폐도 있고, 문화에서도 다원화되고, 동서양이 융합된 특징을 보여준다. 만일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에서 일찌기 '홍콩'과 유사한 도시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서로 다른 시기의 '홍콩'은 서로 다른 지방이었을 뿐이다.

 

역사상, 홍콩과 유사한 지위를 지닌 곳은 몇 군데가 있다: 광저우(廣州), 상하이(上海) 그리고 췐저우(泉州). 만일 아편금지로 유명한 광저우와 민국시대의 상해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도시라면, 푸젠(福建)의 췐저우는 사람들에게 훨씬 낯선 도시이다. 오늘날의 췐저우는 그저 지급(地級) 도시에 불과하다. 푸젠이라는 경제가 가장 발달하지는 않은 성에서도 도시의 지명도로 보자면, 성정부소재지인 푸저우(福州)나 특구인 샤먼(廈門)에는 훨씬 못미친다. 그러나 고대, 특히 송나라 원나라대, 췐저우는 중국대외개방의 '포탈'인 특구였다. 최대의 대외무역항구이고, 심지어 마르코폴로같은 서방여행가들은 '동방제일항구'라고 칭했을 정도이다. 당시 지중해의 알렉산스리아항구만이 이에 필적할 정도였다.

 

13세기에 생활했던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는 스스로 원나라에서 17년간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는 1292년에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페르시아로 시집가는 한 몽골공주를 호송하여, 췐저우에서 출발하여 바다로 나갔다고 하였다. 그후에 그는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서방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여행기를 썼고, 자신이 동방에서 겪은 여러가지 일들과 견문을 적었다. 이 견문록에서 췐저우는 가장 많이 소개되는 도시중 하나이다.

 

마르코 폴로의 시대는 췐저우가 역사상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당시, 외국상인, 선교사, 여행가가 계속 찾아왔고, 각국의 상선도 빈번하게 출입했다. 췐저우는 번영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묘사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구에서 실은 후추는 일반국가에는 한번에 1척씩 떠나지만, 췐저우항구에 정박한 상선은 '만여척'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무역량이 얼마나 컸고 얼마나 번성했을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해상비단길'의 출발지로서 당시 췐저우의 수출폼목은 주로 도자기였다. 도자기는 고대사회의 하이테크상품이다. 지위는 지금의 실리콘으로 만든 칩과 비슷할 것이다. 모두 원료가 아주 싸지만, 당시의 극도로 복잡한 하이테크로 가공하여 고부가가치제품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당시 췐저우 부근의 더화(德化)는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했고, 대부분은 수출하였다. 이런 고부가가치제품의 수출로 췐저우의 대외무역이윤율은 아주 높았다. 정부도 여기서 많은 세수를 올렸다. 원나라 국고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다. 기실 원나라는 경제에 뛰어난 왕조는 아니었다. 원나라황제는 일찌기 여러번 해금정책을 내놓았다. 다만 남송전기부터 이미 번성하고 발달한 췐저우는 예외였다. 지금의 홍콩과 유사하게 일국양제의 특구의 지위를 누렸다.

 

얘기하자면 홍콩의 번성도 최근 사십여년의 일이다. 당시 췐저우의 번성은 최소한 수세기간 지속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떠난 후 50년이 지나서, 원나라 지정2년(1342년)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온 한 아랍 대여행가인 이븐 바투타가 중국에 도착한다. 그도 췐저우 항구로 상륙한다. 그는 반세기후에도 여전히 찬란한 '동방의 진주'를 복격한다. 그의 일기에는 췐저우항구는 그가 평생 보아온 가장 번성한 항구라고 찬탄했다. 항구안에는 큰 선박이 백 척 작은 선박은 무수했다고 한다. 만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지금 의문도 나오고 있지만, 이븐 바투타는 또 한명의 중요한 역사의 증인이다.

 

만일 이들 여행가의 기록으로도 믿을 수 없다면, 1974년에 췐저우의 후저항(後渚港)에서 출토된 송나라때 침몰선박 유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송나라때 췐저우가 항해업이 고도로 발달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유력한 직접증거이다. 이 배의 잔해는 길이가 24.2미터, 폭이 9.15미터, 합계 13개의 선창이 있고, 선창내에는 유향, 용연향, 주사, 빈랑등의 물건과 4700여근의 향료목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 배의 원래 길이는 35미터이고 만선배수량이 300톤가량이라고 한다. 수백년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의 함대는 길이가 겨우 24미터에 불과했고, 100-200톤의 목선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황대선(黃大仙)의 도관, 대여산의 대불(大佛)도 있고, 많은 교회와 청진사(淸眞寺, 이슬람사원)도 있는 홍콩과 비슷하게, 당시의 췐저우도 내지와는 다른 다원적인 문화가 융합하고 충돌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종교분야이다. 췐저우는 종교박물관으로 칭해지는데,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고대에는 경교라 부름), 삼대종교가 일찌기 서로 배척하지 않고 이 곳에서 유행했다. 이외에 도교, 힌두교, 일본신도와 마니교(김용소설에 언급된 마교인 명교)도 있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당나라때 만들어진 개원사(開元寺)같은 불교사원도 있고, 청정사와 같이 지금도 잘 보존되고 진귀한 중세기 고청진사(지금의 원형돔 청진사형식과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청원산 노군암(국내 최대의 노자석상)과 같은 도교승지도 있다. 국내유일의 힌두교 사원유적도 발견되고, 지금까지 "청정광명마니광불"을 모신 마니교 유적지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췐저우의 해외교통사박물관에는 수백개의 세계 각대종교의 석각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췐저우에서 출토된 진귀한 유물은 고대 외래문명이 췐저우에 전래되어 들어온 역사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홍콩의 교통이 발달하고, 바다를 건너는 다리도 놓여 있다. 당시 췐저우에도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이것은 11세기 송나라때 만들어진 낙양교(洛陽橋)이다. 췐저우 동족교외의 낙양강에 있는 이 돌다리는 중국에 현존하는 연대가 가장 오래된 바다를 건너는 돌다리이다. 이 다리의 귀한 점은 그것이 '오리(五里)'나 되는 바닷물을 지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북육로교통을 더욱 편리하게 하여, 경제의 번영을 촉진시키고, 성공적으로 "벌형기초(筏形基礎)"(교량의 가운데 선을 따라 많은 돌맹이를 바닷 속에 던져넣어 바다밑으로 돌로 둑을 만들고, 그리고 그 위에 교돈(橋墩)을 만드었다)과 "여고기법(礪固基法)(다리의 아래에 대량의 굴을 양식한다. 이런 바닷동물의 부착력이 강하고 번식이 빠른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다리기반과 교돈을 공고하게 부착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하여 밀물썰물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세계사상 유례없이 바다를 건너는 석교의 기초공사의 난제를 해결하고, 바다 위로 돌다리를 안전하게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북송때 천주태수인 채양이 주재하여 만든 이 다리는 1053년에서 1059년, 7년의 시간을 들이고 1400만냥(현행화폐로 환산하면 40억인민폐가량)을 들였다. 췐저우의 선민들은 췐저우의 웅후한 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대교는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지금 길이는 742.29미터, 너비는 4.5미터, 높이는 7.3미터이고, 44개의 배모양의 교돈이 있고, 645개의 난간이 있으며, 104마리의 석사자, 1개의 석정, 7개의 석탑이 있다. 고대 건축사상의 기적이자 고대인들의 지혜의 상징이다.

 

오늘 날, 홍콩은 마천루로 유명하다. 당시 췐저우에도 당시의 마천루건축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개원사내에 위치한 송나라때의 2개의 석탑은 높이가 각각 48미터, 44미터이다. 당시 초고층건축물이라 할 만하다. 700여년의 비바람을 견뎌냈고, 특히 명나라 만력연간(1604년)에는 8급 대지진도 견뎌내고(이 대지진은 췐저우가 쇠락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이다). 지금도 여전히 서 있다. 중국석탑중에서 뛰어날 뿐아니라, 세계고석탑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 중세기 췐저우 도시건축전성기의 표지이다. 오늘날 홍콩의 마천루는 당연히 더 높다. 그러나 700년후에도 그들이 여전히 그대로 서 있을 것인가? 아마 아무도 그렇게 결론은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