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1991년 구정에 밤새워 기차표를 구한 이야기

중은우시 2009. 2. 10. 20:52

글: 주가웅(朱家雄)

 

구정기간동안 기차표는 정말 구하기 어렵다. 특히 십여년전에는 더욱 그랬다.

 

전에 그렇게 추운 겨울 밤에, 나는 노천의 매표창구앞에서 줄을 서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나는 기차표를 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는 제 시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아래에서 그 때의 일을 추억해보도록 하겠다.

 

1991년말의 그해 겨울에 나는 어떤 일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예매하지 못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다가오자 할 수 없이 스스로 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중국인민대학의 동문 곁에 있는 판매소에서 표를 샀었다. 일찌기 표를 사려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표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들었다. 그래서 첫날 나는 탐색하는 기분으로 가보았다. 오후에 도착해보니, 그날 판매할 수 있는 표는 이미 다 팔아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판매소에서 다음 날 아침 8시반부터 넷째날의 표를 판매하기 시작한다고. 그리고 수량이 아주 적으므로, 앞에 줄을 서야만 사려는 표를 구할 수 있다고.

 

나는 금방 나의 처지를 깨달았다. 나는 반드시 그날 밤부터 매표창구앞에서 줄을 서야했다. 다음날 아침에 표를 팔 때까지. 그러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구할 방법이 없다.

 

이런 정보를 얻은 후 나는 쓸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 밤새워 줄을 서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북대로 돌아와서 준비를 했다. 첫째는 잠을 푹 자서 기운을 돋구었고, 둘째는 저녁을 든든하게 먹어두었으며, 셋째는 문을 나설 때 나의 가장 따뜻하지만 더러워져도 상관이 없는 군대방한복을 걸쳤다. 이렇게 하여 나는 저녁식사를 한 후에 332번 버스를 타고 인민대학 동문으로 표를 사기 위하여 갔다. 나는 혼자서 외롭게 가면서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교묘하게도, 내가 탄 시내버스에 내가 아는 동창이 타고 있었다. 그도 표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와 함게 매표소로 갔다. 나는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저녁 8시였다. 아직 괜찮다. 판매소밖에 있는 두 줄의 난간 안에는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20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사실 표 한 장을 구하기 위하여 12시간이상을 꼬박 밤을 새우며 줄서 있는 것은 중국의 특유한 광경이다. 나와 이 우연히 만난 연구생친구는 줄로 가서 서 있었다. 우연히도, 우리의 앞에도 두 남학생인데, 얘기해보니 하나는 북대(북경대학) 하나는 인대(인민대학)의 학생이었다. 서로 뜻이 맞아서인지 아니면 시간을 보내려고 그랬는디, 우리는 이것저것 얘기를 시작했다. 얘기를 하다가 마침내 우리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서 카드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시간보내기 아주 좋다. 우리는 즐겁게 카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날씨가 춥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달려가서 얼궈터우(二鍋頭, 값싼 술) 작은 병을 하나 사가지고 와서 함께 나눠마셨다. 우리는 백주를 마셔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이때 네 사람은 돌아가면서 술을 조금씩 입에 흘려넣었다. 이 술은 정말 쓸모가 있었다. 조금 지나자 우리는 모두 몸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인가 자정이 되었다. 표를 사려고 와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우리의 뒷쪽으로 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 뿐아니라, 두 줄의 쇠난간 바깥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더 이상 뒤에 줄을 섰다가는 표를 살 가망이 없다고 보고 그들은 새치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의 빈틈만 있으면, 그들은 앞뒷사람을 설득해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십여명은 이미 성공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우리 몇 사람은 상의를 했다. 포커를 거두고 더 이상 놀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일으켜 가능한한 우리의 영지를 보호해서 틈을 노리고 끼어드는 자들을 막으려 했다. 우리는 앞뒤로 줄 서 있는 사람을 본떠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을 등에 대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줄을 서 있었다. 힘들게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흘러갔다...그래도 앞쪽에 또 몇 사람이 끼어들기에 성공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 혼란은 갈수록 가중되어 수습이 잘 되지 않았다. 우리 네 사람은 다시 생각하고 협의했다. 우리의 뜻은 누군가가 나서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질서를 유지시키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그리고 몇 사람은 우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의미는 "너희 생각이 아주 좋다. 한 두명을 뽑아서 질서를 유지시키도록 하자. 그렇지 않고 이렇게 끼어들기를 계속하면, 내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분명히 한참 뒷쪽으로 밀리게 되고, 표를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밤새는 것이 헛고생을 하는 꼴이 된다"

 

아마도 우리가 군대방한복을 입어서인지, 상의한 결과 안경을 끼고 있던 내가 줄의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바로 스스로 나설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나는 용기를 내서 철난간 바깥에서 사람들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고생했다.

 

막 줄을 선 사람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담장 곁의 공지에 내려섰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잘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더욱 고무되어, 눈썹을 휘날리며, 장신을 차리고 줄의 앞뒤를 왔다갔다 하였다. 왜냐하면 "민의"를 받들어서 일하는 것이므로 나는 가슴을 내밀고 영웅호한은 용감하다는 늠름한 위풍을 드러내며 사회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지킨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금방 나는 어떤 사람이 철난간을 기어올라 줄에 끼어들려고 하는 사람을 보았다. 이미 줄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괜히 세워놓았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는 과감하게 소리질렀다: "거기 친구. 나와라. 끼어들지 말라. 모두 용납하지 않는다. 수고스럽지만 뒤쪽으로 가서 줄을 서라." 이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 소리쳤다: "빨리 나가라. 이곳을 끼어드는 곳이 아니다." 어쨌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끼어들기에 성공했던 사람은 조용히 나와서 뒤로 줄을 서러 갔다.

 

한번은 누군가가 줄에 끼어들려고 했는데, 그는 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보고 누구냐고 되물었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기 일에 간섭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추천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끼어들려는 것 아니냐. 그러면 먼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결국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호응해서, "나가라. 여기는 끼어들 곳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끼어들려던 사람은 할 수 없이 철난간밖으로 빠져나가서 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유사한 상황이 이렇게 계속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지하는데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이것이 사실 집단의 힘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그 몇몇 카드친구와 같이 서 있던 전우들 때문이었다. 나야 그저 호가호위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날 밤에 나는 개략 20여건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끼어들려는 것을 막아냈다. 나는 아주 자랑스러웠다.

 

순식간에 5,6시간이 흘렀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성공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질서를 유지해준 나는 어쨌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영웅이 되었다. 졸음이 막 밀려오려고 할 때, 나는 원래 내가 서 있던 줄의 위치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줄은 실로 너무나 빡빡하게 서 있어서, 내 몸을 세 명의 카드친구들 사이로 끼어들게할 틈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몸과 몸 사이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죽어라 끼어들기 위하여 노력할 수밖에 업엇다. 다행히 몸에 제복을 걸친 경찰이 매표현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진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줄에 끼어들려고 하는 것을 보자, 나에게 소리쳤다: "너는 대학생이지. 빨리 나와라. 대학생이 표를 사려면 줄을 서야지." 나는 해명하려고 했고, 주위 사람들도 해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경찰은 손을 흔들며 제지했다: "빨리 나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뒤로 가서 줄을 서라. 그러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겠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해명할 생각을 버렸다. 뒷쪽에 길게 선 줄을 보고는, 나는 오늘 표를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우울해 하고 있는데, 연구생 카드친구가 "빨리 학생증 내놔라. 너는 줄 설 필요없다. 내가 대신 사주겠다."

 

그래서 나는 줄을 선 바깥에서 그냥 방관하며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매표시간이 되었고, 매표창구는 정시에 열렸다. 줄선 사람들 중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속속 손에 든 현금을 창구로 들이밀었다...

 

반시간후, 왼손으로 돈을 쥐고 오른손에 표를 쥔 연구생친구가 마침내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 나는 피로에 지쳐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나를 맞이한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표를 사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한 장밖에 살 수가 없고, 여러장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더더구나 대신 사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어찌되었던, 매표원은 죽어도 안된다고 하지 어쩔 수가 없었단다.

 

낙담한 나는 연구생으로부터 몇마디 위로하는 말을 듣고, 비장한 마음으로 그를 보냈다.

 

나는 그 연구생과 함께 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정말 다른 방법으로 표를 살 수는 없는지. 나는 두 바퀴를 돌고, 기적적으로 한 전봇대에서 "차표양도"라는 쪽지를 보았다. 더더구나 그 파려는 표는 바로 내가 타려는 87번 기차(북경-귀양)이었다. 그 차표는 도착지가 내가 가려는 누저보다 한 정류장 더 가는 곳이었다. 1정거장을 더 갈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정말 하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희생한 나를 돌봐준다고 느꼈다.

 

나는 그자리에서 그 쪽지가 남겨놓은 주소인 인민대학내의 학생기숙사로 찾아갔고, 그 기숙사에서 차표주인을 만났다. 바로 나의 고향이웃이었다. 비록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두 눈에 눈물이 가득"이라는 장면은 아ㅣ지만, 나는 그 고향친구와 돈과 차표를 교환한 후 한참을 재미있게 얘기나누었다. 아주 피곤하다보니 그의 기숙사에서 그냥 잠시 잠이 들기도 했다.

 

며칠후 나는 남행열차를 탔다. 그다지 붐비지도 않았다. 어쨌든 대학생들이 귀향하는 때는 다른 사람들이 귀향하는 때와는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