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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진근남(陳近南)은 어떤 머리모양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12. 5. 7.

글: 이개주(李開周)

 

<보보경심(步步驚心)>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을 때, 나는 따라 본 적이 있다. 강희제를 여기하는 류송런(劉松仁)은 뒷머리에 변발을 남기고, 앞머리를 박박 깍았다. 모습이 약간 익숙하지 않았다. 예전을 생각해보면, 류송런은 마찬가지로 청나라궁정드르마에 속하는 무협드라마 <녹정기>와 <홍희관>에서 천지회 총타주 진근남을 연기한 적이 있다. 그는 영웅의 모습으로 기도가 비범했다. 뒷머리에 비록 변발을 기르기는 했지만, 앞머리의 머리카락은 깍아버리지 않았다. 현재의 사정(謝頂, 앞머리부터 정수리까지 대머리)같은 머리모습보다는 훨씬 익숙하다.

 

당연히 내가 사정식의 머리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청나라때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청나라때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식의 머리형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남자들은 스님이 아니고, 도사가 아니면 반드시 변발을 해야 한다. 앞ㅂ머리는 반드시 박박 밀어야 한다. 앞머리를 밀지 않으면 바로 모반죄이다. 잘못하면 목이 달아난다. 청나라 초기의 섭정왕 도르곤은 변태적인 명령을 하나 반포하는데 바로,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길 수 없고,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남기지 말라"이다. 여기서 머리카락을 남기지 말라는 것은 앞머리를 밀라는 말이다. 뒷머리에 변발을 하느냐 마느냐는 그 다음 문제이다. 그래서 <보보경심>에서 강희의 머리형은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역사에 훨씬 근접했다. <녹정기>와 <홍희관>의 진근남의 머리 형은 비교적 쿨하지만, 역사에는 어긋난다.

 

영화드라마는 예술이다. 역사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재미있게 즐기면 된다. 호소력이 있으면 된다. 예를 들어 드라마전개상 필요하면 우리는 <보보경심>의 강희처럼 금발벽안으로 하거나, <녹정기>의 진근남처럼 국제적인 축구스타 베컴같은 머리형을 해도 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럴 수 없다. 역사상의 인물이 어떤 머리형이었는지에 따라 역사작품은 반드시 그런 머리형을 해야 한다. 이것은 허구여서는 안된다.

 

역사상의 강희제가 어떤 머리형이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화가가 그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고궁박물원에는 이런 화상이 보관되어 있고, 찾기가 어렵지 않다. 역사상의 진근남이 어떤 머리형이었는지를 알려면 고증을 좀 해야 한다. 내 생각에 이런 고증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김용은 무협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인불식진근남(爲人不識陳近南), 편칭영웅야왕연(便稱英雄也枉然)"(사람이 진근남을 모르면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우리가 진근남의 머리형도 모른다면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근남은 그저 김용 선생이 허구로 만들어낸 예술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역사상 그런 사람은 아예 없다"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첫째, 천지회의 개창자는 아마도 진근남이라고 부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천지회는 역사상 정말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 진근남이 예술적인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그의 이런 예술이미지는 김용선생이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천지회 회원들의 원시기록을 재가공한 것이다.

 

천지회는 모든 방회중 중국역사에 영향이 가장 큰 것이다. 그 보급지역은 아주 넓다. 청나라 중후기의 광동, 복건, 절강, 호남, 호북, 운남, 귀주, 대만 내지 멀리는 동남아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까지 모두 천지회의 조직이 활동했다. 존속기간도 아주 길었다. 오늘날 어떤 지역, 대만과 홍콩같은 곳에는 천지회의 제자들이 있다. 천지회에서 파생되어 나온 방회도 아주 많다. 김용의 또 다른 무협소설인 <서검은구록>에서 묘사된 반청조직 "홍화회"도 역사상 진실로 존재했고, 기실 천지회의 한 갈래이다. 청말에 강남에서 의거하고 상해를 점거한 "소도회"는 천지회의 변종이다. 신해혁명 전날 혁명당인 도성장이 창건한 '용화회'는 가로회의 조직개편인데, 가로회의 조직형식은 직접 천지회에서 나왔다. 그리고 홍콩의 흑방영화에 나오는 방회인 "홍흥(洪興)"과 "홍문(洪門)"이 있는데, 전자는 천지회의 여맥(餘脈)이고, 후자는 천지회 창건시의 별칭이다.

 

건륭년간과 가경년간, 청나라조정은 천지회 구성원들을 연속하여 체포한다. 이들의 공술을 보면, 천지회는 강희30년을 전후하여 창립되었고, 창립자의 이름이 바로 진근남이다. 그러나, 이 진근남은 정성공의 부하가 아니고, 지혜가 많은 승려였다. 만일 이 설명이 사실이라면, 역사상의 진근남은 머리카락이 없었을 것이다. 앞머리만 박박 민 것이 아니라, 뒷머리까지 박박 밀고 변발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