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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문혁기간중의 10대 무투(武鬪) 사건

by 중은우시 2009. 11. 2.

글: 이회지(李悔之)

 

'문혁'이 끝난 후에 성립된 '중공중앙문화대혁명무투사건조사조'는 1978년 6월부터 1979년 8월까지, 당사자들로부터 상황을 파악하고 관련자료를 정리한 후 심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통계를 내놓았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의 사이에 현지 혁명위원회, 정법부문, 군관회(조)에 신고, 비안된 건수를 보면, 사상 10명이상인 무투사건이 57,227건, 사상 100명이상인 무투사건이 9790건, 지방주재군이 명을 받아서 개입한 사건이 2,355건; 친척실종으로 보고된 건이 227,300여명에 이른다.

 

아래는 그중 사상자가 많고, 참혹했던 10대무투사건이다:

 

첫째, 1967년 칭하이(靑海) 시닝(西寧)의 "2.26"사건

 

1967년 2월 26일, 칭하이 시닝의 무투는 성위, 성정부, 군민용비행장까지 확대되었다. 성공안청, 시닝시공안국이 점거되고, 3개의 대학, 12개의 전문학교,직업학교, 35개의 군공기업직공이 참가했다. 2월 26일부터 3월 5일까지 무투는 지속되었고, 'T55"탱크등 중무장한 부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2,17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사망자가 822명에 이르렀다.

 

둘째 1967년 7-8월의 헤이룽장(黑龍江) 이춘(伊春) 무투사건

 

1967년 7-8월, 헤이롱장성 이춘시 임업국주비혁명위원회는 대립하는 두 개의 파에 대하여 '혁명조반파' '모택동사상한위자'로 자처하며, 15일간의 협상을 거쳤으나, 다른 두 파가 자리를 타협하지 않자, 재정권한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어 충돌이 발생한다. 시재정국, 은행등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지방주재군이 참가하면서 무장대치가 이루어진다. 8월 2일-8월 25일 무투로 승급된다. 37개의 정부건축물이 훼손되고, 2곳의 군사기지가 포탄공격을 받으며, 230여명의 관병이 사상당한다. 무장충돌과정에서 3,750명이 사상당하고, 기록에 남은 사망자만 1,944명에 이른다. 그중 많은 사람은 임장(林場)직공과 가족이었다.

 

셋째, 1967년 8월-11월 후난(湖南) 화이화(懷化) 무투사건

 

1967년 8월-11월, 후난성 화이화시 직공홍위병조반파는 화이화노동개조농장, 노동개조공장을 점거하고 접수한다. 군대는 명을 받고 진주하려했으나, 무력으로 저지당한다. 노동개조농장, 노동개조공장의 수감자들은 무장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대를 공격했다. 군대는 명을 받아 반혁명무장반란으로 진압한다. 그리하여, 37,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그중 13,300여명이 사망한다. 군인은 430명이 사상당한다.

 

넷째, 1967년 6월-1968년 3월의 쓰촨(四川) 이빈(宜賓) 대무투

 

1967년 6월-68년 3월, 쓰촨 이빈지구의 두개파의 군중조직은 '유결정, 장서정은 모택동사령부전사인가 아니면 유등사령부의 흑간장인가?"를 놓고 격렬한 투쟁을 벌인다. 중앙문혁은 1968년 1월에 "유, 장은 모택동사령부의 전사이며, 장기간 유등의 사천의 대리인 이정천, 요지고같은 인물의 박해를 받아왔다"고 의사표시한다. 현지 주둔군은 즉시 그 의견에 따라, 다른 일파의 군중조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한다. 그리고 격렬한 무투를 벌인다. 무투에 동원된 사람이 17만여명에 이르고, 2개 병단이 개입하여, 43,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1,100여명이 사망한다. 군대는 이빈지구에 15개월에 걸치는 계엄을 실시한다.

 

다섯째, 1967년 10월-69년 5월 내몽고 내인당(內人黨)사건

 

1967년 10월 20일-69년 5월말까지, 내몽고에는'내인당' 사건이 발생한다. 중공당원, 간부, 지식인, 농민,목민, 지식청년(주로, 베이징, 허베이, 산동에서 온 66학번, 67학번, 68학번의 대전졸업생) 56,200여명이 살해되고, 377,000명이 감금된다.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사람만 355만명에 달한다. 이는 당시 내몽고자치구 총인구의 1/4에 달한다.

 

여섯째, 1968년 5월 - 9월의 안휘 방부(蚌埠), 화이난(淮南) 무투

 

1968년 5월 - 9월, 안휘성 방부, 화이난의 85개 기업단위의 직공이 제2차조반을 일으킨다. '이보화는 안휘의 대리인'이라고 솎아내고자 한다. 두 곳의 혁명위원회를 포위하고, 철로, 도로를 12일간이나 점거한다. 중앙문혁은 조사조를 파견하여, 모택동은 왕동흥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게 한다. 중앙문혁은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규정짓는다. 허페이(合肥)에서 5만의 무장민병을 조직하고, 주둔군과 연합하여 기한을 정해서 무기를 자진하여 내놓게 명령한다. 기한이 지나자, 진공과 체포를 감행한다. 35일간의 소탕작전에서 73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3,433명이 사망한다. 군대, 민병에서 사상자 525명이 나오고, 827개의 건축이 훼손된다.

 

일곱째, 1968년 12월 - 69년 2월 산시(陝西) 바오지(寶鷄) 무투

 

1968년125월 - 69년 2월, 산시성 바오지지구의 8개의 병공장에서 '계급대오정리'의 정치운동을 벌인다. 7만명의 직공중 45,400여명이 계급적대분자, 역사반혁명분자, 현행반혁명분자로 규정된다. 그중 297명은 현지 군관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즉시 집행된다. 다음 날, 전지구에서 동란이 발생하고, 주둔군은 반혁명동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하고, 추격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추격과 반추격의 무장투쟁이 벌어진다. 탱크, 장갑차, 대포, 화염방사기가 동원된다. 48,3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13,300명이 사망한다. 사망자중에는 군관조 조장, 정위, 바오지시 혁명위원회 군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바오지 주둔군의 군영도 포격을 받아 2곳이 파괴된다.

 

여덟째, 1968년 4월 - 7월 광시(廣西) 난닝(南寧) "4.22"참안

 

1968년 4월-7월, 광시 난닝지구의두 개파 군중이 130여만명이 무장투쟁에 돌입한다. 군구의 5개의 무기고의 총과 탄약이 탈취된다. 월남전쟁에 수송되던 무기마저도 철로노선에서 탈취된다. 4개월여간, 22건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175,0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101,000여명이 사망하며, 33,115명이 실종된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보낸 조사조중에서도 3명이 총살당한다. 광시 난닝의 무투는 문혁기간중에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온 무투이다.

 

아홉째, 1975년 5월 신장(新疆)생산병단 '쿠데타' 진압

 

1975년 5월, 신강생산병단 석하자, 규돈량지구의 생산건설병단에서 소위 '집단쿠데타'가 일어나서, 소련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군대가 출동하고, 건설병단에 대한 숙청을 진행한다. 그리하여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격전이 일어난다. 석하자지구에서 7,33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2,170명이 사망한다. 두 지역에서 실종자가 8.170명에 이른다. 무장진압하는 과정에서 헬리콥터까지 동원된다.

 

열째, 1975년 윈난(雲南) 회민(回民) 사건

 

1975년 4월, 윈난성 스덴(施甸)의 '이슬람공화국"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하여 37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회족이 1,220명 사망한다. 스덴지구의 정부건축물이 파괴된다. 이는 인위적으로 일어난 정치적인 억울한 사건이다. 그해 중앙정부는 2000여만위안의 구휼굼을 내려보내어 이 민심을 안정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