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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견황후: 요나라 황후중 불청객

by 중은우시 2009. 9. 11.

글: 유병광(劉秉光)

 

거란(契丹)의 야율씨(耶律氏)는 통혼에서 불변의 법칙이 있었다. 즉, <<요사. 천조기>>에 쓰여진대로 "야율씨와 소(蕭)씨는 대대로 사돈관계이며, 고락을 함께했다(耶律與蕭, 世爲甥舅, 義同休戚)". 야율아보기의 4대조인 사라더(薩剌德)때로부터 야율씨와 술률씨(述律氏, 나중에 蕭씨로 개성)는 공고한 사돈관계를 건립한다. 이런 정치적인 색채를 지닌 통혼모델은 야율씨의 거란사회에서의 통치를 공고히 해주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소씨가 요나라황후를 독점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낯선 여인이 나타난다.

 

<<요사. 후비열전>>을 보면 생전에 황제에 의하여 황후에 오른 여인은 모두 열두명이다. 그들은 순서대로: 태조황후 소(술률)씨, 태종황후 소씨, 세종황후 소씨, 세종비 견씨, 목종황후 소씨, 경종황후 소씨, 성종황후 소씨, 성종황후 소찌, 광종황후 소씨, 도종황후 소씨, 도종혜비 소씨, 천조황후 소씨. 여기에 있는 견씨(甄氏)가 바로 요하유역에 들어온 불청객이다. 그녀의 출현은 요나라 조야를 발칵 뒤집어 놓았을 뿐아니라, 동시에 야율씨와 소씨간의 통혼전통을 교란시켰다.

 

이외에, 이 낯선 여인은 요나라 역사 내지 중국역사상 여러가지 기록을 갈아치운다. 그녀는 요나라의 유일한 이민족황후이고, 요나라의 유일한 이성(異姓)황후이며, 요나라에서 유일하게 행군도중에 책봉된 황후이다; 요나라에는 두 황후를 동시에 세운 경우가 일어났는데, 바로 그녀가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황제보다 12살이나 많았다. 중국역대황제의 '연상황후'중에서 연령차이가 가장 큰 경우이다. 그녀와 황제, 황태후 및 또 다른 황후, 이 4명의 최고위층 인물이 함께 죽음을 당하는데, 이것도 중국역사상 공전절후의 일이다.

 

이 불청객은 도대체 누구인가? 무슨 내력을 지녔는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요사. 세종본기>>에 최소한 '모년 모월 모일에 황후로 책봉했다"는 말 정도는 나와야 한다. 그러나 사관은 이 황후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요사. 후비열전>>에도 간략히 몇 마디만 적어 놓았다: "견씨, 후당(後唐)의 궁인(宮人). 자색이 뛰어났다. 황제가 태종을 따라 남정(南征)시에 얻었고, 총애가 두터웠다. 영왕 지몰을 낳았다. 즉위하고, 황후에 봉해진다. 경종이 들어선 후 두 황후를 의무여산에 매장하고, 능침의 곁에 묘를 만들었다." 일대황후로서, 그녀의 관적도 불명확하고, 내력도 불분명하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확실히 견씨는 얼굴이 가리워져 있는 인물이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필자는 <<거란국지>>를 살펴보았다. 이 책에는 오대남인이 기록한 거란자료를 수룩하고 있어, 참고가치가 있다. <<거란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의 황후 견씨는 한족 땅 사람이다. 후당 로왕(潞王)때의 궁인(宮人)이다. 세종이 태종을 따라 남으로 대량(大梁)에 들어갔을 때, 궁중에서 그녀를 얻었다. 당시 황후의 나이 41세이다.....의무여산에 묻혔고, 능을 세우고 그 곁에 묘를 만들고 비를 세웠다." <<요사>>와 대조하면, '후당' '궁인' '남정'등이 서로 들어맞는 외에, <<거란국지>>에서는 견씨가 한족이라고 기술할 뿐아니라, '노왕'의 궁인이라고 하고, 요세종이 '대량'의 궁중에서 얻었다고 한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대량은 개봉의 별칭이다. 변량, 변경, 동경이라고도 한다. 오대때, 후량, 후진, 후한, 후주가 연이어 도읍으로 삼았다. 오직 후당만 낙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야율완은 요태종을 따라 남정에 한번 참가한다. 즉 회동9년(946년)에 후진(後晋)을 공격하는 전쟁이었다. 또한, 야율완이 이번 남정에 따라간 것은 '부친의 유골'을 회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점은 <<요사. 지리지>>에서도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대동원년(947년), 세종은 친히 인황왕의 영가를 모시고 변경에서 돌아왔다"이를 보면 야율완이 견씨를 얻은 것은 후당이 아니라 후진임을 알 수 있다.

 

<<요사>>와 <<거란국지>>에서는 모두 견씨를 후당의 궁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입궁한 시기가 후당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견씨는 어느 해에 후당의 궁인이 되었을까? <<거란국지>>에는 노왕을 언급하고 있다. 노왕은 바로 이종가(李從珂, 885-936)이다. 장흥4년(933)에 노왕에 봉해진다. 다음해(934)에 황제가 된다. 이 해에 견씨(906-951)는 이미 29살이다. 만일 입궁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아이도 있을 나이이다. 그리고 이종가의 처인 유씨는 성격이 강퍅했고, 이종가도 아주 꺼려했다. 그러므로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종가가 황제가 되기 전에, 견씨는 이미 입궁해 있었다. 후당은 모두 4명의 황제가 있는데, 순서대로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이다. 이종후는 전전긍긍하며 반년가량 황제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독주를 마시고 황제권력을 빼앗긴다. 그가 다른 생각을 가졌기는 힘들다. 이사원은 검박하게 생활했고, 성색음락을 즐기지 않았다. 즉위후에 바로 명을 내려서, "후궁 100인, 환관 30인, 교방 백인, 주방 50인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하고싶은대로 하게 하라"고 한다. 사적에 보면 그가 다시 궁녀를 뽑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이존욱만이 견씨를 후당의 궁인으로 만들어주었을 수 있다.

 

동광년(926년), 낙양의 궁전이 완공되고, 이존욱은 "환관 왕윤평, 배우 경진채에게 명하여 민간여자를 골라오라고 시킨다. 멀리는 태원, 유주, 진주에서 후궁을 충원하니 3천명이 넘었다" 20세인 견씨는 분명히 이때 입궁하였을 것이다. 다음해 4월, 이존욱은 낙양에서 피살된다. 혼란중에, "궁인들이 많이 도망치고 흩어졌다" 견씨가 만일 도망쳤다면, 이사원의 '후궁 100인'중 하나에 들지 못했을 것이고, 후당이 망하고 후진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야율완의 전리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가 태종을 따라 남정할 때 얻었다'는 기록은 다시 쓰여져야 했을 것이다.

 

낙양의 병변때, 견씨는 기회를 틈타 도망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그녀의 고향은 낙양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견씨는 어디 사람일까? 사적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필자가 고증해본 바에 따르면, 견씨성은 주로 하북의 중산과 하남의 여주에 집중하여 살고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후당의 강역범위내이다. 여주는 낙양의 동남쪽이고, 겨우 9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곳은 비교적 가깝다. 중산은 옛이름이고 후량때는 진주(鎭州)라고 불렸다. 후당때는 다시 진정부(眞定府)로 승격된다. 낙양과는 5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현재 하북의 정정, 무극 일대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견씨의 고향은 분명히 이곳일 것이다. 조비의 견황후와 그녀는 같은 고향 사람인 것이다.

 

역사는 왕왕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 두 견황후는 모두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모두 전쟁의 전리품으로 승자에게 넘어간다. 모두 자기의 남편인 황제보다 나이가 많다(견락은 조비보다 5살이 많았다), 모두 남편이 있었던 재혼녀이다. 견락의 전남편은 원소의 아들인 원희였고, 견씨의 남자는 후당과 후진의 황제였다. 이것이 아마도 사관들이 견씨에 대한 기록을 쓸 때, 우물우물하고, 말하기 꺼려한 근본원인일 것이다. 분명히 두 왕조의 궁인인데, 하나의 왕조인 것처럼 적었고; 분명히 '궁중에서 얻었는데' 그냥 '얻었다'고 적었다. 보기에 사관들이 '궁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같다.

 

궁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동한 ,북위의 후궁제도에는 모두 궁인이라는 등급이 있었다: 당나라때의 대종, 덕종, 헌종, 의종은 모두 궁인소생이다. <<요사. 후비열전>>에도 "개태5년, 궁인 욕근이 흥종을 낳았다. 황후가 양자로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궁인은 지위가 비교적 낳고 봉호를 받지 못한 비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다음 번 황제를 낳을 수도 있다. 견씨는 22년간 궁인으로 지냈는데,그 동안 그녀가 아이를 낳았는지 아닌지는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6명의 황제를 모셨다. 하물며 이존욱과 석중귀는 아주 음탕한 자들이었다.

 

사관은 분명히 이러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의로 '후진'을 빠트렸다. 그리하여 견씨의 죄악을 절반으로 줄여주엇다. 이렇게 하여 요나라황제의 체면을 세워준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가 이 나이들고 궁인출신의 여자에 대하여 계속하여 총애하고 사랑을 주고 황후로 책봉하는 것을 모고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을 내뱉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 세종본기>>에 세종에 대하여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는 세종을 그저 중등의 재주를 지닌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모두 틀렸다. 야율완은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대책없는 낭만주의자도 아니다. 미색에 빠져있던 평범한 군주도 아니다. 큰 뜻과 포부를 지닌 군주였던 것이다. 견씨가 자색이 뛰어나다는 것때문이라면, 당시 야율완의 지위나 권세로 보아서 어디서든지 더욱 예쁘고 더욱 젊은 여자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율완이 이 여인에 대하여 집착한 것은 견씨에게서 중원정치, 문화를 느꼈고, 거기에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야율완은 한족의 문화를 동경했다. 우아한 견씨를 보석처럼 아꼈다. 그가 보기에, 거란정권이 중원을 차지하느냐 마느냐, 대요황제가 진정한 중국황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군사적인 확장과 실력축적 이외에 핵심은 바로 거란의 봉건화를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한족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태조와 태종과 비교하여, 야율완은 두 선대와 같은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중점을 제도개혁에 두었다. 그리고 후당, 후진 두 왕조의 정치체제를 잘 아는 견씨를 아낀 것이다.

 

이런 장기적인 안목과 탁월한 식견으로 야율완이 즉위하자 견씨를 황후에 봉하고, 그녀에 대한 총애도 두터웠다. 당시, 소철갈지(蕭撤葛只)는 바로 야율완의 곁에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이 거란여인은 왕비에서 황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야율완이 조상의 유훈을 어기면서까지 한족황후를 세운다. 이는 장래 중원의 주인이 되고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것이면서, 견씨의 "엄명단중, 풍신한아(嚴明端重, 風神閑雅)"한 분위기에 끌린 것이다. 소철갈지를 포함한 거란 유목민족의 여자들이 갖지 못한 것이었다.

 

행동거지와 풍모가 강인한 거란여자들보다 나을 뿐아니라, 견씨의 품성과 성격도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잘 대했고, 일처리가 신중했으며, 방법과 방식을 주의했다. 황후로서, 그녀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자신을 위하여는 바늘 하나 실 하나 챙기지 않았다. <<요사. 후비열전>>에도 "궁내를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고,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처리하지 않았다(內治有法, 莫干以私)"라고 칭송했다. 그녀에게 아주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야율완은 견씨를 존중해주었고, 아주 사랑했다. 그리고 삼황자 야율지몰을 낳았다. 나중에 야율완은 반대세력의 성토에 못이겨, 소철갈지를 황후로 책봉한다. 그렇지만 견씨의 황후지위도 유지시켰다.

 

야율완은 비록 소씨도 황후로 삼았지만, 모든 사랑은 견씨에게 쏟았다. 그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야율완이 즉위한 것은 두 세력이 타협한 결과였다. 이처럼 구심력이 없는 정부는 언젠가 문제가 터진다. 야율완은 남북추밀원을 설치했는데, 적지 않은 거란추장귀족의 이익을 건드렸다. 이리하여 살신지화를 당할 씨가 뿌려진다. 천록5년(951), 곽위, 유숭이 연이어 황제를 칭한다. 중원이 다시 전쟁에 휩싸인다. 야율완은 기회를 틈타 남정을 간다. 그리고 견씨와 상의한다.

 

견씨는 중원을 공격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그녀가 한족이라는 것 이외에, 그녀는 대요의 시국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매년 출병하여, 장병들이 전쟁을 지겨워하는 심리가 만연해 있었다. 둘째, 반란이 빈발하여, 내부갈등이 심했다. 셋째, 대적을 앞에 두고 중원의 백성과 군사들은 일치단결해 있었다. 그러나, 야율완은 견씨의 제지와 여러 장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정을 강행한다. 9월 4일, 야율완이 귀화에 주둔할 때, 찰할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군에 살해당한다. 수행하던 두 황후와 황태후도 함께 목숨을 잃는다. 야율완과 견씨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난다.

 

견씨의 죽음이후에 비극은 연이어진다. 그녀의 시신은 황야에 대충 묻어버린다. 십팔년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매장된다. 그러나, 시종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의 아들인 야율지몰은 "궁인과 사통해서, 황상이 듣고 화를 냈다. 눈 하나를 찌르고 궁형에 처한 다음 옥에 가둔다" 출옥후에 영왕에 봉해지나, 다시 박탈당한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요사. 후비열전>>에 견씨를 사관들은 비(妃)로 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황후의 뒤에 놓는다. 견씨가 죽은 후에 당한 일련의 사태들은 거란인들이 민족문제에서 편협함과 완고함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견씨는 5년간 황후로 있었다. 그 동안 그녀는 망국의 한을 버리고, 여러가지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일언일행으로 유목민족에 중원문명을 알린다. 요나라제국에 한운당풍(漢韻唐風)을 전한다. 거란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불멸의 공헌을 남긴다. 그러나, 야율완 이외에, 다른 모든 거란인들이 보기에, 견씨는 시종 낯선 인물이다. 살아있을 때도 그러했고, 죽어서도 그러했다. 한족여인조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한족황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민족이 어찌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런 황제가 어찌 중국황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역사는 무정하다. 잔혹하다. 그리고 반드시 보답한다. 일찌기 중국북방을 웅패했던 거란민족은 역사에서 소멸할 운명이었다. 야율완이 비록 저평가되고, 견씨가 비록 부정되었지만, 그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이중정치체제, 그리고 그들이 함께 쓴 전설적인 사랑이야기는 영원히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비록 사람들은 그들 둘에 대하여 비교적 낯설어 하지만, 견씨와 세종, 소황후는 의무여산 동록의 현릉에 합장되어 있다. 요녕 북진시 부둔향의 신립촌에 있는 동가원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