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아미산은 좋은 곳이다. 한번 가볼 만하다. 필자는 아미산의 역사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역사명인과 아미산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에피소드는 많고도 많다. 그러다보니 의문이 생겼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미산의 고승이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갈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바 있는가? 모택동은 왜 아미산에 오르기를 거절했는가? 장개석 모택동 두 사람은 정말 같은 아미산의 고승에게 점을 친 적이 있는가?
명산은 대부분 부처로 유명하다. 아미산은 더욱 그러하다. 아미산은 산서의 오대산, 절강의 보타산, 안휘의 구화산과 나란히 중국사대불교명산으로 이름이 났다. 예로부터, "금오대(金五臺), 은보타(銀普陀), 동아미(銅峨嵋), 철구화(鐵九華)"라는 말이 있었다. 문혁시기를 제외하고는 아미산의 향불은 계속하여 왕성하게 피어올랐다. 필자가 만년사의 앞에 가서 보았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도, 여전히 한무리 또 한무리의 선남선녀들이 경건하게 향불을 올리고 있었다.
명산에는 부처 이외에 명인들도 적지 않게 배출한다. <관광가이드>책자를 보니, 아미산에는 '7대명인'이 있다고 한다. 각각 헌원(軒轅), 보장(寶掌), 당태종(唐太宗), 주원장(朱元璋), 강희(康熙), 등소평(鄧小平)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칠대명인'은 헛소리이다. 최소한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명인의 개념에 상당한 혼란이 있다. 헌원, 보장은 하나는 신이고 하나는 승려이다. 모두 범인이 아니다. 이 산은 원래 그들의 것이다. 더 말할 게 있는가? 만일 이런 명인까지 꼽는다면, 아미산의 명인은 한무더기를 더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진의 혜지, 명과등 고승이 있다. 이들은 아미산에서 많은 행적을 남겼다.
당연히 포함되어야할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포함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끼워넣었다. 이것은 편찬자가 용속되고 천박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듣기 싫은 말로 하자면, '문화수준이 낮다' 문화명산 아미산으로서는 아니될 말이다.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사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가? 바로 장개석, 장위원장이다.
장개석의 중국근대사상의 지위가 어떠한가?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 만일 "겨우 며칠 머무른" 등소평도 '아미산명인'에 포함시킨다면, '몇년을 머무른' 장개석은 더더욱 포함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장개석을 얘기하자면 몇 마디를 더 해야겠다. 그는 이 글의 주인공이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미산이 현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된 것은 먼저 두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 첫째는 장개석이다. 그럼 둘째는 누구인가? 당연히 모택동이다. 장개석, 모택동은 각각 국공양당의 우두머리이다. 장개석에게 감사해야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그는 아미산에 간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왜 모택동에 감사해야 하는가? 아마도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중년이상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민국34년 일본이 패전을 선포하기 이틀전 즉, 1945년 8월 13일, 모택동은 글 하나를 발표한다: <항일전쟁승리후의 시국과 우리의 방침>. 글에는 아주 유명한 말이 담겼다: "이 '위원장'은 현재 '하산'해야 한다"
위원장은 장개석을 가리킨다. '산'은 아미산을 가리킨다. 모택동의 이 글은 영향력이 컸다. 아미산에 대하여 수십년간 공짜로 광고를 해준 셈이다.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여전하다. 아미산이 모택동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은 장개석과 모택동은 정치적 원수이다. 그들이 진정한 적수가 된 것은 사실 장개석이 아미산에 오르고 난 이후의 일이다. 1934년 10월, 중공이 이끄는 공농홍군의 주력이 모택동이 지휘하는 '국군'에 밀려 갈 곳이 없어진다. 할 수 없이 장정에 나선다. 이해 말, 홍군이 퇴각하는 방향을 따라, 장개석은 서남지구로 향한다. 1935년,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을 데리고 사천으로 가고, 친히 거기에 머물면서 '공산당토벌'을 지휘한다. 그리고 아미산의 아래에 군관훈련단을 만들어 천군(川軍)을 재편한다.
바로 이때, 장개석은 아미산 자락의 홍주산에 자신의 별장을 짓는다. 지금도 별장은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장개석관저"이다. 볼 수 있을 뿐아니라, 돈있는 사람은 숙박할 수도 있다. 28,000위안(한화 약500만원)을 내면, 장위원장의 스위트룸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다.
필자는 아미산의 장개석 별장을 구경했다. 별장은 산언덕에 있고, 앞에는 홍주하가 흐르며, 뒤에는 높은 산이 있다. 장개석은 풍수를 잘 알았다. 이곳의 풍수가 좋다고 한다. 문을 열고 바라보면, 아미산의 경치와 홍주하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몇 개의 작은 언덕이 연이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자신의 관저를 지은 것이다. 지금도 부근에는 여러 개의 별장이 세워져있다. 장개석 관저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삼호루"인데, "원수루"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주덕 원수가 이 곳에 머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개석의 별장내부는 고색창연하다. 전통적인 중국식 인테리어이다. 침실 한측에는 동료들과 국사를 논의하던 '회의실'이 있다. 벽에는 장개석이 친필로쓴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아마도, 홍군을 소탕하는 일련이 계획이 이 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을 것이다. 별장에 붙어 있는 곳은 차를 마시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곳이다. 지금은 계화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것은 장개석이 친히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개석은 아미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은 이 관저를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원숭이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민국의 저명한 매체인물이자 1949년후에 호북성 정협 문사전문위원을 지낸 바 있는 서원우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1936년 진성은 명을 받아 아미산에 군관훈련단을 만든다. 개학식때 장개석에게 훈화를 부탁한다. 지금도 훈화대는 남아 있다. 바로 아미산박물관의 뒷면이다. 식이 끝난 후, 진성은 장개석을 모시고 아미산에 오른다.
장개석이 높은 산을 걸어서 오를 수는 없었다.당시에 아미산에는 특유한 활간(滑竿)을 사용했는데, 바로 가마꾼들이 그를 매고 산에 오른 것이다. 홍주산의 관저에서 출발하여, 뇌음사, 순양전, 청음각을 거쳐, 홍춘평 길입구에 도착한다. 홍춘평 일대는 원숭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아미영후생태구'로 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이 곳에서 원숭이를 감상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미산관광의 주요코스가 되었다. 필자가 아미산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 위에는 모두 눈이었지만, 먹이를 찾는 원숭이는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기뻤었다.
장개석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자, 원숭이 무리가 모두 뛰어올라와서 가는 길을 막았다. 아미산에는 영후(靈猴)가 많은데, 이들 영후는 사람들을 잘 안다. 관광지이고 사람들을 많이 보다보니, 이미 숲으로 가서 먹이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저 길을 막고 관광객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게 되었다. 관광객들이 그들에게 줄 먹이를 가져오지 않으면 원숭이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좀 주지 않으면 공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전설에 따르면 한 남자아이는 생식기를 원숭이에게 물려서 잘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미산의 영후는 '깡패원숭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장개석은 아미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원숭이들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따르는 사람등는 특별히 맛있는 통조림을 준비해서 산에 올랐다. 당시 원숭이가 다가오자, 장개석은 즉시 통조림을 던지라고 분부한다. 원숭이들은 흥분하여 통조림을 들고 한 켠으로 가버린다. 그러나, 이 통조림은 열기가 어려웟다. 원숭이는 별론으로 하고, 사람도 쉽게 딸 수가 없는 것이었다. 통조림을 안고 있던 원숭이는 아무리 이빨로 물어뜯어도 열리지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원숭이는 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때, 한 원숭이왕이 휙 하고는 장개석이 앉은 활간에 올랐다. 속았다고 생각한 원숭이무리는 장개석의 일행을 겹겹이 에워싼다. 활간에 누워있던 장개석이 어찌 이렇게 무례한 원숭이를 보았을 리가 있는가. 때리려고 해도 되지 않고, 혼을 내서 쫓을래야 쫓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는 습관적으로 머리에 쓴 모자를 벗고, 한번 휘두른다. 이때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원숭이왕이 도망치자, 다른 원숭이들도 따라서 모두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부를 잘하는 심복은 즉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길조입니다. 장개석은 진룡천자이고, 진짜 왕입니다. 장개석이 모자를 벗자, 원숭이왕은 진왕이 화를 낸 것으로 생각하여 급히 무리를 이끌고 도망친 것입니다."
장개석의 이 "후왕우진왕(猴王遇眞王)"(원숭이왕이 진짜 왕을 만나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을 믿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아미산의 고승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을 구하기도 했다. 후왕이 정말 진왕을 무서워했단 말인가? 고승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해보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원래 이것은 후왕이 진왕을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왕이 대머리(중)을 만나서 그랬던 것이다.
아미산에서는 원숭이들이 부처에게 바친 음식을 훔쳐먹곤 한다. 특히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더욱 그렇다. 승려들은 원숭이를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곤 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원숭이들은 머리를 깍은 승려들에게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에 부처에게 바친 음식을 훔쳐먹지 않을 뿐아니라, 승려들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장개석은 대머리로 유명하다. 모자를 벗으니, 그 모습이 나타난 것이고, 원숭이들은 그를 아미산의 승려로 알았던 것이다.
장개석은 아미산을 매우 좋아했다. 그게 아니면 장기간 이 곳에 거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산은 확실히 비범한 곳이다. 이 산에 은거하여 득도한 고승대사가 수두룩하다. 아미산의 고승은 점이 용한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 장개석이 아미산에서 머물면서, 자주 산위의 고승들과 교류했다. 한담을 하다가 고승에게 점을 쳐봐달라고 하는데, 점괘는 이러했다고 한다: "승칙중, 패칙만(勝則重, 敗則灣)"
장개석과 그를 따라왔던 아들 장경국은 모두 그 점괘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장경국은 '패'자가 나오자 그냥 좋은 말로 부친을 위로했다. 이들은 1949년이 되어서야 그 뜻을 알아차린다. 중경을 수도로 삼아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이기지만, 공산당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대만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십여년전에, 아미고승이 더욱 정확하게 장씨왕조가 대만으로 패주한다는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아미산고승들의 점은 이렇게 신기한가? 필자는 그렇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분명히 후인들이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승칙중, 패칙만"을 제외하고도 아미고승이 장개석에게 주었다는 점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버전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승불리천, 패불리만(勝不離川, 敗不離灣)"이다. 필자가 자료를 찾아보니, 이처럼 대동소이한 점괘는 아마도 손중산의 유훈에 나오는 "외전불출천, 내전불출만(外戰不出川, 內戰不出灣)"에서 온 것일 것이다. 여기의 '천'은 사천이고, 여기의 '만'은 대만이다. 장개석은 손중산의 말을 깊이 믿었으므로 그는 대만을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것일 것이다. 아마도 대만으로 간 것은 손중산의 이 말에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장개석이 아미산에서 점을 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는 모택동을 얘기할 차례이다.
항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1035년 준의회의후, 모택동은 비밀리에 아미산을 올랐다. 아미산의 고승을 만나서, 천하에 대하여 묻고, 인생에 대하여 묻는다. 교묘하게도, 이 사람은 바로 장개석의 점을 쳐준 그 고승이었다. 모택동이 묻자, 고승은 마찬가지로 더 많이 얘기를 하지 않고, 모택동에게 종이를 한 장 내민다. 그 위에는 글자는 없고 숫자만 있었다. 4개의 숫자인데, 정면에는 "83", 뒷면에는 "41"이었다.
모택동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후에도 이에 대하여 더 묻지 않았다. 죽은 후에야 사람들은 아미고승이 모택동의 수명과 관직을 얘기한 것이라고 알게 된다. "83"은 모택동의 향년이다. 모택동은 1893년에 태어나서, 1976년에 죽는다. 83년을 산 것이다. "41"은 모택동이 41년간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1935년 준의회의때 정식으로 중공중앙의 최고지도자가 된 후, 1976년 죽을 때까지 시간이 딱 41년이다.
장개석, 모택동이라는 두 국공지도자의 운명을 아미고승이 점을 쳐서 알았다니, 정말 너무나 영험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곡에, 장개석이 아미산에서 점을 쳤다는 것은 약간은 믿을만하지만, 모택동이 아미산에 가서 점을 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전통적인 계산방법으로 하자면 모택동은 84세까지 살았다. 모택동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모택동이 생전에 아미산을 오른 적이 있었을까? 아미산박물관 관장인 웅탁 선생은 명확했다. "없다" 모택동이 아미산에 오른 적이 없다면 점을 쳤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모택동은 일생동안 무신론자였다. 미신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이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8341"의 전설은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만일 오대산 일대를 가본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모택동이 오대산에서 점을 쳤다고 얘기할 것이다. "8341"의 예언은 오대산고승의 입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북경주변에서는 건국구 모택동이 근교의 옛절에 있는 승려로부터 "8341"의 점괘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일의 진위는 확정하기 쉽지 않다. 나중에는 해외로까지 전해졌다. 미국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것을 주은래 총리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주은래 총리는 이렇게 해석해 주었다: "주석이 혁명에 참가한 후, 첫번째 받은 총의 번호가 8341이었다" 이 버전도 필자가 보기에는 헛소리이다. 닉슨의 방중회고록에 이런 말이 없다. 만일 사실이라면, 닉슨처럼 중국에 대하여 아무런 금기나 거리낌이 없는 인물은 책에 써놓았을 것이다.
비록 모택동이 아미산에서 점을 쳤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일생동안 아미산에 오르기를 거절한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모택동은 조국의 명산대천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생전에 적지 않은 곳을 다녔다. 남경을 시찰할 때도 동쪽근교의 자다산을 올랐고, "샛길로 가지 않는다(不走小路)"는 이야기를 남겼다; 항주에 갔을 때는 항주의 최고높은 산인 북고봉에 올랐고, "한번 간 길을 다시 가지 않는다(不走回頭路)"는 이야기를 남겼다. 여산은 더더욱 모택동이 좋아하던 산이다. 그렇다면 모택동이 왜 아미산이라는 중국명산에는 오르지않았을까? 필자의 생각에 그 원인은 '장개석을 닮지 않겠다'는 것때문일 것이다.
모택동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혁명가이고, 미신을 믿지않았다. 그러나 그도 금기는 있었다. 모택동은 장개석의 항전관과 인생태도에 대하여 반대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장개석은 아미산에서 원숭이와 놀고 있었다. 항전승리후에는 산에서 내려와서 복숭아를 따서 가졌다. 모택동은 아미산을 오름으로써 장개석과 나란히 얘기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실제로, 모택동은 아미산과 인연이 있다. 모씨의 조상은 아미산 보현대사의 경건한 신도였다고 한다. 모택동의 대에 이르러 불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문혁'때 아미현에 모택동사상학습반불교도생산조가 결성되는데 아미산의 승려들이 모택동사상을 공부한 것이다. 여기에도 무슨 인과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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