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역사적으로 멀리 오랑캐에게 시집간 한족 공주는 조정이 부여한 나라를 안정시키는 중임을 수행해야할 뿐아니라, 다른 나라의 풍속의 도전도 견뎌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물과 흙이 맞지 않는 것은 그녀들이 점차 익혀나가면 적응이 된다. 그러나, 그녀들의 몸을 여러 남자들이 돌려가면서 점유하는 법도는 언어를 배우고, 짐승가죽을 입고, 날고기를 먹는 것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두세대, 여러명의 오랑캐국왕이나 칸에게 시집간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서한의 세군공주(細君公主)는 곤막(昆莫), 잠첩(岑輒, 곤막의 아들)이라는 두 오손(烏孫) 국왕에 차례로 시집갔으며, 해우공주(解憂公主)는 잠첩, 옹귀미(翁歸靡, 잠첩의 당제), 니미(泥靡, 잠첩의 아들)이라는 세 오손국왕에게 차례로 시집간다. 수나라의 의성공주(義成公主)는 계민(啓民), 시필(始畢), 처라(處羅), 힐리(頡利, 뒤의 3명은 모두 계민의 아들)라는 네 명의 돌궐칸에게 시집간다. 이와 비교하자면, 당나라의 함안공주(咸安公主)도 회흘칸 4명에게 차례로 시집간다; 그런데 앞의 세 남편은 친조손3대이고, 마지막 칸은 이전의 신하이다. 이런 기이한 경력은 중국의 화친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할 것이다.
함안공주(?-808)은 당덕종(唐德宗) 이적(李適)의 여덟째 딸이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분명히 보통궁녀일 것이다. 비록 적출은 아니지만, 그대로 그녀는 이적의 친딸이다. 대당제국의 명실상부한 정통공주인 것이다. 함안공주가 회흘로 시집가게 된 것은 당덕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다. 당덕종이 즉위할 때, 국력이 쇠약하여, 변경이 불안했다. 북으로는 오만불손한 회흘이 있고, 서쪽으로는 계속 침략하는 토번이 있었다. 대당제국은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동안 회흘칸은 "여러번 화친을 요청하고 청혼하였다. 그러나 황상은 응락하지 않았다"(자치통감.당기). 이와 동시에 토번도 여러번 당나라를 침범한다. 정원3년(787년) 오월의 평량겁맹(平凉劫盟)사건은 대당의 조야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구월, 회흘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다시 화친을 요청한다. 회흘과 토번이 하나는 여인을 원하고, 하나는 땅을 빼앗고자 했다. 북쪽과 서쪽의 변경이 모두 긴장된 상태였다. 초조해진 당덕종으로서는 할 수 없이 함안공주를 회흘에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회흘의 힘을 빌어 토번을 견제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고자 한 것이다.
오랫동안 바라마지않던 혼인을 하게 되자 회흘의 무의성공칸(武義成功可汗)은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친다.' 성의를 확실히 보인 것이다. 당덕종도 사람을 시켜 '공주화도(公主畵圖)'를 칸에게 하사한다' 여기서 '방물'은 지방특산물을 말하는 것이고, '화도'는 공주미인도를 의미한다. 회흘칸은 '실질'적이고, 공주는 '낭만'적이다. 이 전설적인 화친의 시작은 아주 좋았다. 정원4년(788년) 십월, 회흘의 재상이 천여명을 이끌고 장안으로 와서 영친(迎親), 즉 공주를 맞이하러 온다. 무의성공칸도 당덕종에게 글을 올려, "예선에는 형제였는데, 이제는 사위이니, 절반은 아들입니다. 폐하에게 만일 서융의 근심이 있다면 아들인 제가 병력을 일으켜 제거하겠습니다. 그리고 회흘(回紇)을 회골(回鶻)로 바꿔불러주십시오. 송골매처럼 재빠르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신당서) 당덕종은 기쁜 나머지, 무의성공칸을 장수천친비가칸(長壽天親毗伽可汗)으로 책봉하고, 함안공주는 지혜단정장수효순가돈(智慧端正長壽孝順可敦)으로 삼는다.
그러나, 불행은 연이어 왔다. 1년후, 즉 정원5년(789년) 십이월, 장서천친비가칸이 병사하고, 그 아들 충정칸(忠貞可汗)이 즉위한다. 회흘의 '수계혼(收繼婚)'풍습이 있었다. '부형백숙(父兄伯叔)이 죽으면, 자제(子弟)와 조카(侄)등이 그 후모(後母)를 처로 삼는다"(통전)는 북방소수민족의 풍습을 따라 함안공주는 다시 충정칸과 부부가 된다. 3개월후, 즉, 정원6년(790년) 삼월, 충정칸이 독살당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봉성칸(奉誠可汗)이 즉위한다. 풍속에 따라 봉성칸은 다시 함안공주를 처로 삼는다. 5년후, 즉 정원11년(795년), 봉성칸이 사망하고 자식이 없었다. 재상인 골졸록(骨咄祿)이 당나라에 의하여 회신칸(懷信可汗)에 봉해진다. 함안공주는 다시 한번 남편을 바꾼다. 이에 대하여, <<신당서. 회흘전>>에는 '공주가 4명의 칸을 거쳤다(主歷四可汗)"이라고 썼다(당회요 권98) 4명은 모두 오랑캐의 법을 따라서 공주를 취했다고 적었다. 정원4년에서 정원11년까지, 8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함안공주는 장수천친, 충정(장수천진의 아들), 봉성(충정의 아들), 회신의 네 칸에게 시집간다. 이리하여 한족공주가 2성, 3대, 4명의 칸에게 '수계혼'을 당한 역사기록을 보유하게 된다. 그녀가 당한 굴욕과 고통은 글로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친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하여, 그리고 변방의 안정을 위하여, 그리고 백성들과 신하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함안공주는 자신의 청춘과 애정을 희생했다. 그리고 한족여자의 일부종사, 과부수절의 혼인속박에서도 벗어났다. 이는 심명대의(深明大義), 위곡구전(委曲求全)의 정신이다. 유가사상과 윤리관념을 주입받았던 공주에게는 정말 쉽지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함안공주는 그녀의 사명을 다했다. 이번 화친으로, 당나라는 회흘이라는 전투력이 있는 전우를 확보했을 뿐아니라, 1백여년이래로 당나라와 토번의 전투에서 피동적인 국면을 타파할 수 있었다. 정원7년(791년), 토번이 다시 당나라를 침범했을 때, 회흘의 봉성칸은 '사람을 보내어 토번, 갈록을 북정에서 격패시키고 포로와 가축을 얻었다"(구당서.회흘전). 북정도호부를 되찾아오고, 토번은 사상유례없는 대패를 당한다. 이후 회흘은 여러번 토번을 패배시키고, 토번은 점차 쇠락하게 된다. 다시는 당나라에 대거 무력공격을 감행하지 못한다. 전략효과로 보자면, 함안공주는 당나라에서 공로가 가장 큰 화친공주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함안공주는 쌍방의 비단과 말의 등가무역에도 크나큰 공헌을 한다. <<사해(辭海)>>에 따르면, "회흘과 당나라의 말,비단거래는 말의 가격으로 비단을 환산한다. 이를 마가견(馬價絹)이라 한다" 원래, 회흘이 당나라를 도와서 반란을 진압했다는 공로를 내세워,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시장에서 말 1필과 비단 40필을 바꿔달라고 하였다" 말의 가격이 시장가격보다 현저히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회흘은 "비단욕심이 커서" 한꺼번에 "말 수만필을 끌고 왔다" 당나라는 그러나 말을 얻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비단만 공연히 바치는 꼴이 된다. 회흘말은 당나라의 재정에서 큰 부담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이 이를 심히 괴로워하였다.(구당서.회흘전). 나중에 말-비단거래는 평등하게 된다. <<구당서.회흘전>>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정원6년 육월, 회흘의 사신 이직가달간이 돌아갈 때, 마가견 30만필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회흘마의 가격이 확실히 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함안공주가 나서서 주선한 결과이다. 이에 대하여 백거이는 <<음산도>>라는 시에서 그녀를 칭송한 바 있다.
원화3년(808년) 이월, 함안공주는 사망한다. 함안공주는 회흘에서 21년간 생활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당나라와 회흘의 우호화친에 쏟았다고 할 수 있다. 함안공주가 사망한 후, 당현종은 '조회를 3일간 철폐했다" 그리고 그녀를 연국대장공주에 명하고, 시호를 양목(襄穆)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연국양목공주라고도 부른다. 백거이는 그녀를 위하여 제함안공주문(祭咸安公主文)이라는 글을 쓴다. 함안공주는 죽은 후에도 회흘땅에 묻힌다. 그녀는 당나라에서 유일하게 죽어서 당나라로 돌아와 묻히지 않은 정통공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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