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봉황역사망
마지막 연성공(衍聖公)이며 공자의 77대 적장손인 공덕성(孔德成)이 2008년 10월 28일 타이페이에서 서거했다. 향년 89세이다. 공자집안의 당대 장문인이 서거하면서, '천하제일가족'의 운명도 다시금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일찌기 사마천이 <<사기>>에서 공자를 세가로 분류했다. 소위 세가는 세습왕후에 한정된다. 그러나, 당시 공자는 존경은 받았지만, 아직 왕으로 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 공자의 음덕으로 공자후예들은 2천년동안 정말로 왕의 작위를 승계했다. 중국역사상 공씨집안만이 왕조교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유일무이한 공부세가(孔府世家)가 형성되었다.
성인 공자의 고귀한 혈통을 이었으므로, 공덕성은 곡부에서 공자의 후손으로 태어난지 100일만에, 당시의 대총통인 서세창에 의하여 '연성공'의 작위를 승계받게 된다. '연성'은 성인 공자의 신성한 혈맥을 계속하여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수천년을 이어온 유가의 문화전통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로 인하여 공덕성은 불행히도 마지막 연성공이 된다. 서학동점, '공가점(孔家店)'타파, 내우외환, 왕조교체를 거치면서 시대의 변환 속에서 성장한 공자일가의 후예들은 그저 선조의 운명에 따라 부침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근현대 백년동안 그와 다른 공자후예의 운명은 국가권력과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와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풍운이 만변하는 21세기에, 중국전통문화는 약간 부활의 서광이 나타나고 있다. 유학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때 마지막 연성공이 세상을 떠났다. 이는 한 시대의 종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까?
1949년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하고 대량의 황금과 문화재 및 당시 가장 유명한 일부 지식인들을 데리고 대만으로 간다. 전퉁유가문화의 추종자로서, 유가도통을 이었다고 자임하는 장개석은 공자의 77대 적장손 공덕성을 데려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덕성은 제76대 연성공 공영이의 유복자이다. 1920년 2월 공덕성이 출생하기 전에, 부친 공영이는 북경에서 급사하였다. 곧이어 모친 왕씨도 병사한다. 그해 11월 북양정부의 비준을 받아, 공덕성은 연성공의 작위를 잇는다. 공덕성은 9살때부터 공부의 업무를 관장한다. 이렇게 하여 전체 공자집안의 장문인이 된다.
일찌기 1948년 3월, 공덕성은 장개석의 뜻에 따라 미국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중국계에 유가문화를 전파한다. 당시 공덕성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는 공자의 신성한 혈맥을 이었으므로, 장개석에 의하여 '국지중보(國之重寶)'로 인정되었다. 도강작전 전날저녁, 공덕성은 미국에서 돌아온다. 이때 곡부의 공부는 이미 신정권이 접수했다. 1949년 4월, 공덕성은 대만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공덕성이 장개석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떠난 후, 명목상 그는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 "국대대표(國大代表)", 타이페이고궁박물원 종신원장의 직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직무는 대만대학 중문과 교수였다. 1955년부터 대만대학 중문과, 인류학과의 겸임교수를 지낸다. 그는 대만대학과 보인대학에서 '삼례연구' "금문연구" 및 "은주청동이기연구'과정을 강의했다.
1966년 11월, 공덕성은 손과(孫科, 손문의 아들), 왕운오(王雲五), 진립부(陳立夫)등 1500명과 연명으로 '중화문화부흥절'을 설립하자고 창의한다. 이는 장개석의 동의를 받아낸다. 1967년 7월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장개석이 스스로 총회장이 되어 총지휘를 하며, 공덕성은 중화문화부흥위원회 상무위원, 공맹학회 이사장을 맡는다. 그리하여 선조의 학문을 계승하고 널리 알리며, 힘을 다하여 전통문화부흥에 힘쓴다. 그가 힘써 추진함에 따라, 대만은 '공자탄신일'을 교사절로 정한다. 매년 대만에서는 공사에 제사지내는 활동을 벌인다. 공덕성은 봉사관으로 기존의 법도에 따라 제사를 주재하였다. 그는 덕망이 높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만에서 존공(尊孔)과 반공(反孔)의 논쟁은 시종 끊이지 않았다. 공덕성의 심경은 이에 따라 계속 기복이 있게 된다. 일찌기 이오(李敖)를 대표로 하는 서화파는 완전 서구화를 주장한다. 유가문화에 대하여는 맹렬하게 비판한다. 백양등 전통에 반대하는 자들도 전혀 봐주는 것없이 유가문화를 폄훼하였다.
일부 대만독립세력은 심지어 대만과 대륙은 문화와 종족이 다르다고 여기고, 대만과 대륙은 분리된지 오래되었고, 문화습속이 다르면, 이미 중국인과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말은 대만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리덩후이, 천수이벤이 집권하면서 '탈중국화'가 시행되며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꾀한다. 공가 '봉사관'의 존재에 대하여도 의문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지막 연성공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겠는가?
공덕성은 대만에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8년 제7대 고시원 원장이 되고, 1990년 8월에는 제8대 고시원 원장으로 연임한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있거나 정치를 하는데 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교적인 행사도 좋아하지 않았다. 대만정계에서 수십년간 지냈지만 그는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았고, 회의시에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양이불문창외사(兩耳不聞窓外事) 일심지독성현서(一心只讀聖賢書)라고 할 수 있었다. 공덕성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말하거나 일하는데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는 그의 일생이 평탄하지 않았고, 운명이 부침한 것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공덕성은 1947년 곡부를 떠난 후, 다시는 공림으로 가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유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5월, 해방군이 곡부에서 철수한 후, 공덕성은 남경에서 출발하여 8년간이나 떠나있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에는 종이 수백명 있었다. 종들중 대부분은 대대손손 공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많은 종들이 말했다: 다시 연성공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공덕성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먹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서 주는 것이다. 나도 공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저 공부에서 일하는 사람중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한 후, 이 공부의 주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20세기말, 곡부에는 '공부'로 명명한 전국을 풍비한 백주 '공부가주(孔府家酒)', '공부연주(孔府宴酒)'가 나타난다. 곡부정부대표단은 대만으로 가서 공덕성을 예방한다. 그리고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향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곡부의 대표단은 공덕성에게 호화롭게 포장된 '공부가주'를 선물한다. 공덕성은 포장에 쓰여있는 '공부가주'라는 글자를 본 후에 담담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공씨집안에 이런 술은 없다"
'공부가주'로도 공덕성의 향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죽은 후 유해를 대만의 삼협공묘에 묻었다. 역사상 공림에 묻히지 않은 두번째 연성공이 된 것이다. 곡부의 공림은 공자의 가족묘지이다. 약 이천여년간 사용했다. 공씨 자손의 묘가 10여만개에 이른다. 만일 역사적인 원인이 아니었다면, 공덕성의 내심에 남은 영원한 상처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죽어서도 이국타향의 고혼이 될 줄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가 낙엽귀근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산동곡부의 공부세가는 77세적손까지 이어져 왔고, 77대에는 형제자매 3명이 있다: 공덕제(孔德齊), 공덕무(孔德懋), 공덕성(孔德成). 공덕성의 부모는 요절하여, 두 누나와 함께 살게 된다. 오누이간의 정은 깊었다. 큰누나 공덕제는 혼인이 불행하여, 일찌감치 사망했다. 공덕성이 1949년 고향을 떠나 대만으로 갈 때, 대륙에는 둘째누나 공덕무만 남았다. 지금은 이미 아흔이 넘은 공덕무는 지금도 북경에 살고 있다. 그들 오누이는 공부에서 살았던 마지막 일대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세상의 갖은 변화로 서로 흩어져 살았다. 마치 나뭇잎처럼, 공부라는 이 천년묵은 나무에서 떨어져 타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공덕성의 대만에서의 생활은 약간의 파란은 있지만 비교적 평탄했다고 한다면, 공덕무의 대륙에서의 생활은 해방, 문혁, 개혁개방등 시대의 변천을 겪었다. 공덕무와 공자가족들은 문혁때 큰 타격을 입는다. '사인방'이 분쇄된 이후에야 비로소 명예회복을 한다. 공덕무는 전국정협위원, 공자기금회 부회장등 직무를 맡는다. 그녀의 운명은 조상의 부침과 더불어 기복이 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상이 성인에서 한푼의 가치도 없는 '공노이(孔老二)'로 전락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했다.
문혁기간동안, '파사구(破四舊)'의 풍랑과 비공투쟁(批孔鬪爭) 속에서, 흑백이나 시비를 가리지 않고 공자와 유가학설은 모조리 부정했다. 곡부의 공묘를 파괴하고, 공림의 수십대 분묘를 파헤치기도 했다.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공덕성의 부친 공령이의 묘도 파헤쳐져서 관을 부수고 시신을 꺼내놓았다. 파낸 대부분의 묘가 빈 묘이기는 했으나, 중국문화의 근본을 파헤치고, 2천년간 이어져온 유가문화의 전승을 파괴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1989년, 곡부에는 국제공자문화절이 열린다. 여러해동안 중단되었던 공자에 대한 제사의식도 되살렸따. 그러나,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을 모시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문혁때의 여러가지 사태들로 인하여 공덕성의 마음에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남긴다.
공덕성과 공덕무는 가장 가까운 혈육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거절했을 뿐아니라, 오랜동안 이 친누나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공씨집안의 이 오누이는 헤어진지 40년이 지나고서야 1990년말에 일본에서 비로소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공덕무는 동생 공덕성이 일본여택(麗澤)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알고는 일본친구들의 도움하에, 일본윤리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가서, 공덕성이 강의하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지날 복도에서 기다린다. 인생의 파란곡절을 거쳐 오누이는 마침내 이국타향에서 만났다. 잠깐 놀란 다음 오누이는 서로 마주보고 말을 꺼내지 못하면서 그저 함께 껴안고만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했다. 공자 후예들의 비애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1993년, 공덕성은 <<풍우일배주, 강산만리심(風雨一杯酒, 江山萬里心)>>이라는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북경의 누나에게 보낸다. 누나는 동생의 이 글을 잘 표구한 후에 거실의 벽에 걸어두고는 글을 볼 때마다 동생을 생각했다.
1995년, 공덕무는 세계부녀대회에 참가한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양안문화교류대표단은 대만에 도착한다. 그리고 동생과 두번째 상봉한다. 이번에 공덕성이 가장 많이 물은 것은 고향이었다. 그는 곡부의 사람들이 아직도 쓴 물을 마시는지, 고향사람들이 아직도 전병을 먹고, 옥수수죽을 마시는지 물어보았다. 공덕무는 그에게 옛날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말해준다. 지금 고향은 많이 바뀌었으니, 돌아와서 한번 직접 보라고 한다. 공덕성은 오랫동안 말없이 그저 술만 한잔 한잔 들이켰다. 공덕성은 대만으로 온 후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날은 예외였다. 술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누나 공덕무가 떠날 때 재삼 당부한다. 그녀에게 돌아가면 반드시 공림을 가봐달라고, 부모의 묘 앞에 대신 절을 하고 종이돈을 불살라달라고.
공씨오누이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역사는 마침내 다시 한번 놀랄만한 윤회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버려졌던 유교와 공자는 다시 대륙의 정부와 민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곡부의 공부는 중요문화재로 다시 수선되고, 각 대학은 속속 국학반을 개설하며, 공자와 논어를 해석한 책들이 대거 출판되고 있다. 중화문화를 전파하는 '공자학원'은 세계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공덕성이 대만에서 서거한 후, 대륙의 친척들은 모두 그가 공림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세계공자후예종친연의총회 회장이자 공덕성의 당제인 공덕용은 "우리는 그가 낙엽귀근하여, 곡부의 조상선영인 공림안에 묻히기를 바란다. 이곳에는 그를 위하여 묘지를 계속 남겨놓고 있었다."
2008년 9월 28일은 공자탄생 2559년기념일이다. 전례없이 성황을 이룬 2008년 제공대전(祭孔大典)이 곡부의 공묘에서 거행된다. 세계각지에서 온 화인화교대표 및 공자후예들이 제공대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2008년 연초 300억위안을 들인 중화문화표지성은 논쟁속에서 곡부에서 착공되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개회식에서 공자의 3천제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논어>>를 낭송하여 중화문명의 매력을 세계인들에게 나타냈다.
해협의 저편에서는 태풍으로 매년 정해진 시기에 거행되던 제공대전이 10월 5일로 순연되어 타이페이 공묘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제전은 아주 융중했다. 마잉주 총통이 친히 대전에 참가하였고, 대만 광복이래 공묘의 제사에 참가한 최초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마잉주는 공자상에 향을 올리고 삼국궁례를 행했다. 그리고 편액 "도관덕명(道貫德明)"을 써서, 선현에 대한 존경의 뜻을 나타냈다.
국가에서 공자를 제사지낸 것은 역사가 유구하다. 2500년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송,명,청때는 갈수록 격이 올라가서 제왕의 규격으로까지 올라간다. 동한때부터 청말까지, 역대제왕들이 친히 참가하거나, 혹은 관리를 보내어 곡부와 태학의 공자제사에 참가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자에 대한 제사는 국가에서 행하는 큰 행사로 성장한다. 한나라이후 각지에서는 공묘를 건립한다. 공묘는 중국의 각 현까지 만들어진다. 매년 공자탄신일에 중국대륙, 대만, 홍콩등지에서는 공묘에서 공자에 제사지내는 활동을 거행한다.
공자의 지위는 한나라때부터 날로 높아갔다. 몰락귀족자제에서 무면지왕인 '소왕(素王)'으로까지 칭해진다. 공자개인도 계속하여 추봉가시(追封加諡)되어, '니부(尼夫)'에서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문선왕(文宣王),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서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까지 올라갔다. 선조의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후손의 지위도 올라갔다.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 유방이 공자의 9대손 공등(孔騰)을 '봉사군(奉祀君)'에 임명하고 공자에 대한 제사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이때부터 공자의 적장자손이 세습하는 지위가 된다. 명칭은 관내후(關內侯), 포정후(褒亭侯), 숭성후(崇聖侯), 문선공(文宣公)등 여러 칭호가 있었다. 송인종 지화2년(1055년)에 공자의 46대손 공종원을 "연성공(衍聖公)'에 임명한다. 연성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민국기간동안 황제제도가 폐지된다. 그러나 공자의 후손에 대하여는 남경국민정부가 계속 돌봐준다. 일생동안 삼민주의의 신도로 자처한 장개석은 유가도통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체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935년 1월 18일, 국민정부는 결의를 통하여 '연성공'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직함을 고친다. 그리고 특임관의 대우를 부여한다. 장개석이 친히 참석한 상태에서 공덕성의 격이 높은 취임식을 거행한다. 900에 걸친 연성공은 77대 공덕성에서 끝이 난다.
공자는 역대통치자에 의하여 성인으로 모셔진다. 논어는 만세의 경전으로 인정된다. 공자에게는 이런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그것은 단순한 철학이나 종교와는 다르다. 인간질서를 전면적으로 안배하는 사상체계이다. 그 의미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축적되고 성장했다. 공자는 점차 신앙의 위치에까지 올라간다. 그리하여 역사상 예악이 무너질 때마다 반공과 존공의 논쟁은 격렬하게 벌어졌다. 공자에 대한 태도는 성인으로 받들거나 아니면 쓰레기취급을 하여 짓밟는 것이다.
서한때부터, 사람들은 공자를 내세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후대에는 성인의 말을 빌어서 책을 쓰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역대 혁명은 진짜이건 가짜이건 모두 유가를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보수파는 신구를 막론하고 모두 공자를 성인으로 찬양했다. 중국역사상 공자는 여러번 곤경에 처한다. 먼저 묵가,법가의 도전을 받는다. 그후 위진시대에는 '월명교이임자연(越名敎而任自然)'의 반명교투쟁이 벌어진다. 그후 남북조때부터 불교가 장기간 중국사상과 신앙을 지배한다. 명나라말기에는 태주학파가 공개적으로 '공자의 시비를 가지고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고 선언하게 된다. 5.4운동때에 나온 구호는 바로 '타도공가점(打到孔家店)'이다. 문혁기간동안은 더더욱 비판을 받아 형편없어진다. 공자와 그 자손은 무덤에서 끌려나와 부관참시를 당한다.
오늘날에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자의 학문이 중국을 수천년간 속박했고, 중국사회가 미개하거 낙후된 것, 근대의 몰락과 굴욕은 모두 공자때문이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공자를 중국굴기의 정신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공자의 사상체계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자비(自卑)이든 자대(自大)이든 모두 공자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실상 공자를 존경하든 반대하든, 모두 공자의 이름을 빌어서, 자신의 도덕이나 정치적 사욕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공자는 그저 칼에 불과하다. 결투하는 것은 각각 다른 생각을 품고 칼을 든 사람들이다 .
공자와 영욕을 함께 한 것은 공자의 후손들이다. 짧은 백년동안,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과 그의 가족의 희비극은 여러 정치이데올로기의 변천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이 죽은 후, 누가 그의 지위를 계승할 것인가? 75대 연성공 공상가부터 시작하여, 공자의 적계후손은 이미 5대때 외동아들로 이어진다. 공덕성의 독자인 공유익(孔維益)은 이미 사망했다. 유일한 손자인 공수장(孔垂長)은 이미 성인이다. 그는 "견습봉사관"이 되었다. 2006년 원단, 공자의 제80대손 공우인(孔佑仁)이 탄생했다. 공자의 성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민진당의 계속되는 탈중국화 운동으로 이 문화가족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격이다.
지금까지 일관되게 중화문화정통을 이었다고 자처하는 국민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세계각국에 공자의 후손이 대만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봉사관의 직위를 다시 두려고 할 것이다. 양안의 관계에 있어서 도통의 관념은 미묘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공자의 적계후손으로 하여금 세습하게 할 것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귀족세가의 문화기적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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