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항주의 먹거리를 논하자면 누외루(樓外樓)를 빼놓을 수 없다. 항주의 풍경을 논하자면 서호(西湖)를 빼놓을 수 없다.
서호의 가에 있는 누외루는 아름다운 풍경이 맛있는 음식을 받쳐준다. 술기운이 올라서 산책을 하고 싶으면 단교(斷橋)로 걸어가보는 것이 좋다. 백낭자와 같은 미인을 만날지 누가 아는가? 그저 멀리서 한번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서호야 서요. 언제나 나는 허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항주의 아가씨들은 여름에 가급적 흰색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이 좋다. 나처럼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 딴 생각을 할 지도 모르니까.
파주누외루, 독자막빙란(把酒樓外樓, 獨自莫憑欄, 누외루에서 술잔을 들고 혼자서 난간에 기대있지 말라). 멍청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항주에 가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현지의 풍습에 따라야 한다. 가장 좋기로는 황주(黃酒)를 마시는 것이다. 소흥(紹興)에서 난 것이 좋다. 가반(加飯)이나 화조(花雕)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장원홍(狀元紅)은 시키지 않았고, 그저 작은 여아홍(女兒紅)을 시켰다. 이름만 들어서 성적인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를 보면 내가 강산보다는 미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독한 사람도 여아홍을 한 잔 마시면,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금조유주금조취, 막사금준공대월(今朝有酒今朝醉, 莫使金樽空對月, 오늘 아침에 술이 있으면 오늘 아침에 마시고 취한다. 금술통의 술이 헛되이 달이나 마주하게 하지 말라). 누외루는 나의 요재(聊齋)이다. 나는 서호의 가에서 한바탕 취했다. 머리 속에서는 반복하여 옛날 영화 <<백사전(白蛇傳)>>이 돌아가고 있다.
아. 허선이 백낭자를 만났을 때가 어느 해이던가? 누외루 음식점이 이미 문을 열었을 때인가? 그들을 불러서 함께 앉자. 비도 피하면서, 얘기도 나누자. 무대 아래의 관중들에게 들릴지는 걱정하지 말고, 어이, 사장, 연인세트메뉴는 없나요? 촛불을 밝힌 뭐 그런 것. 기념해줍시다.
뇌봉탑(雷峰塔)은 전체 항주문화의 피뢰침이다. 서호에서 단교를 걸어올라가면, 나는 마치 허선의 화신이 된 것같다. 뇌봉탑을 보자, 무정하게 탄압받던 백낭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이미 철저히 해탈했을까? 뇌봉탑. 무너지고 다시 지었다. 언젠가 다시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잠시 안전하게 뇌봉탑의 그림자 아래에 몸을 숨겼고, 전통도덕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래도 호기심은 억누르지 못해서, 세상을 놀랄만하게 하는 애정으로 폭발한 천둥번개소리에 몰래 귀기울인다. 폭풍우는 더 맹렬하게 오라고 해라. 나는 바다제비는 아니다. 그러나 바다제비가 되고 싶어하는 관중이다.
뇌봉탑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털게(螃蟹)를 먹어야 한다. 왜 그러냐고? 전설에 따르면 대화상 법해(法海)는 털게의 껍질 속에 숨어있다고 한다. 털게는 바로 이 가짜도학선생이 밀항하는 잠수함이다.
1923년 10월 21일, 서지마(徐志摩)는 호적(胡適)등을 데리고 서호에 놀러왔다. 누외루에서 대갑해(大閘蟹)를 시켰다: "가을날의 갈대를 보면서, 누외루에서 털게를 먹는다. 조여사가 버드나무끝의 달을 보고싶어해서, 우리는 의자를 창앞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게다리를 들고 달을 보았다. 석양의 호심정은 좋았다. 달빛 아래의 호심정은 더욱 좋았다."
서지마의 성격으로봐서 그는 분명히 백낭자를 동정했을 것이다. "나는 달빛아래에 뇌봉탑의 고요하기 그지없는 그림자를 보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것만 보면, 목숨도 필요없다." 그 본인은 등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세속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했다. 지마여. 허선보다 용감했던 사랑의 화신이여. 그는 나중에 과연 자신의 백낭자를 만난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있던 작가 육소만.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육소만과 함께 도덕의 질곡을 깨부셨다. 분명히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지마와 소만은 각각 이혼하고, 1926년 10월 3일 결혼에 이른다. 결혼피로연에서, 지마의 스승인 양계초는 전혀 봐주는 것없이 연설을 통해서 이 한쌍의 신혼부부를 비판한다: "젊은이들은 왕왕 자신의 감정에 휘둘린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전통의 안전보장을 파괴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고통받는 함정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확실히 불쌍하고 가련하다...." 계몽주의자인 양계초도 아마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자신이 어느 정도 '법해'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는 영원히 허선과 백낭자의 편이다. 지마와 소만의 편이다. 누외루에서 술을 조금 마시면서 약간의 낭만적인 지난 일들을 술안주삼았다. 창을 열고 바라보니, 서호가 가슴에 들어온다. 소제(蘇堤), 백제(白堤)는 멀리 뻗어있는 젓가락과 같았다. 이번에 이 바다같은 그릇 속에서 무엇을 집을 것인가?
단교(斷橋)는 끊어져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계산할 때 발견했다. 누외루의 음식가격은 다른 곳(예를 들어 慶元樓같은 곳)에 비하여 상당히 높았다. 그냥 음식만 파는 것이 아니라, 풍경까지 파는 것같다. 그러나 그래도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보여진다.
오로지 이 한 점포 뿐이고, 분점도 없다. 누외루의 밖에는 더 이상 누각도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넓다란 호수뿐이다. 만일 일렁이는 호숫물 속에서 무엇인가 건물의 화려한 기둥이나 서까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누외루가 비친 풍경일 것이다.
서지마는 <<추서호(醜西湖)>>라는 글에서 자신을 '항주사람이라고 칠 수 있다"고 했다. 서지마의 시대에, 누외루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알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우리 누외루를 가보자. 누가 알았으랴 누외루도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은. 원래 누외루는 단층의 높지 않은 오래된 건물로 호심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몇 개의 오래되어 하얀 빛이 나는 낡은 탁자, 한 두명의 나이든 점원, 살아있는 물고기와 새우, 매끄러운 야채, 차주전자 하나, 소금에 절인 땅콩 한 접시,, 나는 매번 서호에 올때마다 시간을 내어 혼자서 이 고색고향을 맛보러 오곤 했다. 난간에 기대어 제방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잔잔한 호수물빛을 본다. 맑은 날은 맑은 빛, 눈비오는 날을 눈비오는 경치가 있다. 달이 버드나무끝에 걸리는 때면 더욱 의미가 깊다. 다행히 시끄럽지 않아서, 밤에 가면 혼자서 즐길 수 있을 때가 많다. 따뜻한 술을 마시면서, 늙은 점원과 호수의 풍경이나 물고기 새우의 시장가격을 아무렇게나 얘기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지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원래 시골들판의 정취를 풍기던 누외루가 '인테리어'를 새로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누외루가 면모를 모두 바꾸었다. 장소는 이전하지 않았지만, 3층건물에 옥상이 있는 서양식 점포가 되었다. 새로 칠한 페인트가 눈을 찔렀고, 호수에서 바라보니 건물위에는 전기환풍기가 미친듯이 돌고 있었다. 손님들도 가득 차서 비좁고, 점원들도 바뀌었다. 서양식의 긴 옷을 걸치고 있다. 원래의 그 나이든 친구들은 보이질 않았다. 한정일취(閑情逸趣)는 모조리 없어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탁자를 옮겨서 아래층의 길가에서 약간의 음식을 먹었다. 과연 요리도 모두 바뀌었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여러 해동안 누외루는 계속 바뀌고 있다. 꽃을 조각한 나무창문은 쇠창문으로 바뀌었지 않은가? 파초선은 선풍기로 바뀌더니, 다시 중앙냉방식으로 바뀌었다. 누외루가 계속 이렇게 계속되면 아마도 거의 서양음식을 팔게 되지는 않을까? 왕증기가 누외루에서 더 이상 전통의 초어(醋魚帶靶)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탄식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것은 누외루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 서호도 바뀌고, 항주도 바뀌었다.
허선과 백낭자가 만났던 단교도 일찌감치 바뀌어 버렸다. 나는 개보수하기 전의 단교사진을 보았다. 교신(橋身)은 높이 솟아 있었고, 양측에는 계단이 있었다. 다리의 중앙에는 개선문과 비슷한 석패방(石牌坊)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생겼다. 그러나, 1923년, 단교는 '대수술'을 받는다: "단교는 백제의 북쪽끝에 있다. 외호(外湖)와 후호(後湖) - 속명은 북리호(北里湖)이며 백제의 서호산 북쪽의 호수-와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바꾸었다. 다리를 편평하게 바꾸었다. 그리하여 교신이 아주 낮아졌다. 보통 다리와 차이가 없게 되었다. 단교라는 명칭이 명실상부하지 않게 되었다. 살풍경한 느낌이 든다. 역사상, 문학상 가장 유명한 백제를 자동차도로로 만들다니, 고관, 부상, 거신(巨紳) 및 자제들의 편리를 위해서 많은 속세의 나쁜 기운을 가져왔다..."(왕동령의 말) 또 다른 옛날 사진을 보면, 단교위의 석패방이 이미 철거되었다. 계단도 없애버렸다. 다리난간의 한쪽에는 전봇대를 만들어 백제 전체가 이엊진다. 단교는 자동차도로가 되었으니, 허선이 만일 길가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운명의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화이트칼라가 택시를 잡기 위해서 서 있다고 느낄 것이다.
언젠가, <<백사전>>의 이야기도 사라지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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