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장정옥(張廷玉): 삼조원로(三朝元老)의 비애

중은우시 2010. 6. 12. 19:37

글: 양려광(楊麗光)

 

오늘은 청나라때의 삼조원로이며, <<강희자전>>, <<옹정실록>>,  및 <<명사>>, <<국사관>>, <<청회전>>의 총편관 대학사, 군기대신이었던 장정옥의 이야기를 해보자.

 

장정옥은 강희39년의 진사이다. 강희제때 형부시랑, 이부시랑등의 관직을 지낸다. 옹정제때 그는 중용된다. 옹정제가 얼마나 장정옥을 중용했는가? 사료에 따르면, 옹정5년(1727년), 장정옥이 작은 병에 걸리는데, 옹정제가 곁에 있는 시위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최근 들어 팔이 아프다. 너희는 아는가? 라고 하여 시위들이 깜짝 놀란다. 옹정이 말을 잇는다: 대학사 장정옥이 아픈데, 짐의 팔이 병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장정옥은 이처럼 옹정제로부터 중시된다. 당연히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청사고>>에 따르면, "조서를 내릴 때면 장정옥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구두로 대강의 뜻을 전하면, 혹은 황제의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고, 혹은 주렴을 사이에 두고 탁자 위에서 썼다. 글을 다 쓰면 황제에게 올려서 살펴보게 했다. 하루에도 이러기를 십수회에 이르렀다." 황제가 구두로 몇마디 말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붓을 놀려 글로 만들었으며, 하루에도 십수회나 그렇게 했다. 이를 보면, 장정옥이 황제의 뜻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옹정5년, 옹정제는 준가르를 공격하려 한다. 이에 상응하여, 옹정제는 군기처를 설립하여 그의 군무를 돕게 한다. 장정옥이 군기대신을 맡은 기간동안 군기처의 제도를 기획하고 건립하였으며, 중앙통제를 강화하고 효율을 높였다. <<청사고>>에서는 "군기처를 처음에 설립했을 때, 직제는 모조리 장정옥이 만들었다."라고 한다. 이때부터, 군기처는 청나라의 중추기구가 되어, 청나라 중후반의 역사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장정옥은 근면했다. 장정옥은 대학사, 군기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호부, 이부, 한림원도 관장했다. 또한 국사관과 기타 몇개의 수서관(修書館)의 총재관도 겸직했다. 직무가 많았고, 업무도 많았다. 옹정은 자주 그를 불렀고, 내정에서 나오면 바로 조당으로 가서 일을 했다. 그의 지시와 답변을 바라는 문건이 항상 수백개에 이르렀다. 그는 자주 가마에 앉아서, 문서를 보고 사무를 처리하곤 했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촛불을 켜고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을 처리했다. 옹정제때, 장정옥과 황제의 관계는 이미 '명목상은 군신관계이지만, 실질은 친구관계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황위계승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도, 옹정제는 죽기 3,4년전에 확정을 짓는데, 오직 장정옥에게만 보여준다. 나중에 다시 같은 고명대신인 악이태(鄂爾泰)에게도 보여주어 두 사람을 증인으로 삼는다. 장정옥에 대한 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옹정제는 특별히 유언을 남기는데, 장정옥과 악이태를 자신이 죽은 후에 "태묘에 배향(配享)"하라는 것이었다. 즉, 죽어서도 옹정제의 곁에서 있도록 한 것이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처음에는 전대의 중신들을 존중해준다. 그러나, 나중에는 갈수록 그렇지 않게 되고, 심지어 경계심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황제제도아래서, 황제는 항상 배타적이고, 항상 방비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천자는 사대부를 기본적으로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다 쓰거나, 오래 쓰거나, 쓰기 지겨워지면, 버려버리는 것이다. 낡은 신발처럼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황제와 사대부간의 취약한 관계를 보여준다.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라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장정옥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건륭제로서도 그의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건륭10년, 장정옥의 부하가 황후의 제문에서 글자를 잘못 쓰는 사건이 벌어진다. 건륭제가 크게 질책한다. 황제가 별 것도 아닌 일을 크게 문제삼는 것을 보고, 장정옥은 불안해 한다. 장정옥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옹정제때의 지위를 생각하면, 계속하여 북경에서 황제를 모시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군신간에 일단 신뢰를 상실하게 되면, 바로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은퇴하여 안휘 동성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요청한다. 동성은 그의 고향인 안경에서 60여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그가 여러번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건륭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도 있다. 건륭제는 장정옥을 중용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에 말해서는 안될 일들까지 말을 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건륭14년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건륭제는 장정옥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윤허한다.

 

장정옥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선제 옹정이 남긴 유명을 다시 언급했다. 그는 건륭제가 그의 사후에 '태묘에 배향'하겠다는 것을 글로 써주기를 부탁했다. 건륭제는 원래 그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런 요청에 불쾌해 했다. 그러나, "태묘에 배향"하는 것은 선황의 유명이므로, 건륭제는 하루종일 생각한 다음에 다음날 조서를 써서 내린다. 이 날은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이미 80세가 된 장정옥은 아들을 보내어 대신 감사인사를 하게 한다. 건륭제는 장정옥이 친히 와서 인사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낸다. 그리고는 '글을 내려 심하게 질책한다' 깜짝 놀란 장정옥은 황급히 다음 날, 눈바람을 무릅쓰고 친히 황궁으로 가서 감사인사를 드린다. 건륭제의 화는 그래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건륭은 '넌 몸이 좋지 않다면서, 오늘은 어떻게 왔느냐? 이건 나를 속이는 짓이 아닌가?" 삼조원로인 장정옥은 백발이 창창한 80대노인의 몸으로, 부득이 건륭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건륭은 그래도 용서하지 않고, 조서를 내려 장정옥의 백작 작위를 박탈한다. 놀라서 반쯤은 정신이 나간 장정옥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일년후, 장정옥은 건륭이 이미 그 일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런데, 장정옥이 건륭에게 올리는 글을 다 쓰고, 고향으로 떠나려는 무렵에 황제의 장남 영황(永璜)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난다. 장정옥은 영황의 사부를 지낸 바 있어, 사제의 인연이 있다. 그리하여 장례식에 참가해야만 했다. 초제를 지낸 후, 장정옥은 건륭에게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글을 올린다. 그러나, 황제는 돌연 대노한다. 건륭제는 '황장자가 이제 겨우 초제를 지내고, 상복도 벗지 않았는데, 장정옥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다니, 이는 황실에 대한 불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충성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정옥은 '배향'될 자격이 없다고 한다. 이때부터 건륭제는 장정옥을 폄하하기 시작한다. 건륭제는 이렇게 말한다. 장정옥이 옹정제때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비서역할이었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에는 아무런 실적이나 공적이 없다. 그런데도 짐이 그를 봐준 것은 그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저 조정에서 사람수나 채우는 역할을 했다. 건륭제는 그렇게 하고서도 장정옥을 제대로 깍아내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역대의 배향된 신하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장정옥에게 보낸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이 그들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은 배향될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삼조의 원로는 건륭제에 의하여 어른에게 야단맞는 어린아이처럼 욕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손가락끝으로 코를 가리키며 '네가 자격이 있어 없어'라고 하는 꼴을 당하게 된 것이다. 황상이 어떤 때는 흐리고 어떤 때는 맑아지면서, 80여세된 노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놀렸다. 정말 장정옥으로서는 살래야 살 수가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장정옥은 황제로부터 배향될 자격을 박탈 당한 후에, 동성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지방관리들 중에서 그에 연루될까 두려워 아무도 그를 마중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조카 한 명이 몇몇 가족을 데리고 나와서 그를 고향집으로 맞이해 들였다고 한다.

 

'배향'되기 위하여, 장정옥은 일생동안 분투했다. 그런데 이제는 수치만 남았다. 고생고생하면서 황제 3명을 모셨지만, 결국 백작의 작위도 박탈당하고, 배향될 영예도 잃어버렸다. 지금은 그저 고향에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그래도 잊지 않았다. 장정옥이 막 안정을 되찾을 때쯤, 조정에서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장정옥의 둘째아들의 장인인 사천학정(四川學政) 주전(朱荃)이 '과거시험 주재하는 이익'을 놓치기 싫어, 모친상을 당했다는 것을 속이고 과거시험을 주재하여, 어사로부터 탄핵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륭제는 이 일을 처리하면서 다시 한번 장정옥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주전이 관직에 나오게 된 것은 장정옥의 추천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중에 장정옥과 주전은 사돈간이 된다. 그리하여 주전의 일을 처리한 후, 건륭은 다시 결정을 내린다. 이전의 삼대황제가 장정옥에게 내린 일체의 하사품을 회수하기로.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삐쳐서 주었던 선물을 빼앗는 것과 비슷하다.

 

건륭15년 팔월, 흠차대신 덕보는 동성으로 간다. 장정옥은 온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문앞에 꿇어앉아 맞이한다. 그는 일찌감치, 삼대황제로부터 받은 서화, 주보, 의복기물을 상자에 넣어놓고 덕보에게 넘겨주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덕보는 십여명의 부하를 데리고 오고, 여기에 안경지부에서 이백명의 병용을 데리고 온다. 장정옥의 집에 들어서서는, 야수처럼 혹시 빠트린 것은 없는지 찾겠다며 상자를 열고, 열쇠를 부수고, 땅도 삼척이나 파본다. 장정옥의 가산을 몰수한 것이다. 덕보는 몰수과정에서 모든 글자가 적힌 물건을 뒤져본다. 서적, 글, 서신 및 쪽지까지 모두 가지고 간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덕보(德保)가 북경을 떠나기 전에, 건륭제는 그를 궁안으로 불러서 비밀리에 당부했다고 한다. 장정옥의 개인 문서와 장서를 엄격히 조사하여, 건륭제에 대한 원망의 글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내라고.

 

이들 물건을 가지고 가서 덕보는 반달동안 찾아보았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그는 장정옥에 대하여 감탄하게 된다. 사대부이자 선비로서, 누구든지 일기나 글에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장정옥처럼 삼대황제를 모시고서, 고향에 돌아오고 나면 회고록을 쓰고, 조정의 내막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장정옥의 수백통의 개인서신을 뒤져보아도 글자 한자 황제의 사사로운 일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이번 가산몰수로 조정내에서는 말이 많았다. 건륭제도 이 일은 심했다고 느꼈고, 다시 조서를 내려서 덕보가 자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처리하였고, 자신은 가산몰수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타격으로, 장정옥은 하루 종일 집안에 그저 앉아만 있고 말이 없었다. 건륭20년, 장정옥이 마침내 사망하니, 향년 83세이다. 사대부로서, 지식인으로서, 관료로서 그는 당연히 가장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인격훼손은 황권이 독보적인 시대가 만든 산물이다. 황제만이 권력을 가진 사회에서 진정으로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선비와 사대부계층도 국가의 관리자이다. 국가의 관리자들이 이처럼 즐겁게 살지않는 자들이라면, 사회에서 관리당하는 사람들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