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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우성룡(于成龍): 강희제때 동명이인의 두 봉강대리(封疆大吏)

by 중은우시 2014. 1. 14.

글: 유계흥(劉繼興) 

 

청나라 강희제때, 동시에 활약한 두 명의 우성룡이라는 독무대원(督撫大員)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성과 이름이 같을 뿐아니라, 함께 관직에 있었다. 또한 전후로 직예순무(直隸巡撫)를 맡았고, 사후에 모두 현량사(賢良祠)에 입사된다. 

 

이 두 사람중 한 사람은 "천하제일청백리"라는 미명을 얻은 산서 영녕(永寧) 사람인 우성룡이다. 자는 북명(北溟)이고, 일지기 직예순무, 양강총독등 요직을 거친다. 그는 명나라 만력44년(1616년)에 태어나서, 청나라 강희23년(1684년)에 죽는다. 다른 우성룡에 비하여 22살이 많다. 그래서 여기서는 대우성룡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영정하(永定河)의 치수를 한 요동 개주(蓋州) 사람 우성룡이다. 그는 한군 상황기 사람으로, 자는 진갑(振甲)이며, 일찌기 직예순무, 하도총독등의 요직을 거친다. 그는 1638년에 태어나서 1700년에 죽는다. 본문에서는 소우성룡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대우성룡은 대기만성형의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 숭정12년(1639년) 일찌기 향시에 참가하여 합격하고 공생(貢牲)이 된다. 다만 부친의 나이가 많아서 돌봐야할 필요가 있어 관직에 나가지는 않는다. 45세때 비로소 명경알선으로 청나라조정의 이부(吏部)에 의하여 광서 유주 나성현지현이 된다. 그후 그는 지현, 지부, 도원등 지방관을 지내고, 고위직인 양강총독까지 올라간다. 그는 부임한 곳마다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시종 청렴하게 지내고, 선정을 베풀어 선비들과 백성의 추대를 받는다.

 

강희20년 이월 초닷새, 강희제는 대우성룡을 접견하고, 그에 대하여 "당금청관제일, 실로 얻기 힘든 인물이다."라는 칭찬을 한다. 짧은 반개월내에, 우성룡은 강희제를 접견하고, 식사를 하사받으며, 은과 말을 상으로 받고, 시를 하사받는다. 실로 영예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그 해 12월, 대우성룡은 양강(강남,강서)총독에 임명되어 봉강대리가 된다.

 

대우성룡은 역대이래로 콩고물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양강총독으로 부임하여서도 청렴의 극치를 이룬다. 공무시간에, 그의 아문대문은 항상 열려 있고, 관리가 일이 있어 그를 찾을 때면 직접 침실로 들어와도 된다. 그의 탁사에는 왼쪽에 생강, 메주를 놓고, 오른 쪽에는 사건기록, 문서를 놓아둔다. 매일 거친 양식, 청채를 먹어서, 강남인들은 그를 "우청채(于靑菜)"라고 부른다. 가뭄이 든 해를 맞이하여, 그는 잡곡과 쌀겨로 죽을 만들어 온 식구가 먹었다. 손님이 와도 예외는 없었다. 손님이 그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가?" 그는 답했다: "쌀을 좀 더 남겨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좀더 구하고자 한다." 우성룡은 식사를 간단히 했고, 차를 마시는 것은 더욱 소박하여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의 종은 찻잎을 살 돈이 없어서, 매일 아문의 괴엽(槐葉)을 따서 차를 대신했다. 그런데 나무에 이파리가 없어질 정도였다.

 

대우성룡이 몸으로 모범을 보이자 그 영향하에, 강남각지에서는 기풍이 확실히 바뀌게 된다. 관료, 거상들이 능라주단을 벗고, 포의를 입고, 명문대가에서 대문을 소문루로 개축한다; 시골에서 횡행하던 소수의 깡패들도 조용히 외지로 숨어든다. 단 적지 않은 사람은 대우성룡의 위세에 눌려서 표면적으로는 개사귀정한 듯이 행동했지만, 뒤로는 극력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비방했다. 대우성룡이 부유한 강남으로 부임한 후, 위세를 부리고 향락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예전처럼 청렴하지 않다고 말하고 다녔다. 여러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것이 사실처럼 된다. 그래서 대우성룡을 일관되게 신임하던 강희제마저도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품는다. 그래서 강희제는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한다. 그리고 실제사정을 들은 후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리하여 보검으로 탁자를 내리쳐서 잘라버리며 말한다: "만일 다시 누군가가 우성룡이 탐관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의 최후이다."

 

대우성룡은 교육을 중시했다. 그가 만든 직예의 "장남서원(南書院)"과 강남의 "홍교서원(虹橋書院)"은 모두 청나라때 저명한 학부이다. 그는 또한 도적을 잡는데 능수였다. 사건처리는 공정하고 잘 판단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그를 "우청천(于靑天)"이라고 불렀다. 청나라때의 저명한 소설가 포송령은 우성룡의 사건해결과 관련한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요재지이>에 기록했다. 우성룡의 경형(輕刑), 신형(愼刑), 중증거(重證據), 중조사(重調査)의 법제사상은 중국법제사상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강희23년, 대우성룡은 강소,안휘 두 순무를 겸직한다. 얼마후에는 병사한다. 그의 개인재산은 사람들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동료들이 그의 방에 들어가서 유물을 정리하는데, 상자에는 그저 거친 실로 만든 포자 1벌과 침상머리에는 식사용의 몇 포의 콩이 있었고, 그 이외에 돈나가는 물건은 없었다. 대우성룡이 사망한 후, "백성들은 시장을 파하고 모여서 곡을 했으며, 집에서는 그의 상을 그려서 제사지낸다." 나중에 그가 관직을 지냈떤 곳 - 강녕, 소주와 황주등지에는 그의 사당을 만든다. 이 진정한 '청천'을 그리워한 것이다. 강희제는 대우성룡을 위하여 "고행청수(高行淸粹)"라는 편액을 친히 써서 내리고, "청단(淸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자태보"에 추존하여 그를 기린다. 강희제는 또한 친히 대우성룡의 제문, 비문을 작성하고 친필로 비문을 쓴다. 옹정10년, 대우성룡은 북경 현량사에 입사된다.

 

대우성룡이 직예순무로 있을 때, 소우성룡은 통주지주(通州知州)로 있었다. 대우성룡은 파격적으로 강희제에게 소우성룡을 추천한다. 그가 "청조구저(淸操久著)"하여, "가대용(可大用)"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우성룡은 강녕지부로 승진한다. 강희제는 소우성룡에 대하여도 특별히 아낀다. 남순때 특별히 그를 불러서 접견한다. 그리고 그에게 대우성룡을 배우라고 격려한다. 얼마후, 강희제는 소우성룡을 직예순무로 승진시킨다. 나중에 태자소보를 추가하고, 하도총독, 좌도어사의 직위를 내린다. 그리고 여러번 은을 상으로 내리고, 말과 안장을 내린다. 소우성룡도 강희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수리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나타낸다. 특히 그가 직예순무로 있을 때, 영정하를 치수한 것은 중국고대수리사상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사후에 역시 현량사에 입사된다.

 

소우성룡은 대우성룡과 마찬가지로, 청렴으로 조정내외에 유명했다. 강희제는 여러번 소우성룡이 관직에서 청렴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상을 내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강희25년(1686년) 이월, 소우성룡을 직예순무로 발탁하고, 그가 떠날 때, 백금 천냥, 표리 이십단을 내린다. 사월, 강희제는 대학사 명주등에게 일러, "관직에 있으면서 우성룡처럼 청렴한 자는 아주 적다. 세간에 쉽게 얻기 힘든 자이다."라고 말한다. 떠나면서 인사를 하러 온 우성룡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독무(총독,순무)중 짐이 믿을 수 있는 자는 양강총독 우성룡, 강남순무 탕빈(湯斌) 그리고 너 세 사람뿐이다."

 

대우성룡은 서예에 능했고, 시사도 뛰어났다. 그의 저술, 원고는 선후로 그의 문인과 손자 우준(于準)이 모아서 <우산주독(于山奏牘)> 7권 부록 1권과 <우청단공정서(于淸端公政書)> 8권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청단공정서>는 <사고전서>에 수록되어 명산에 보관된다. 그외에, 대우성룡이 직예와 양강에서 재직하는 동안, 일찌기 <기보통지>46권, <강남통지> 54권을 편찬하여, 현지의 정치, 경제, 문화자료를 정리보존하는데 공헌을 한다.

 

소우성룡은 일생동한 후세인들에게 많은 저작을 남긴다. 그가 강녕에 임직하는 기간동안 편찬한 <강녕부지>는 특히 진귀하다. 당시는 바로 조설근의 증조부인 조새, 조부인 조인 일가가 강녕에서 강녕직조로 있을 때이다. 소우성룡과 조씨일가는 아주 잘 알았다. 조새를 강녕의 저명한 인물로 <강녕부지>에 쓴다. 그래서 <강녕부지>는 홍학연구의 중요한 참고문헌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