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조야나(曹野那): 당현종의 외국인 후궁

by 중은우시 2009. 11. 26.

글: 양국선(楊國選)

 

풍류천자 당현종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양귀비 양옥환을 떠올린다. 그런데, 당현종의 후궁들 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후궁도 있었다. 이름은 조야나이다.

 

당현종에게는 30명의 아들, 29명의 딸이 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황후비빈에는 유화비, 조여비, 전비, 황보덕의, 무혜비, 유첩여등 20명이다. 일부 비빈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데, 그중 가장 기이한 것은 "조야나희(曹野那姬)"이다. <<신당서>>의 <<제제공주전>>을 보면, "수안공주(壽安公主). 조야나희 소생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수안공주의 생모인 조야나에 대하여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동서문화교류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중앙아시아 소그드(粟特)인과 고대중국의 밀접한 관계가 날로 중요하게 드러났다.

 

위진수당시대에, "희(姬)"는 사람들이 젊은 미녀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즉 여성이라는 신분을 가리키는 일종의 칭호였다. "야나"는 외래어이다. 그리고 "조"는 중앙아시아 조국(曹國)의 소그드인들이 중국에 들어온 후 중국성으로 쓸 때 자주 썼던 성씨이다. 그렇다면, "조야나"는 중앙아시아 조국에서 온 여인인가?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조국은 중앙아시아 소그드인이 세운 나라중 하나이다. 강역은 오늘날의 타지크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다. 수당시기에, 중국은 소그드지역에서 온 사람을 그 나라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유명한 것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이다. 미씨(米氏), 사씨(史氏), 강씨(康氏), 안씨(安氏)등 나라이름으로 성씨를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曹國)에서 온 조씨들은 중국경내에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그드인들이었다. 돈황 투푸판문서에는 풍부한 성명정보가 실려있는데, 이를 통하여 후세인들이 '조'씨성에 대한 연구를 전개할 수 있었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문서에는 조연나(曹延那), 조야나(曹野那)등의 소그드인명이 나온다. 계림 서산석굴에는 당나라 경롱3년(709년)의 안야나(安野那)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조야나희의 이름은 한문으로 바꿔서 쓴 것임에 틀림없다. '조'는 조나라에서 온 소그드인들이 통상적으로 붙인 성씨이다. "야나"라는 두 글자는 소그드인들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소그드어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자, 여자들이 모두 이 이름을 썼다. 남자라면 인물이 잘 생기고, 여자라면 아주 예뻤을 것이다.

 

조야나의  이름이 한화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그녀는 한화의 정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외래의 소그드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중국식으로 지었다면 이미 한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소그드인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원성세를 이끈 당현종은 "후궁가려삼천인"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조야나라는 여인이다. 외국여인으로서 그녀는 어떻게 중국으로 왔고, 당현종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역사문헌에서 단서를 찾고, 최근의 국내외학자들이 중국으로 온 소그드인들의 문화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여성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루트는 대체로 3가지이다.

 

첫째, 실크로드의 노비매매이다. 당나라때 쿠차와 우전(于闐)에 모두 여사(女肆)를 두었다. 서주(西州)에서는 고창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노비매매시장이 아주 흥성했다. 특히 호인(胡人)노비매매가 아주 성행했다. 갈승옹은 당시 경성 장안의 노비가격은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1인당 견(絹) 250필인데, 서주에서는 40필이면 산다는 것이다. 장안은 서주의 6배였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은 호인노비를 사서 중원지역으로 데리고 왔다.

 

둘째, 장안의 소그드 호인마을의 소그드여자이다. 중앙아시아 9개성의 호족중 장안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다. 특히 실크로드를 오가는 호인은 장안을 무역목적지로 하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아예 이주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료에 따르면, 장안의 서시(西市)는 당나라 장안에서 최대의 소비시장이며 상품집산지였다. 그 주력군은 바로 호상(胡商)들이다. 그들은 점포를 열고 장사를 하기도 하고, 행상을 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모두 가족을 데리고 장안으로 와서, 처를 얻고 자녀를 낳았다. 그러다보니 많은 '토생호(土生胡)"가 나타났다. 즉, 호인혈통의 2대 혹은 3대인 이민후예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장안의 술집에는 미모의 '호희(胡姬)'중에 아마도 조씨성의 여자가 있을 수 있다. 이외에 황가이원(梨園)에는 적지 않은 호인예술가가 있었다. 조씨성의 호인여인이 악호(樂戶)의 신분으로 입궁해서 황제의 희첩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조야나희가 만일 장안에서 태어난 호인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야나'와 같은 소그드이름은 쓰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중앙아시아 소그드인들이 진공한 '호인여자' 혹은 '호선녀(胡旋女)'이다. 중앙아시아 소무구성 호인과 당왕조의 교류는 주로 '진공'과 '하사'를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횟수도 아주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

 

오랫동안 동서교류사를 연구해온 채홍생 교수는 <<책부원귀>>의 통계를 기초로 하여, 당나라때 구성호(九姓胡)는 당고조 무덕7년(624년)부터 당대종 대력7년(722년)까지 100년간, 모두 94차례에 걸쳐 진공했고, 그중 조국은 8차례였다. 특히 8세기상반기 아랍제국이 동쪽으로 계속하여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중앙아시아 각국은 중국에 도움을 요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천보4년(745년) 조국의 국왕인 가라복록(哥羅僕祿)은 당나라에 글을 올려, 명확하게 아랍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당나라의 작은 주(州)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호선녀를 진공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개원기간에 구밀국(俱密國)에서 호선녀를 바쳤다. 강국(康國)도 호선녀를 바쳤다. 사국(史國)도 여러번에 걸쳐 호선녀를 바쳤다. 미국(米國)은 한꺼번에 호선녀 3명을 바친 적도 있다. 전통관례에 따르면, 조국에서 호선녀를 바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며 몸매가 뛰어난 미녀인 호선녀는 외국여성중에서 가장 쉽게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야나는 개원연간에 조국이 진공한 호선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용모와 재주가 있어야 당현종의 총애를 받아 입궁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