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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고력사(高力士)의 성과 이름은 무측천이 바꾼 것일까?

by 중은우시 2010. 7. 1.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당나라때의 유명한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본명이 풍원일(馮元一)이다. 당나라때 반주(潘州, 지금의 광동성 고주시) 사람으로, 증조부인 풍앙(馮)은 광소십팔주총관을 지냈고, 조부인 풍지대(馮智玳)는 반주자사를 지냈다. 그런데, 10살때 부친 풍군형(馮君衡)이 죄를 지어 관적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한다. 성력원년(698년)에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 무측천을 모시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이 풍원일에서 고력사로 바뀌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의 성과 이름이 바뀐 것이 무측천과 관련이 있을까?

 

고력사의 성명의 유래에 대하여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고력사는) 어려서 환관이 되어, 같은 환관인 금강(金剛)과 더불어 두 사람은 성력원년 영남토격사 이천리가 궁으로 보냈다. 무측천은 그를 좋아해서 급사좌우를 시켰다. 나중에 작은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다. 내관 고연복이 그를 가자(假子)로 받아들였다" <<신당서>>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성력초, 영남토격사 이천리가 두 어린 환관을 바치는데, 금강(金剛)과 역사(力士)이다. 무후는 그들이 튼튼하고 이해가 빠른 것을 보고, 금사좌우를 맡긴다. 나중에 죄를 지어 쫓겨나는데, 환관인 고연복이 아들로 기른다. 그래서 그의 성을 쓰게 된다."

 

<<신당서>>와 <<구당서>>의 서술내용을 보면, 고력사의 이름이 바뀐 것은 이천리(李千里) 및 고연복(高延福)과 관련이 있다. 그중 "원일"이라는 이름이 "역사"로 바뀌게 된 것은 영남토격사이며 당태종의 셋째아들인 이각의 아들 이천리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궁에 두 어린환관을 바치기 전에 이름을 지어주는데 하나는 금강으로 다른 하나는 역사로 지었고, 이렇게 하여 그는 풍력사가 된 것이다. 입궁후에, 무측천은 그를 아주 좋아했는데, 오래지 않아 그는 잘못을 범하고, 무측천이 그를 채찍으로 때린 후에 궁밖으로 쫓아낸다. 그때 환관인 고연복이 양자로 삼는다. 그리하여 '고'씨성을 얻게 되어 그의 이름이 고력사가 된다. 두 <<당서>>의 기록은 명확하다. 그의 성이 왜 풍에서 고로 바뀌었는지, 왜 이름이 원일에서 역사로 바뀌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고, 무측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71년 섬서성 포성현 금율산의 태릉 부근에서, 고력사의 신도잔비(神道殘碑)가 발견된다. 비문에는 고력사의 성명에 대하여 깜짝 놀랄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공의 원래 성은 풍이고 이름은 원일이다. 측천성후(무측천)이 고씨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역사로 고치게 했다." 이 비문의 놀라운 점은 바로 무측천이 고력사의 성과 이름을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사료와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된 첫번째 사례이다. 이후 고력사의 성명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무측천의 '사성개명(賜姓改名)'설에 대하여 논쟁을 계속하고 있을 때, 1999년 7월, 고고학계에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섬서성 고고연구소와 위남시문물국은 공동으로 고력사의 묘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땅 속에 천년을 묻혀 있던 <<묘지명>>을 찾아낸다. 그 명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공의 원래 성은 풍이고 이름은 원일이다. 측천성후가 고씨성을 하사했고, 이름을 역사로 고치게 했다" 두 비문의 내용은 이구동성으로 고력사의 성명은 무측천이 하사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일까?

 

고력사의 묘지명이 먼저 만들어졌고, 신구당서는 그 후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고력사와 관련이 가장 깊은 사람은 그의 친아버지인 풍군형과 양아버지인 고연복일 것이다. 그 두 사람의 묘지명은 아마도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역사상 정말 무측천의 '사성개명'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 두 사람의 묘지명에 그러한 내용이 나와 있을 것이다.

 

풍군형의 <<묘지명>>은 이렇게 적혀 있다: "어린 아들 역사는 우감문위대장군이다. 장군은 어려서 고씨의 집안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모두 그 성을 따랐다" 여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사의 성이 고인 것은 확실히 양부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무측천의 사성개명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고력사의 양부인 고연복의 <<묘지명>>에서도 고력사의 신세내력을 언급하면서, "부군의 아끼는 후손은 역사이다. 우리 임금이 크게 신임하는 신하이다" 여기에는 그저 고력사와 고연복이 양부양자관계라는 것만 언급하고 있지, 무측천의 '사성개명'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고력사의 친아버지 풍군형의 <<묘지명>>의 글은 당현종 시대의 승상 장열(張說)이 쓴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력사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개원40년, 장열은 뇌물죄로 고발당하여, 현종이 장열을 처결하려 할 때, 고력사가 현종에게 잘 말해주어서 장열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력사는 장열에게 대은인이다. 만일 역사상 '사성개명'의 일이 있었다면, 묘지명에 분명히 크게 기록해서 넣었을 것이다.

 

<<신당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성씨를 받는 것은 공을 표창하기 위함이다" 물질적인 하사와는 달리 성명을 하사하는 것은 제왕의 신하에 대한 정신적 포상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영광된 일이다. 만일 고력사에게 무측천이 사성을 내렸다면, 장열이 분명히 그 부친의 묘지명에 한두마디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장열이 무측천의 사성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무측천이 당나라를 찬탈한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당대종시대에 명을 받아서 세운 고력사의 묘지명에서는 대거 여황 무측천의 사성을 크게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에 대하여 기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당시의 고력사는 궁안의 보통환관에 불과했다. 무슨 큰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의 사성을 받고 개명을 받는 것은 정신적인 포상인데,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물며 무측천이 당나라를 찬탈하고 주나라를 세운 후에 사성을 내렸다는 기록은 아주 적다. 포상같은 것도 거의 없었다. 이와 반대로, 그녀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성의 듣기 좋지 않은 것으로 바꾸게 한 일은 많다. 당시의 고력사는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측천의 원수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 그에게 듣기나쁜 성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양보하여, 무측천이 고력사에게 그런 방식으로 성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성은 고력사를 징벌하거나 추하게 만드는 것으로 햇을 것인데, 고력사가 자신의 묘지명에서 이를 크게 떠들 것도 없을 것이다.

 

무측천이 고력사에게 사성을 내린 것은 포상도 불가능하고 추악화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오직 하나이다. 고력사의 <<묘지명>>의 소위 '무측천이 사성개명했다'는 설은 순전히 허구의 거짓말인 것이다. 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고력사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몸값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좋은 일은 자랑하고 나쁜 일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도 고력사의 <<묘지명>>의 작성원칙이었을 것이다. 고력사의 묘지명은 보응연간에 썼는데, 이는 당대종때이다. 당대종은 그의 할머니인 무측천을 들먹이며, 원래 존재하지도 않은 그녀의 '사성개명'을 크게 언급했는데, 이는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보응원년(762년)에 당대종이 즉위한 후, 무주에 유배가있던 고력사는 사면을 받아 경성으로 되돌아온다. 낭주를 지날 때, 그가 모시던 태상황 당현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력사는 7일간 곡기를 끊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고력사의 이런 충성스런 이미지는 당대종의 머리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같다. 그리고 당대종은 꿈 속에서 고력사를 만난다. <<두양잡편>>에는 그 꿈을 기록하고 있다: "이보국이 방자하여 임금도 무시해서, 당대종이 그를 점차 싫어하게 되었다. 잠을 자는데 꿈 속에 누각에 올랐다. 거기서 고력사가 수백의 철기를 이끌고 극으로 이보국을 찌르는 것을 보았다. 이보국은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졌다. 앞뒤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고 고력사는 북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보내어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니, '명황(당현종)의 명을 받았다'고 했다."

 

당대종의 이 꿈은 두 가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환관 이보국은 교만하기 그지없어서 마음대로 했고, 당대종도 무시했다. 둘째, 당대종은 일대현신 고력사를 생각하였다. 그는 충성심이 가득했고, 죽을 때까지도 그러했다. 당대종의 꿈속에서 고력사가 친히 이보국을 처단했다. 당대종이 정말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따지지 말자. 현실로 돌아와서 이보국은 확실히 교만하기 그지없던 간신이었고, 당대종의 마음 속에 그의 환관 이보국은 나쁜 놈이지만, 꿈속에서 만난 이미 죽은 고력사는 존경할만한 현신이었다.

 

고력사와 이보국은 시대는 다르지만 환관인 것은 같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크다. 당대종이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싫어했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대종이 고력사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공로를 기렸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고력사를 칭송한 것이지만, 암중으로는 이보국을 욕한 것이다. 그가 비석을 세우면서 할머니 무측천까지 끌어내어 '사성개명'의 일을 언급함으로써 고력사를 한껏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어쨌든 소설이 아니다. 날조한 이야기는 결국 그 마각이 드러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