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감진(688-763)은 중국 당나라때 일본으로 건너간 불교 고승이다. 일본인들은 그를 "과해대사(過海大師)", "당대화상(唐大和尙)"으로 불린다. 감진의 속성(俗姓)은 순우(淳于)씨이고, 양주 강양(지금의 강소성 양주)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경건한 거사였다. 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부친을 따라 대운사(大雲寺)로 참배를 간다. 자비로운 불상을 보자마자, 그는 법열의 기쁨을 느꼈고, 부친에게 불문에 귀의하겠다고 말한다. 그의 정성에 부친은 감동하여, 그를 자신의 사부인 지만법사(智滿法師)에게 보낸다. 감진은 45세에 계율대사(戒律大師)의 강좌(講座)에 올라, 강회(江淮)지역에서 계를 전했다. 그는 동남지역 계율의 종사, "강회화주(江淮化主)"로 추앙받았다. 40여년동안 감진은 속인들의 체도(剃度)를 하고, 계율을 전수했는데, 약 4만여명에 달하게 된다. 강회에서는 수계대사로 존경받는다. 불법계율이외에도 그는 범성음악, 불사건축, 조각회화, 초약의술, 서법누각등에 능했다. 기나긴 수련과정에서 감진은 견인불발의 의지와 탁월초군의 인격을 갖추게 된다.
당시의 일본은 불교계율이 완비되지 않았고, 승려들은 율법에 따라 수계를 받지 못했다. 733년(일본 천평5년), 일본승려 영예(榮睿), 보조(普照)는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로 와서 고승을 모셔서 계율을 전수받는다. 그들은 감진을 일본으로 초청한다. 감진의 제자들 중에서는 그에게 일본으로 가지말 것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으로 가려면 길이 멀고 바다길이 길다. 백명이 가면 한명도 도착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감진은 말한다: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면 생명이 뭐가 아까울 것인가? 당나라 천보원년(742년) 감진은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요청에 응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지방관리들이 저지하고, 해상의 파도와 바람때문에 4번이나 실패를 맛보게 된다.
748년, 감진은 제5차 일본밀항을 감행한다. 그런데, 선박이 해류를 잘못든데가, 거센 풍랑을 만나서, 감진 일행은 바다 위에서 14일간 표류한 후 해남도 남부에 도착한다. 감진 일행은 바다를 건너 광주로 왔다가 북으로 돌아온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피로가 쌓인데다가, 일본승려 영예가 병사하고, 감진이 아끼는 제자인 상언(祥彦)도 도중에 죽게 된다. 게다가 남방은 너무 더운 바람에 감진이 안질이 걸리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실명하고 만다.
753년, 일본의 '견당사" 후지하라(藤原靑河)일행이 귀국할 때, 특별히 양주에 들러 감진을 배알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한번 그에게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요청한다. 감진은 고령에 두눈이 실명된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배를 따라 제6차 일본행을 감행한다. 1개월여후에 성대하고 융중한 환영을 받으며 감진은 일본의 수도 나라에 도착한다. 이번에는 성공하였지만, 그는 이미 칠순을 넘긴 나이였다. 일본천황도 조서를 내려 그의 노고를 위로했고, 감진에게 감진전등법사(鑒眞傳燈法師)의 칭호를 내리고, "오늘부터, 수계전율을 모조리 화상에게 일임한다"고 선언한다. 같은 해 4월, 감진은 동대사(東大寺) 노사나전(盧舍那殿)에서 계단을 세우고, 등단하여 일본성무천황, 광명태후, 효렴천황등에게 보살계를 전수한다. 얼마후 다시 사미징수등 400여명에게 수계를 내린다. 이미 수계를 받은 일본승려 영복등 80여명도 속속 옛날에 수계받은 것을 버리고, 다시 감진에게 수계를 받았다. 일본불교는 이때부터 계율이 있게 된다. 감진은 일본에서 계를 전하고, 절을 짓고, 강학을 하고, 의술을 행하면서 10년을 살다가 원적한다.
감진의 사적은 일본의 백성들에게 대대로 미담으로 전해진다. 일본문화사학자는 심지어 그를 문화의 대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자들은 그를 위하여 조각상을 만들었고, 1200여년동안 일본에서 존경을 받는다. 1980년, 일본은 이 조각상을 중국에 일시적으로 보낸 적이 있다. 이는 중일우호관계사상의 미담이며, 문화교류사의 일대사건이다. 감진은 중일민간교류의 사자로서 중일분교문화교류에 빛나는 편장을 썼다. 그렇지만, 어떤 학자는 사료를 연구한 후에, 감진이 제5차 일본밀항시도때 실명했다는 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진원(陳垣)은 "감진화상이 일본에 도착한 후, 만년에 실명했다면 가능한 일일 수 있지만, 감진화상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실명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진원의 <<감진화살실명사질의>>) 왜냐하면, 감진이 실명했다는 내용은 <<송고승전, 감진전>>등 책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단지 일본인인 진인원개(眞人元開)가 쓴 <<당대화상동정전>>에 한 구절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고증(孤證)이므로 증거로서 불충분하다. 감진은 일본에서 수백만자의 경전을 교정보았는데, 한자도 잘못된 것이 없다. 맹인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감진화상동정전>>에서 제공한 두 눈이 실명한 원인을 보면, 영예가 병사하자, 감진이 비통하여 수일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고; 보조와 헤어진 후, 감진이 통석비척(痛惜悲戚)하였고; 상언이 병사한 후 감진이 무체비호(撫體悲呼)했다고 한다. 또한 무더위와 장기(瘴氣)에 몸이 상하고, 독화가 심장을 침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진과 같이 득도한 고승의 정신세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감진을 보통사람으로 보는 것이지 득도한 고승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보통사람의 마음으로 고승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주장은 득도한 고승의 수련을 거쳐 도달한 정신세계와 부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감진은 경건하게 여러해동안 수련한 불교도이므로 오온개공, 생사불이의 이치를 이미 깨달아, 사람의 생사에 대하여 초탈한 사람이다. 어찌 이런 생사의 이별때문에 비통하여 수일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는다든지, 통석비척하고, 무체비호할 수 있겠으며, 그로 인하여 심장에 독화가 침입하여 두 눈이 실명한단 말인가? 우리는 그의 이전의 몇번에 걸친 일본행이 모두 실패하였을 때도, 낙관적으로 정진하며, 부처가 보우할 것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백절불굴의 정신을 보였던 감진이 어찌 제5차 실패후에는 그처럼 연약한 정서를 보일 수 있었겠는가?
일부 일본학자들은 <<당대화상동정전>>에서 말한 "안광암매(眼光暗昧)"는 감진이 노인성 백내장을 앓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두눈이 실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이런 주장이 아마도 사실의 진상에 더욱 근접하는 것일 것이다. <<감진봉청경권장>>이라는 대출증(借條)은 이런 주장의 방증이 될 수 있다. 757년, 감진은 경권을 빌리기 위하여 당시 나라의 동대사에 대출증을 하나 써준다. 이것이 바로 현재 정창원(正倉院)에 보관중인 <<감진봉청경권장>>이다. 대출증의 글씨는 당나라의 풍격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글자가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새로 고쳐쓴 곳이 없다는 점이다. 나라 국립박물관의 서산후(西山厚) 연구원의 감정에 따르면, 이 글은 중국에 보관중인 감진의 관련 문헌에 나오는 것과 동일인의 필적이다. 그러므로, 일본연구원은 감진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아마도 약하기는 해도 시력은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스스로 중요한 문건은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잘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감진은 노인성 백내장을 앓았을 것이고, 완전히 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역사의 진상일 것이다. 감진이 철저히 실명했는지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일본문헌에서도 감진이 울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항상 선량한 미소로 신도들을 대했다. 감진은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하면서도 일본에서 불법을 전파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아서, 마침내 일본천평보자7년(763년) 오월 육일, 당초제사(唐招提寺)에서 좌화한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감진은 두 발을 결가부좌하고, 편안한 모습이었으며, 죽은 후 3일이 지나서도 몸에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진짜보살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불법에 대웅무외(大雄無畏), 용맹전진(勇猛前進)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감진대사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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