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고종과 오황후: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금혼을 이룬 황제황후

중은우시 2009. 9. 8. 18:50

작자: 미상

 

고대에 위험한 직업이 황제였다면, 더 위험한 직업은 황후이다. 황제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목이 달아날 수 있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목을 날릴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종신제라는 것이다. 황후는 임용제이다. 천하의 여인들과 경쟁해야할 뿐아니라, 마음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남편도 상대해야 한다. 황후 자신은 변함없는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재위한 황제는 많지만, 오랫동안 재위한 황후는 적다. 금혼(金婚, 결혼50년)을 이룬 황후는 더욱 적다. 단 1명 뿐이다. 그녀는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송고종 조구(趙構)의 황후인 오씨(吳氏)이다.

 

오씨는 1114년에 태어났다. 원래 그녀와 조구가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북송왕주의 불행은 간접적으로 그녀 본인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가 12살 되던해인 정강원년(1126년)에 요나라를 막 멸망시킨 금나라가 대거 남침핸다. 병력이 북송의 수도인 개봉으로 밀어닥쳤다.

 

그녀의 미래남편인 조구는 당시에는 그저 황제의 동생인 강왕(康王)이었다. 위기의 시기에 형인 송흠종의 명을 받아 장방창과 함께 금나라에 의화사절로 보내어진다. 이때 조구는 이미 정실부인 형병의(邢秉懿)와 두 첩 전춘라(田春羅), 강취미(姜醉媚)가 있었고, 딸 다섯이 있었다. 의화사절로 가는 것은 국가대사이니, 가족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조구의 일가족들은 개봉의 왕부에 남겨졌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조구는 당시 19살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고등학생 수준이었다. 명을 받은 후 하루빨리 금나라의 총사령관을 만날 생각밖에 없었고, 몇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에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금나라사람들은 토지신이 아니고 이리(狼)였다. 북송의 종택(宗澤)은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구가 그의 관할구역인 자주(磁州, 지금의 하북성 자현)를 지날 때, 조구에게 금나라로 가지 말라고 권하면서 말한다: "금나라가 당신을 의화하기 위하여 오라고 하는 것은 사기술이다. 그들은 이미 병력을 성아래까지 보냈는데, 화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가는 것은 스스로 그물에 뛰어드는 격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구가 이번에 간다면 개한테 던져주는 고기만두꼴이 된다는 것이다. 종택 한 사람만 나온 것이 아니라, 현지 백성들이 가솔을 이끌고 모두 나와서 그의 말을 붙잡고, 북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이들 '못된 백성'들을 보고, 조구도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이 정말로 고기만두꼴이 될까 두려웠다. 금나라에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상주(相州, 하남성 안양현)에 머문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하북병마대원수"라고 칭한다.

 

1년이 지나서 정강2년(1127년)이 된다. 금나라병사들은 마침내 개봉을 함락시킨다. 북송정권은 멸망한 것이다. 송나라의 황제, 대신, 종실, 신과장원등 3,4천명이 모조리 포로로 붙잡혔다. 여기에는 조구의 일가족 8명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조구는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북송왕조는 속편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남송이라는. 그는 당시의 남경 응천부(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남쪽)에서 즉위한다. 그리하여 강왕전하에서 황제폐하로 승격한다. 연호는 '건염(建炎)'이라 한다. 그러나 재수없는 그의 형 송흠종과 그의 부친 송휘종은 태상황과 태황태상황으로 모신다.

 

속편으로서 남송의 첫 시작은 북송 끝부분의 스릴과 서스펜스가 이어진다. 조구가 막 즉위하고, 금나라병사들은 물에 빠진 개를 두들겨 패는 정신으로 치고 들어왔다.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조구는 '적이 진격하면 나는 퇴각하고, 적이 퇴각하면 나는 추격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남쪽으로 계속 도망치면서 사방을 유랑하는 신세가 된다.

 

여러 곳을 지나고, 여러마리의 말을 죽이고, 여러 대신을 잃은 후에, 조구는 항주에 안착한다. 집은 있는데, 집에서 혼자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조구는 다시 후궁을 뽑기 시작한다. 이 상황하에서 1128년, 오씨는 황궁으로 뽑혀서 들어온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오씨의 연령은 겨우 중학교 1학년생이다. 그러나 담량은 조구보다 컸다. 당시의 남송조정은 밖으로는 금나라의 강병이 버티고 있고, 안으로는 군벌, 백성들이 수시로 교란을 일으켰다. 조구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하루종일 지명수배범보다 고달픈 생활을 보냈다.

 

이때 오씨는 남편을 보호하기 위하여,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검을 찼다. 하루종일 조구의 곁에서 호위무사의 역할을 했다. 생각해보라. 미모가 뛰어난데다 나라와 집을 지키겠다는 기개까지 덧붙여졌으니, 오씨는 당시 얼마나 빼어나게 보였겠는가? 조구에게 당시 가장 부족한 것은 안전감이었다. 자신에게 안전감을 주는 오씨는 당연히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1142년을 전후하여, 금나라병사들이 남송에 대한 대규모 침입을 전개한다. 조구는 놀라서 한때는 바다로 나가서 적을 피하고자 했다. 그리고 도중에 금나라 총사령관에 서신을 보내어 불쌍하게 생각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씨는 굳건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 정해(定海)에서 창국(昌國)으로 가는 도중에 조구는 그녀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녀를 화의군부인(和義郡夫人)에 봉한다. 이어서 월주에 도착해서는 다시 재인(才人)에 봉한다. 그후 오씨는 칼을 휘두르면서 책도 섭렵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그녀는 황후의 바로 아래자리인 귀비(貴妃)에 오른다. 그녀가 황후에까지 오르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조구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정실부인이었던 형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병의는 포로로 잡힐 때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북방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유산을 한다. 화는 한꺼번에 몰려왔다. 금나라의 침략자들은 그녀에게 조금도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유산한지 며칠만에, 금나라의 개천대왕은 형병의를 강제로 가진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거의 자결하려고 했다. 조구가 남송의 황제에 오르자, 금나라정부는 그를 모욕주기 위하여, 그의 생모인 위현비(韋賢妃), 처인 형병의와 두 딸 조불우(趙佛佑), 조신우(趙神佑)등을 모조리 관영기원에 집어넣는다.

 

이같이 참혹한 치욕은 소흥5년(1135년)에서야 끝이 난다. 형병의등은 오국성(五國城)으로 보내어져서 송휘종등과 함께 안치된다. 이 기간중에, 송휘종은 대신 조훈(曹勛)을 남방으로 몰래 도망치게 하여 조구를 만나게 한다. 그에게 자신의 눈물이 묻은 손수건을 가져가게 한다. 곁에 있던 형병의도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귀에서 금귀걸이를 하나 빼서 조훈에게 주어 조구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조구는 귀걸이를 본 후에, 예전의 부부간의 정을 생각하여 마음 속에서 비통함이 밀려왔다. 그리하여 그는 형병의를 황후로 봉한다.

 

그러나, 홍안박명의 형병의는 다시 만날 날까지 견디지 못하고, 소흥9년(1139년)에 사망한다. 조구는 소흥12년(1142년)이 되어서야 생모인 위현비를 모셔온다. 그리고 형병의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까지 중궁(황후)은 십육년간 비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로서 조구는 백성들은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러나 남편으로서, 그는 형병의에 대하여 사랑을 다했다. 이 부인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그는 며칠간 정무를 폐하기도 하였다(전문용어로는 輟朝이다). 그후에도 시시때때로 형병의를 그리워했고, 오씨에게도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오씨는 어질었다. 질투를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다시 돌아온 위태후(즉, 위현비)에게도 효성을 다했고, 친히 수발을 들었으며, 며느리로서의 효도를 다했다. 오랫동안 고생을 겪은 위태후가 돌연 이렇게 마음에 드는 며느리를 만났으니, 자연히 마음 속으로부터 좋아했다. 그녀가 계속 황제에게 권해서, 1143년 오씨는 정식으로 황후에 오른다.

 

그후에도 두 부부는 서로 사랑을 유지하고 즐겁게 생활했다. 1162년, 조구는 송효종에게 황제위를 선위한다. 오씨는 수성태상황후로 받들어진다. 은퇴한 이후의 조구도 몸은 계속 좋았다. 1187년까지 살다가 죽는다. 1128년에 화촉동방을 밝힌 이래, 1187년에 남편이 먼저 병으로 죽었다. 오씨와 조구는 꼬박 59년 금혼을 지나고도 9년이나 더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황실혼인사상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1197년 10년간 홀로 살았던 오씨가 병사하니 향년 83세이다. 시호는 "헌성자열황후"이며, 영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