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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홍위병(紅衛兵)들은 왜 참회를 하지 않을까?

by 중은우시 2010. 3. 27.

글: 김산(金汕)

 

많은 젊은이들은 이미 1966년의 그 홍팔월(紅八月)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역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적지 않은 70년대생, 80년대생은 아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의 부친들이 일찌기 다른 사람을 때리면서 즐거워했고,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 범죄를 저질렀었다는 것을.

 

이 기간동안 피해를 입은 사람의 수는 부지기수이다. 스님, 수녀, 목사는 공개적으로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당했고, 학생들은 무리로 몰려다니면서 교사를 때리고 모욕했다. 어떤 교사는 분뇨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등 극히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친척이 외국에 있다고 하여, 홍외병들에게 '해외관계'가 있다는 죄명을 받고 비투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홍위병들이 가산몰수할 때는 가구를 모조리 가고, 땅은 헤집어놓고, 담은 무너뜨린다. 곳곳을 수색해서, 무슨 물품을 몰래 숨겨놓지 않았는지를 찾아낸다. 집안에 있는 것을 깡그리 가져가니, 강도나 다를 바 없다.

 

문혁에 반대한 거의 모든 학자들은 잔혹한 대우를 당했다. 홍팔월을 전후하여, 전 <<인민일보>>총편집장인 등탁(鄧拓), 저명한 번역가 부뢰(傅雷) 및 그의 부인 주매복(朱梅馥) 및 작가인 노사(老舍)는 굴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 투쟁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시신을 길거리에 내놓기도 했다. 전 국가지도자들 중 몇 사람도 비투를 당했다. 유소기, 등소평은 직위를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난다(유소기는 1969년에 감금상태에서 사망한다). 하룡, 팽덕회도 박해를 받아 죽는다(병사). 이외에, 문혁중에 박해를 받아 죽은 사람은 탁구선수인 용국단(容國團), 영화배우 상관운주(上官雲珠), 북경대학 부총장 전백찬(翦伯贊)(가택연금중 자살), 중국국가의 작사가인 전한(田漢), 작가인 조수리(趙樹理), 민맹 부주석인 장백균(章伯鈞)등이 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망자는 더욱 많다(부정확한 통계에 따르면 40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주 보수적인 수치이다).

 

사람을 때려죽인 사건에 대하여, 모택동은 <<사람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한데 관한 지시>>를 내렸다. 북경의 새로운 시위제1서기인 이설봉이 전달한 바에 따르면, 지시내용은 이렇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오해이다. 싸워야 친구가 된다.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당해도 싸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좋은 사람에게 영광이다." 이 지시가 나오자, 홍위병들은 더욱 미친듯이 날뛰었다. 1966년 8월 18일, 모택동의 친밀한 전우인 임표가 천안문에서의 강화에서 "우리는 모주석의 영도하에, 자산계급이데올로기, 구풍속, 구습관세력에 대하여 맹렬한 진공을 전개해야 한다! 반혁명수정주의분자, 자본계급우파분자, 자본계급반동권위는 철저히 타도하여, 그들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해서, 영원히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번의 타격대상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 틀 속에 들어가게 된다. 8월 22일, 모택동은 <<경찰이 혁명학생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지시를 내린다. 경찰에게 '학생혁명운동(실제로는 홍위병운동)'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나중에 '홍색공포'로 불리운 이 시기에, 문혁이 지난 후에 공식적으로 나온 통계에 따르면 북경에서만 1700여명이 맞아죽었다. 전국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는 20만에 달했다. 전체 문혁기간중에 죽은 사람의 수는 아마도 200만에서 700만까지로 전체 인구의 1%에 달한다. 이 숫자는 확실한 통계자료로 확인받아보아야 한다.

 

사실 당내이건 당외이건, 이같은 무법천지의 상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든지 모주석의 지시를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지도자는 우회적으로 이러한 폭력행위를 시정하고자 했다. 천안문으로 갔던 임표도 발언대위에서와 아래에서의 태도가 서로 달랐다. 당시으 북경시위 제2서기인 오덕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이 오덕에게 "파사구(破四舊)"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다. 오덕은 보고전에는 실제상황을 모택동에게 보고하고, 이 분위기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북경시위는 국면을 통제할 힘이 없고, '파사구'로 인하여 발생한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그 말을 듣고, "북경은 몇 왕조의 후예들이 있는데 건드리지 않았다. 이번에 파사구를 하니, 그래도 좋다." 항상 모주석의 말을 따르든 임표도 곧이어 얘기했다. "이것은 위대한 운동이다" 그러나 그 뒤에 그가 덧붙인 말은 당시 아무도 감히 꺼내지 못하던 말이었다: "한 가지만 장악하면 된다. 사람을 때려죽여서는 안된다" 이를 보면 임표는 공개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입장이 달랐던 것같다. 당시 당내민주는 아주 비정상적이었다. 마음 속으로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최고지도자의 뜻에 따라 말을 했다.

 

"반동학술권위"를 비투하는 외에, 전국의 홍위병들은 연합하기 시작한다. 9월 5일, 중공중앙은 통지를 보내어, 외지의 교사학생이 북경으로 와서 문혁운동을 구경하고자 한다면, 교통비와 생활비를 중앙재정에서 보조하겠다고 했다. 이 통지로 인하여 이미 시작된 대연합이 최고조에 이른다. 전국에서 '당위를 쫓아내고 혁명을 벌이자'는 흐름이 나타난다. 10월 9일, 임표는 다시 유소기, 등소평은 자산계급반동노선의 대표라고 지적한다. 곧이어 팽덕회는 북경으로 압송되어 비투당한다.

 

1966년 홍팔월은 이미 40여년이 흘렀다. 당시 홍위병들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은 집단적으로 반성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목소리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많은 당사자들은 당시에 자신이 젊었고, 또한 최고지도자가 호소한 일이므로 이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결핍된 것이다. 당연히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임족은 참회의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더 많은 길을 돌아서 가게 되는 것이다.

 

<<홍위병참회록>>은 수백권이 되더라도 많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