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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롱커도(隆科多): 강희제 유조의 유일한 목격자

by 중은우시 2009. 11. 20.

글: 서항걸(徐杭杰)

 

강희제 말년에 후계자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여러 황자(皇子)들은 형제의 정은 일찌감치 잊어버렸고, 독랄한 수단을 속속 사용했다. 강희제가 유조(遺詔)를 남겼는가 아닌가? 그는 정말 황사자(皇四子)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는가? 유조는 고쳐진 적은 없는가? 강희제처럼 영명한 군주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자금성내에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은 오직 대신 1명뿐일 줄은. 그에게는 의문점과 수수께끼가 가득하다.

 

선교가 엄가락(嚴嘉樂, Karl Slavicek)의 서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윤진(胤, 황4자)이 등극한 후, 황14자(允)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들어왔다. "먼저 선제의 유조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황4자의 통치권을 박탈하고자 하였다. 그는 구문제독(롱커도)를 엄히 질책했다. 왜냐하면 이 자가 선제(강희제)의 유조의 '유일하면서 의심스러운 목격증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황태후(황4자와 황14자의 생모)가 나서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구문제독을 죽여버리고, 자신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후는 다음해 6월(옹정2년 오월)에 사망한다." 이 서신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일부 선교사들 특히 청나라조정에서 일하던 일부 선교사들의 옹정승계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신에서 롱커도는 선제유조의 '유일하면서 의심스러운 목격증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7명의 황자가 함께 유조를 받았다는 설을 부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14자 윤제가 북경으로 돌아온 후, 강희제의 유조에 관한 사실을 먼저 윤지(允祉), 윤사(允)등 일곱 황자에게 물어야지, 롱커도를 붙잡고 따질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강희옹정교체기의 황위계승과정에서 보군통령 롱커도가 핵심인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보군통령은 구문의 열쇠를 관장하고, 팔기보군, 경영마보병을 통솔하며, 금령을 반포하고, 황제의 가마의 앞길을 열며, 황제의 재궁을 지키고, 부근성내의 숙직을 통할한다. 익위 1인, 협위, 부위 각 2인이 있고, 단내에서 숙직한다." 강희제는 창춘원에서 재계할 때, 롱커도 본인이 주변을 지키는 외에, 주위에서 경비를 담당하는 자들은 모두 롱커도의 부하들인 것이다.

 

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십삼일 술각, 강희제는 심혈관병이 돌연 발병하여 급사한다. 임종전에 말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문저 근시태감의 보고를 받은 자는 분명히 보군통령 롱커도일 것이다. 강희제는 정양중이고 재계중이었으므로, 거의 외부와 격리된 상황하에서 사망한 것이다. 후계자는 아직 공포되지 않았다. 윤제는 천리 멀리 떨어진 감주에 있다. 이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다. 롱커도가 역사무대의 중심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왕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는 강희제가 급사한 소식을 어느 황자에게 먼저 전하느냐에 따라, 그 황자는 그 순간 곧 사라져버릴 호기를 잡게 되는 것이다. 전위유조를 허위로 만들면 황권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사태발전으로 분석하면, 롱커도는 태감의 비밀보고를 받은 후, 이 소식을 엄밀히 봉쇄하는 동시에, 즉시 황4자 윤진에게 통보했다. 윤진은 즉시 결단을 내려, 강희제가 황휘후계자를 시종 공표하지 않은 사실을 이용하여, 롱커도가 이미 전위유조를 받았다고 얘기하면서, 여러 황자들에게 창춘원으로 신속히 모이라고 통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희제가 이미 죽었다고 알리고, 롱커도가 소위 전위유조를 발표한다. 비밀입저계획은 이것으로 물거품이 된다. 윤진이 기선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롱커도는 무장병력을 가지고 황위계승을 도왔다. 강희제가 심혈을 기울여 배양한 후계자인 윤제는 졸지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롱커도가 강희제가 급사하고, 황위가 비어있는 천균일발의 순간에, 윤진에게 기울어진 것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윤사, 윤지등의 지지자들의 실력이 너무나 두터웠다는 것도 있다. 그들의 관직은 롱커도보다 높은 자가 아주 많았다. 그가 윤지, 윤사를 도와서 황위를 얻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그들 이익집단에서 첫손꼽는 인물이 되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태자가 폐위된 후 그는 반태자당과는 갈수록 소원해졌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반태자당이 멸시하고 미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윤진집단은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두드러진 인물이 많지 않았다. 만일 윤진을 도와서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면, 신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 롱커도의 이러한 목적은 옹정제의 즉위초기에는 확실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상당히 짧았다.

 

옹정원년(1723년) 정월 초이틀, 천섬총독 연갱요는 <<회진군무사정청선구고밀정절>>을 올린다. 옹정제가 주비(朱批)한 글을 보면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다음으로, 외숙 롱커도, 이 자는 짐과 네가 이전에는 깊이 알지 못했었는데, 정말 잘못이었다. 이 자는 진정 성조황고의 충신이고, 짐의 공신이며, 국가의 양신이다. 진정으로 당대 최고로 뛰어난 보기드문 대신이다."

 

이때는 강희제가 죽은 때로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이 기간동안 롱커도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유일하게 신황제 승계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서는, 롱커도가 돌연, 신황제에 의하여, "충신" "공신" "양신" "당대최고로 뛰어난 보기드문 대신"으로 불릴 리는 없는 것이다.

 

옹정5년(1727년) 십월, 조정은 롱커도가 41가지 중죄를 저질렀다고 공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망녕되게 제갈량에 비교하여, 백제성에서 명을 받은 날이 바로 죽음이 도래한 때이다라고 말하였다."는 것이 있다. 이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강희제가 임종전에 윤진에게 황위를 넘겨주는 일은 아마도 윤진과 롱커도가 함께 날조한 것일 것이다. 소위 '유조'는 롱커도가 공포한 것이다. 자연히 이렇게 한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멸족의 위험을 안는 일이다. 윤진이 즉위한 후, 한때 큰 총애를 받았던 롱커도가 공로를 내세워 건방지고 교만해졌다. 권력남용도 심했다. 그리하여 점차 윤진의 반감과 경계를 산다. 옹정2년(1724년), 3년(1725년)의 사이에, 롱커도는 군신관계의 변화를 깨닫는다. 옹정3년(1725년) 정월, 롱커도는 보군통령의 직위에서 해임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윤진이 윤사, 윤당(允)집단을 타격하는 각종 조치가 계속 강화되는 것을 목격한다. 윤진의 마음이 악랄하고 수법이 악독하며, 각박하고 은혜를 베푸는데 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윤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윤사등의 처지를 보고 자신의 미래도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려움과 걱정도 있고, 불만도 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명을 받은 날이 바로 죽음이 도래한 날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억울함과 불만을 간접적으로 토로했다.

 

만일 롱커도가 7명의 황자들과 같이 강희제의 전위유조를 받았다면, 여러 황자들에 비하여 그는 덜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찌 이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까? 하물며 윤진은 이미 즉위하였고 대권을 장악하였는데, 롱커도가 무슨 리스크를 더 부담해야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