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광원(徐廣源)
1. 소서릉(昭西陵)은 옹정제가 만든 것이다.
청나라 황후릉내에 매장된 황후는 모두 자신의 남편인 황제가 매장된 후에 죽은 황태후들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황후릉은 모두 아들뻘인 황제가 건축하게 된다. 청나라의 7개의 황후릉 중에서, 5개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가경제의 효화황후의 창서릉은 그녀의 손자인 함풍제에 의하여 건립된다. 그런데, 효장문황후의 소서릉은 아주 특수하다. 그녀의 증손자인 옹정제가 건립한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유일할 뿐아니라, 중국역사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강희제의 관은 옹정원년(1723년) 구월 초하루에 정식으로 경릉의 지궁에 묻힌다. 매장 21일전인 팔월 초아흐레에 도찰원좌첨도어사 진윤공(陳允恭)은 효장문황후의 관을 신속히 땅에 묻어서 안식처를 찾게 해야한다고 주청드렸다.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위로는 하늘에 있는 영혼이 편안하고, 아래로는 인과 효의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다'고 했다. 효장문황후의 관은 강희27년(1688년)부터 준화 창서산 조릉의 잠안봉전(暫安奉殿)에 모셔진 이래로 옹정원년(1723년)까지 이미 36년의 시간이 흘렀다. 효장문황후의 능침문제는 강희제를 35년간이나 괴롭혔고,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이것은 아주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옹정제가 막 즉위하자, 이 문제는 자신이 직면하게 된다.
옹정제는 역시 옹정제이다. 그는 진윤공의 건의를 받은 후, 즉시 효장문황후의 능침문제를 해결하는데 착수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능을 어디에 만들 것이냐는 문제이다. 홍타이시(청태종)의 소릉(昭陵) 부근에 만들 것인가? 아니면 관내 준화의 효릉(孝陵) 부근에 만들 것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옹정제는 미리 생각한 바가 있었다. 옹정2년(1724년) 이월 초닷새, 그는 여러 왕공대신을 궁으로 불러모은 다음 그들에게 효장문황후의 능을 만드는 문제를 얘기한다. 그는 먼저 효장문황후의 위대한 업적과 숭고한 성덕을 찬양한다. 그리고 효장문황후가 임종때 자신을 효릉부근에 묻어 자손들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는 유언도 언급한다. 그 후에 <<예경>>에는 합장은 고대부터 계속된 것이 아니다. 전왕조의 대유학자도 말한 바 있다. 신령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합장을 하거나 합장을 하지 않거나, 이는 명분의 문제일 뿐이다. 현재 태종은 이미 소릉에 묻힌지 오래 되었으니, 소릉부근에 능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합장은 아니다. 효장문황후의 관은 존화의 잠안봉전에 모셔진 이래로, 성조인황제(강희)의 재위기간이 길었고,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들도 잘살았으며, 자손도 많이 늘어났다. 이를 보면, 효장문황후의 하늘에서의 영혼은 아주 편안히 지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효장문황후가 임종시에 여러번 자신을 효릉부근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성조인황제는 이미 유언을 쫓아 효장문황후의 관을 그곳에 삼십여년이나 놓아두었다. 성조인황제는 전체 강산과 사직을 나에게 맡겼다. 효장문황후의 능침문제는 큰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일을 정과 이치에 맞게 처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 너희 여러 왕공대신들은 이 일을 잘 의논해봐달라. 그리고 정확한 의견을 나에게 보고해달라.
비록 옹정제가 유지에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향은 분명했다. 그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그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은 누구든지 눈치챌 수 있었다. 여러 신하들은 진지하게 토론한 후, 이월 이십칠일, 강친왕 순안이 앞장서서 황제에게 신하회의의 결과를 보고한다. 신하들의 논의결과는 이러했다: 성조인황제가 유언을 받들어, 효장문황후의 관을 잠안봉전에 30여년간 모신 이래로, 성조의 재위기간이 길었지만, 천하가 태평했고, 백성들은 잘살았으며, 국가는 창성했다. 이것은 잠안봉전이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풍수의 명당이다. 이 곳에 능을 만들어야 한다. 신하들의 의견은 옹정제의 뜻에도 맞았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이 보고서에 붉은 색 붓으로 회신한다: "맞다. 바로 날짜를 택일하여 시공하라." 강희제가 30여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옹정제는 단칼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옹정2년(1724년) 십일월 이십일일, 정식으로 효장문황후의 능은 "소서릉"으로 명명된다. 옹정제는 효장황후의 능을 건립하는 방법과 이유는 총명하고 과단성있었다. 일처리는 탄복할 만하다.
잠안봉전을 소서릉으로 개조하는 공사는 옹정3년(1725년) 이월초사흘에 정식으로 착공한다. 이월십삼일에 소서릉을 건축하는 일에 대하여 관리들을 영릉, 복릉, 소릉, 효릉, 효동령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서 알리게 한다. 옹정제는 특별히 제문을 짓는 한림관들에게 말했다: 잠안봉전을 소서릉으로 개축하는 일은 내가 나의 황부의 효심을 헤아려서 하는 것이다. 효장문황후의 유언에 따라서 처리해라. 그래서 경릉에 고하는 제문은 단독으로 썼다. 이 일의 앞뒤 경위를 모두 제문에 써놓은 것이다. 이 제문의 사료가치는 높다.
소스릉은 잠안봉전을 개축한 것이므로, 대전, 동서배전, 궁문, 담장등이 모두 건축되어 있었다. 다시 지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공사진도는 아주 빨랐다. 그해 연말에 완공한다. 옹정3년(1725년) 십일월 십삼일 옹정제는 친히 소서릉에 가서 제례를 지낸다. 같은 해 십이월 초열흘, 정식으로 효장문황후의 관을 지궁에 넣는다. 37년간 놓여있던 관은 마침내 흙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구천지하의 효장문황후는 분명히 아주 기뻐했을 것이다.
2. 소서릉에 얽힌 전설들
효장문황후는 청태종의 황후이다. 원래 청태종과 소릉에 합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합장되지 않았다. 소서릉은 원래 소릉의 곁에 세워져야 하는데, 1000여리나 떨어진 관내의 준화에 세워진다. 청동릉에는 5개의 황제릉과 3개의 황후릉, 5개의 비침(妃寢)이 있는데, 이는 모두 풍수장(風水墻)의 안에 만들어졌다. 오직 소서릉만 풍수장의 바깥에 만들었다. 여기에 수백년동안 태후하가(太后下家, 태후가 시집가다)의 전설이 전해지면서, 소서릉에는 여러가지 기이한 전설이 나논다.
어떤 사람은, 효장문황후가 자신의 남편인 청태종과 합장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시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남편과 구천지하에서 만나볼 면목이 없어서, 부득이 멀리 떨어진 관내의 준화에 묻혔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근거가 있는가? 만일 효장문황후가 정말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다면, 이 주장이 근거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시집을 갔는가? 이것은 "청초3대의안"중 첫째의 의안(疑案)이다. 이미 수백년간 논쟁이 되어 온 것이지만, 사학계에서는 정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다수인들은 효장문황후가 시집가지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이 전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효장문황후는 청태종이 죽은 후에 적막함을 참지 못하고, 고독함을 참지 못하여 시동생인 도르곤과 결혼했기 때문에, 청나라황실의 체면을 구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능을 청동릉 대문 바깥에 만들어서, 그녀는 능을 지키는 호위역할을 하고, 대대손손 자손들을 위하여 능의 문을 지키게 함으로써, 징벌한 것이라고 한다.
이 주장도 태후가 시집을 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근거가 박약하다. 그러므로 이 주장도 성립되기 힘들다. 설사 효장문황후가 정말 도르곤에게 시집을 가서, 황실의 체면을 구기고 먹칠했다면, 첫째, 황실이 거액의 들여서 그녀를 위하여 이렇게 거대한 능을 만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둘째, 황실 내부의 스캔들을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를 굳이 외부에 표시나게 하여 천추만대 웃음거리가 되기를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속담에 '집안의 추한 일은 외부에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황실이 그런 멍청한 일을 저지르겠는가?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도 믿을 것이 못된다.
어떤 사람은 효장문황후가 도르곤에게 시집간 후, 예친왕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청태종의 황후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대청 애신각라황제의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히 그녀는 대청황실의 능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그래서 소서릉을 청동릉 풍수장 바깥에 만들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 주장은 앞의 두 가지와는 다르다. 태후가 이미 시집을 갔다는 전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도 성립되기 힘들다. 하물며, 첫째, 대청국황제는 강희부터 선통까지, 효장문황후가 청나라에 기여한 공헌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찬양해왔다. 그녀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다. 매번 동릉에 갈 때면 먼저 소서릉에 가서 효장문황후를 뵈었다. 둘째, 대청황실은 그녀를 "효장문황후"라고 부른다. "문(文)"이라는 것은 청태종의 묘시(廟諡)이다. 이것은 대청황실이 그녀를 청태종의 황후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를 도르곤의 왕비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효장문황후의 신패와 청태종의 신패는 태묘에 있다. 봉선전에서 같은 곳에 모셔져 있다. 수황전에는 효장문황후의 화상이 청태종의 화상과 나란히 걸려 있다. 이를 보면 그녀는 황가능원에 묻힐 자격이 충분하다.
위에서 말한 바를 종합하면 그녀가 자격이 없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능원에 묻힐 자격이 충분하다면, 왜 그녀를 능원 안에 모시지 않았는가?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그녀의 능이름을 먼저 봐야 한다. "소서릉"이다. 황후릉은 황제릉의 부속능침이다. 자신의 독립한 이름은 없다. 그저 자기 남편의 능이름과 자기능이 남편의 능에서 어느 방위에 있는지를 가지고 명명될 뿐이다. 소서릉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소서릉은 청태종의 소릉의 부속능침이다. 둘째, 소서릉의 묘주인은 청태종의 황후이다. 이는 바로 소서릉이 서릉으로부터 1000여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소릉과 같은 체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릉은 순치제의 효릉을 주릉으로 한 또 다른 황릉체계이다. 소릉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체계인 것이다. 두 체계의 능은 서로 섞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효장문황후의 소서릉은 청동릉의 능원내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3. 소서릉의 비밀
전설같은 묘주인, 기이한 능침배치는 소서릉에 전설적인 색채를 더해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
효장문황후는 강희26년 십이월 이십오일(1688년 1월 27일)에 사망한다. 임종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그녀는 청태종의 능이 안장된지 오래되었으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움직일 수 없고, 순치제와 강희제가 그립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을 준화의 효릉부근에 묻어달라고 한다. 효장문황후의 유언은 강희제에게 난제를 던져주었다. 유언대로 하면, 이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에 어긋난다. 조상의 법도대로 하면, 조모의 유언에 어긋난다. 현엽은 역시 강희대제이다. 그는 금방 미봉책을 생각해낸다. 준화의 동릉에 빈궁을 하나 만들어, 조모의 영구를 먼저 그 곳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방법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한 지 35년이 지나서, 강희제가 죽고난 후에 비로소 능을 건설하게 된다.
왜 강희제는 조모의 능을 만들지 않았을까? 잊어버렸던가? 정무에 바빠서, 시간이 없거나, 돌보지 못해서인가? 모두 아니다. 강희제는 조모 효장문황후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평생 잊지 않았다. 효장문황후의 관을 모신 후 35년동안, 강희제는 30번이나 동릉으로 가서 조모를 위하여 제사지냈다. 그가 어찌 조모의 능을 만드는 것을 잊겠는가? 강희제가 일생동안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은 강희12년에서 20년의 8년간 삼번의 난을 진압할 때였다. 바로 이러한 긴장된 기간에도, 효성황후를 안장하고, 그는 경릉을 만들게 했다. 하물며 효장이 죽은 후 얼마되지 않아, 강희제는 인헌황태후(효혜장황후)를 위하여 효동릉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강희제는 조모의 능을 만드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더더구나 정무에 바빠서 돌볼 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강희제는 조모의 능을 만들지 않았는가?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자료도 찾을 수 없다. 필자는 강희제는 확실히 조모의 능을 건립할 정당한 명분을 찾지 못했던 것같다. 그는 뒤로 미루는 방법을 썼다. 시기가 성숙되면 이 골치아픈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같다. 나중에 일어난 사실을 보면, 이것이 증명된다. 옹정제는 즉위후, 가볍게 효장의 능침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물론 필자의 추측이다.
도대체 왜 강희제가 35년간이나 효장문황후의 능을 만들지 않았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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