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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모택동기념당은 왜 천안문광장에 만들었는가?

by 중은우시 2011. 1. 29.

글: 조굉(曹宏)

 

 

 

당중앙은 모택동의 유체를 보존하여 기념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후,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반복하여 연구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중산릉을 본받아 북경의 서산에 기념당을 만들 것으로 추측했지만, 결국 천안문광장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인 곡목(谷牧)을 주임으로 하는 중앙보호모주석유체영도소조판공실은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사무기관이었다. 모주석기념당의 건설과 보호에 관현 결정은 모두 이 권위를 지닌 판공실에서 이루어졌다. 모주석기념당의 건설을 기획하기 위하여, 판공실에서는 "능묘설계소조"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모주석기념당설계조"로 명칭을 바꾼다. 당시 북경시건설위원회 주임인 조붕비(趙鵬飛)와 1기부 부부장인 손우여(孫友余)가 책임자를 맡았다.

 

1976년 9월 13일, 모주석유체영도소조판공실이 성립된 그날, 전화로 북경, 천진, 상해, 광동, 강소, 섬서, 요녕, 흑룡강등 8개 성시의 10개단위에 통보하여, 가장 명망있는 건축가, 설계사, 미술사 및 노동자대표 합계 40여명을 북경으로 보내어, 능묘의 부지선정과 설계업무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부지선정업무가 시작되자마자 각종 의견이 쏟아졌고, 서로 다른 방안들을 내놓았다.

 

당시 가장 우수한 건축전문가들을 모두 모았는데, 국가건설위 건축과학원의 5명, 북경시 규획국 및 건축설계원에서 각 6명, 청화대학에서 4명, 상해에서 4명, 천진, 요녕, 광동, 광서, 흑룡강, 1기부에서 각 3명으로 구성했다. 그들은 북경에 모인 후 부지선정설계소조를 만들고, 9월 14일 업무를 개시한다.

 

근 2개월의 부지선정업우에서, 전문가들은 북경의 여러 장소를 방문하고, 여러 명승고적 소재지를 탐사했다. 향산, 경산, 북해, 중남해, 천안문광장 및 북부일대등 십여곳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했고, 각종 방안과 구상을 내놓았다.

 

부지선정설계소조의 전문가들이 먼저 생각한 것은 모택동이 남북에서 전투를 벌이고, 일생동안 힘들게 살았으므로, 풍경이 수려하고 환경이 아름다운 곳에 능묘를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모주석이 평안히 쉴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수상일출(水上日出)"방안을 내놓는다: 물결이 일고, 물안개가 아름다운 가운에 붉은 해가 수면위로 떠올라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문가들은 중남해, 북해, 곤명호...등을 돌아다니며 적합한 수역을 찾는다.

 

중남해는 모택동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곳이고, 신중국성립이후, 중공중앙과 국무원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중남해에는 푸른 물이 있고, 버드나무가 둘레에 심어져 있고, 풀이 잔디처럼 나있으며, 정자와 누각이 있어, 풍경이 수려했다. 어떤 사람은 모주석의 능묘를 영대소도(瀛臺小島)에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남해는 전국의 최고위지도자들이 일을 하는 곳이고,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한 중요활동장소였다. 능묘를 이 곳에 건설한다면, 하루에 수만명이 참관하러 올텐데 그렇게 되면 당무와 국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게다가 영대는 예전에 서태후가 광서제를 연금했던 곳이다. 모주석의 능묘를 그런 곳에 건설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북해, 이화원은 비록 당중앙이 일을 하는 곳은 아니지만, 공원은 어쨌든 인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고, 놀러오는 곳이다. 이곳에 능묘를 만든다면 전체적인 환경이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전문가는 "산정홍성(山頂紅星)"방안을 제안했다. 이를 위하여 향산, 경산, 옥천산을 모두 돌았다.

 

향산방안은 한때 유력하게 검토되었다. 중공중앙은 1949년 3월 하북성 평산현에서 북경으로 이전한 후, 향산에 모택동이 거주하였다. 그해 가을이 되어서야 중남해로 옮겨갔다. 모주석이 향산에 머문 기간은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한 도강작전을 지휘했고, 국가의 건국대계를 토의하고 결정했으며, <<남경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전국을 향한 진군명령>> <<환상을 버리고 투쟁을 준비하라>> <<인민민주전정을 논한다>>등 일련의 강령성문헌을 초안하고 발표한다. 역사적인 지위가 중요한 것 이외에, 이곳에 남경중산릉과 비슷하게 웅혼한 기세로 산을 따라 모주석능묘를 건설한다면 마찬가지로,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향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기세가 개활하며, 경치가 수려하고, 환경이 우아한 장점이 있지만, 북경성에서 비교적 멀었고, 군중을이 방문하기에 불편했다.

 

경산공원은 중남해, 북해와 마찬가지로 황가원림이고, 북경성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지이다. 또한 북경에서 과거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다. 경산의 주봉에 있는 만수정 위에 서면, 날씨가 맑을 때는 북경성 전체를 돌아볼 수 있을 뿐아니라,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궁전건축군 - 고궁 - 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경산은 비록 경성의 중심위치에 놓여 있지만, 정치중심 천안문광장과 비교적 멀고 편벽된 곳이었다.

 

산이나 물을 따라 짓는 각종 방안이 부정된 후, 부지설계조의 눈은 자연히 천안문광장으로 옮아간다.

 

'천안문이북'방안은 능묘를 남북중축선산의 천안문의 북쪽에 있는 단문(端門)의 위치에 두자는 것이다. 이 방안을 제기한 전문가는 당과 국가영도자는 천안문성루에서 열병을 할 때, 행진하는 사람들이 천안문을 향하면서 동시에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을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 곳에 능묘를 만들면, 건물철거문제가 없을 뿐아니라, 현존하는 공원수목도 이용할 수 있다. 이 방안의 결점은 능묘가 고건축물의 중간에 숨어있게 되고, 높은 천안문에 막힌다는 것이다. 광장의 군중들이 아예 그를 쳐다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부지선정과 설계업무가 진행될 때, 당중앙은 '사인방'을 분쇄한 다음 날 즉, 1976년 10월 8일, 수도북경에 모택동주석기념당을 건립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정식으로, "기념당을 건설한 후, 모택동주석의 유체를 담은 수정관을 기념당안에 두고, 인민군중들이 그의 유용(遺容)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고 선포했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전국의 인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사람들은 모주석기념당이 언제 완공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기념당설계소조에 업무일정을 가속화하도록 요청한다.

 

부지선정설계소조는 북경성의 안팎을 모두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찾지 못했다. 마음 속에서 초초해지기 시작하였다.

 

부지선정이 난항에 빠졌을 때, 곡목, 고명(顧明)등 지도자들은 여러번 현장조사에 참여하고, 친히 좌담회를 주재하고, 부지선정과 설계방안을 토론한다. 널리 여러 방면의 의견을 듣고, 일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는 명확한 지시를 내린다. 고명은 이렇게 말한다: "모주석은 <<접련화.답이숙일>>이라는 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실교양군실류(我失驕楊君失柳), 양류경직상중소구(楊柳輕直上重霄九). 열사들은 월궁에 도착했고, 오강은 계수나무꽃과 좋은 술을 바친다. 적막한 생활을 하던 항아도 아주 감격하고, 벽해청천은 소매를 떠치고 일어나 춤을 춘다..."

 

그의 말에 부지선정설계조의 사람들은 부지선정과 설계의 방향을 잡는다. 그들은 능묘의 개념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었다. 비애의 분위기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산중수복의무로, 유암화명우일촌. 여러 방안을 다시 한번 비교하고 논증한 후, 설계조는 최종적으로 천안문광장으로 의견을 모은다.

 

천안문광장은 일찌기 중국인민이 반제반봉건의 오사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광장의 북쪽에는 금벽휘황한 천안문성루가 있어, 이미 위대한 사회주의중국의 상징이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과 다른 당과 국가의 영도자들은 천안문성루에 올라, 전세계에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친히 오성홍기를 올린다. 그후, 모주석은 여러번 이 곳에서 군중대오를 사열하고, 인민군대를 열병했다. 일찌기 해방초기에, 모택동과 주은래는 장래에 천안문광장을 인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해방이래, 천안문광장은 3차에 걸친 확장을 거쳐 이미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 변모했다.

 

천안문광장은 정치, 문화활동의 중심이다. 모주석기념당을 천안문광장위에 건립하여, 휘황찬란한 천안문성루, 광장중앙의 인민영웅기념비, 장엄한 인민대회당, 장려한 중국혁명역사박물관과 함께 완벽하고 위대한 건축군을 형성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천안문광장의 정치내용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고, 더욱 장관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설계조의 인원들은 모주석의 위대한 유체는 인민군중의 속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것이 가장 적합한 곳이다.

 

11월 6일, 중앙정치국은 기념당 부지선정등문제에 대한 보고를 들은 후, "모주석기념당을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건립한다"고 결정한다.

 

범위가 비록 천안문광장과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으로 확정되었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3개의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기념비에 근접하는 방안. 즉, 기념당을 기념비에 붙여서 짓는 것이다. 이 방안은 서로 다른 내용의 기념물이 하나로 만들어, 독립적인 정치적 의미를 상실할 수 있었다.

 

둘째, 정양문(正陽門)에 근접하는 방안. 즉 기념당을 정양문에 붙여짓는 것이다. 이 방안이 부적절한 점은 정양문성루의 높이가 42미터이기 때문에, 기념당을 누르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 천안문광장의 최남단으로 하는 방안. 즉, 정양문을 철거하고, 기념당을 정양문의 위치에 짓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광장 북쪽 끝의 천안문과 멀리서 서로 마주보게 된다. 이렇게 하면 기념당이 시끄러운 길거리에 가까이 둘 수 밖에 없어서,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3가지 방안이 논쟁을 벌일 때, 정양문성루의 존폐문제도 이슈로 떠올랐다. 정양문은 북경에서 현존하는 가장 보존이 잘 된 성루고건축이다. 천안문성루와 남북에서 멀리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는 광장 남면의 윤곽선을 풍부하게 할 뿐아니라, 전문 번화가와 구분시키는 영벽(影壁)의 역할을 했다.이렇게 하여, 정양문을 철거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최종적으로 기념당을 기념비와 정양문의 정중앙의 위치에 두기로 결정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부지는 실제로 원 "중화문(中華門)"의 자리였다. 이 위치는 천안문광장의 중축선에 있고, 기념당과 천안문성루가 멀리서 서로 마주보게 한다. 또한 모주석기념당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적어서, 인민대회당과 혁명역사박물관의 양대건축물의 가운데 있어, '중성봉월(衆星捧月)"과 같았다. 이렇게 하여 모주석의 위대한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었고, 모주석기념당의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었다.

 

기념당의 설계업무와 부지선정업무는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는 실제로 한 가지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이다. 특정지점의 주위환경은 건축의 형식과 배치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부지선정과 동시에, 각종 형식의 건축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그들은 낮에는 현장에서 조사하고, 야간에는 돌아와서 설계방안을 고민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자주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온 건축설계방안 중에서는 능묘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묘(墓)가 있고 곽(廓)이 있고, 능침(陵寢)이 결합된 것이었다. 실체를 위주로 하여 기본적으로 주랑(柱廊)은 없었다. 주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짧고 굵은 주돈(柱墩)을 채용했다. 어떤 경우에는 단주(短柱)가 큰 방형의 화강석 실체를 밭치고 위에는 당기(黨旗)를 덮는 것도 있었다. 또 어떤 것은 연안요동 혹은 오각성을 주제로 하였다. 참배실(瞻仰廳)의 구조에서는, 대부분 지하 또는 반지하에 두었다. 토론을 거쳐, 사람들은 이런 방안이 지나치게 진부하여, 위대한 영수 모주석의 빛나는 일생을 체현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곡목 부총리는 검토한 후 이렇게 지적했다. 모주석기념당의 설계방안을 고려할 때, 착취계급통치자의 능묘건축과는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는 점을 주의하라고 하였다. 착취계급과 노동인민은 대립관계이므로, 그들의 능묘건축은 항상 그들이 신성불가침한 통치자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외국의 피라미드, 중국의 지하궁전은 모두 음삼하고 억압된 느낌이다. 현재 우리는 프롤레타리아계급혁명가의 빛나는 일생을 기념하는 기념당을 설계한다. 장엄하고 숙연하지면 웅대하고 개활적이어야 한다.

 

고명도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주석은 우리 당, 우리 군, 우리 국가의 창조자이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전국, 전세계의 인민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이다. 건축에서 이를 전체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소련의 레닌묘 및 불가리아와 월남의 것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위에는 사열대, 접견청이 있다. 이것이 적합한가? 우리는 혁신해야 한다, 중국역사를 결합시키고, 시대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설계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들은 다시 여러가지 유형의 방안을 설계해낸다.

 

첫번째 유형은 주랑식(柱廊式) 방안이다. 주위에 기둥을 둘러싸고, 주랑의 양쪽 끝을 실제벽으로 하는 것, 열주의 중간을 실제벽으로 하는 것등등이 있다. 주랑식 방안은 기세가 힘있고, 층차가 분명하며, 표현력이 풍부하다.

 

두번째 유형은 군체식(群體式) 방안이다. 기념당을 한 세트의 건축군으로 하여, 외곽선을 풍성하게 하여 기세가 장관이다.

 

세번째 유형은 무주랑식(無柱廊式) 방안이다.

 

1976년 10월 하순, 방안설계는 두번째 단계에 들어간다. 8개 성시의 설계인원은 각각 성시의 의견을 받아온다. 북경에 있는 기관인 북경시 규획국, 북경시 건축설계원, 청화대학 건축학과, 중앙공예미술학원, 북경건축조각창의 건축설계전문가들 및 일부 건축회사의 간부 ,기술인원, 노동자가 참여하여 설계조를 구성한다. 설계조는 좌담회를 개최하여, 의견을 청취한다. 그리고 관련인원들을 모아서 널리 토론을 거친 후, 주랑식방안이 천안문광장등 주변의 건축물 - 인민대회당, 역사박물관등과 조화를 이룰 뿐아니라, 장엄, 엄숙, 미관, 대방함을 쉽게 나타낼 수 있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유형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역량을 집중하여 주랑식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한다. 주랑식방안을 연구하는 기초위에서 대체적인 지붕의 형식에 대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기념성 건축물의 전통형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반은 층을 나누기로 한다. 천안문광장의 여하한 각도에서도 완전한 기념당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체형은 정방형으로 한다.

 

당시 부지선정과 방안설계업무에 참가했던 화덕윤(華德潤, 전 기건공정병과연구설계원 부원장)은 그가 쓴 <<삼십개의 낮과 밤>>에서 이렇게 썼다:

 

1976년 가을, 사람들의 마음은 아주 침중했다. 우리의 조국은 거대한 불행을 당하였다. 경애하는 주총리가 서거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모주석이 우리를 떠났다. 영원히 우리 당과 우리 군과 우리 국가의 각 민족인민의 위대한 영수 모주석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중앙, 전국인대상위회, 국무원과 중앙군위는 수도북경에 모주석기념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9월말, 본인은 상사의 지시를 받아, 두 명의 정치, 기술조건이 모두 좋은 엔지니어를 데리고 전문반점으로 가서 모주석기념당의 규획설계업무에 참가했다. 전국의 26개 단위의 여러 대학, 14개 설게,연구원,연구소와 6개 위원회, 국, 창에서 파견한 59명의 사람으로 규획설계조를 구성했다. 북경시 조붕비 부시장이 책임자이고, 거기에는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설계사들과 건축계의 권위있는 인사들이 많이 참가했다.

 

조붕비 부시장은 전체 인원에게 당중앙의 모주석기념당건립에 관한 결정을 전달했다. 설계에 참여한 전체 인원은 힘을 다하여 가장 짧은 시간내에 설계방안을 완성하여 중앙에 보고하여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난 후, 단위 혹은 지역으로 약간의 소조를 나누어, 업무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3일후에 제1차방안이 나오고, 전체 토론을 거친 후 제2차방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의 업무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다. 그저 하루에 세끼 식사하는 것만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시간은 모조리 설계에 집중했다. 피곤하면 잠을 조금 자고, 깨어나면 다시 그렸다. 남경공학원의 양정보 교수, 상해민용건축설계원 진식 수석엔지니어, 섬서제1설계원의  홍청 수석엔지니어는 모두 고희를 넘긴 분들이었다. 그들도 친히 밤을 세워가며 설계작업에 참가했다. 사람들의 눈은 붉게 되었고, 식사하면서도 설계방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제1차방안에서 비교적 많은 것은 천단(天壇) 식의 원정(圓頂)건축이 있었고, 태묘(太廟)식의 대파옥정(大坡屋頂)도 있었다. 3번의 평가회의를 거친 후 사람들의 방안은 비슷해졌고, 의견도 모여졌다. 높은 대계(臺階), 높은 기둥, 지붕의 방안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모주석기념당의 설계방안은 명실상부한 집단창작이었다.

 

11월 6일, 중앙정치국은 기념당설계방안을 집단적으로 심의한다. 각각의 특색을 지닌 여러가지 건축모형이 영도자들의 앞에 놓였다. 그들은 관련인원의 보고를 청취하면서, 한편으로 눈앞의 건축모형을 주시했고, 각종 방안의 장단점을 논의한다.

 

이번 집단심의에서 세 가지 문제가 확정된다.

 

첫째, 기념당은 천안문광장의 남쪽에 건립한다. 원 "중화문"의 자리위, 즉 인민영웅기념비의 남쪽, 정양문의 북쬭에 둔다.

 

둘째, 기본적으로 3종설계양식을 인정하며, 다시 수정한 후 정식으로 중앙에 보고하여 심의결정한다. 동시에 기념당은 반드시 견고하게 설계되고, 장엄엄숙, 미관대방해야 한다. 중국의 민족품격을 나타내야 하며, 군중들이 쳐다보기 좋아야 하며, 유체의 장기보존에 유리하여야 한다.

 

셋째, 이 공정은 의미가 중대하고, 시간이 부족하니 잘 조직하고 시공하여야 한다.

 

그후, 국무원의 "구판(九辦)"과 기념당설계소조는 여러차례의 토론, 수정을 거쳐 11월 12일 중앙에 보고하여 심의결정하여, 기념당건축방안을 정식으로 확정한다. 그들의 내부용어로 하자면, "종합방안"이다. 이 방안은 기념당의 건축형식을 정방형(正方形), 팔개간(八開間), 중첨옥정(重檐屋頂), 양층의 홍화암석 대기(臺基)를 두고, 한백옥(漢白玉) 난간을 두고, 기둥은 정방형으로 하고 높이는 33.6미터로 한다.  

 

이 방안은 부지선정도 적절하고, 조형도 웅위하고, 필요에도 부합하여 각측이 만족할만한 방안이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모주석기념당의 설계는 당의 군중노선을 관철시킨 결과였다. 기념당공정설계소조의 구성원이었던 심발(沈勃)이 당시 전체설계에 참여할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지금도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모주석기념당건설참가회고>>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무한히 비통한 심정을 가지고, 조붕비등 동지와 곡목동지가 전달한 중앙의 모주석기념당의 건설에 관한 결정과 요구를 전달하는 것을 듣고는 오랫동안 스스로 평정할 수가 없었다. 이때, 나는 과거 모주석을 위하여 중남해 주택을 설계할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 어르신을 위하여 북대하 휴양건축물을 설계할 때의 정경도 떠올렸다. 그 어르신의 목소리, 얼굴, 웃는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현재 건설해야 하는 것은 모주석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공정이다. 마음 속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당시, 이 공정의 개념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나는 레닌묘를 참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모주석기념당의 건설요구조건은 확실히 복잡했다.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만일 주총리가 살아계셨다면, 그는 사람들을 이끌어 아주 멋있게 이 공정을 마무리지었을 것이고, 모주석이 돌아가시더라도 영광스럽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총리가 먼저 떠났다. 모주석도 우리를 떠났다. '사인방'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더욱 거리낌없이 활동할 것이다. 아마도 기념당공정에 간여하여 교란시킬 것이다. 일시에 만감이 교차했고, 우려가 많았다.

 

인민대회당을 건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주석기념당이라는 이 전국인민이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건축물은 먼저 전국의 저명한 건축전문가를 북경으로 불러서 방안검토에 참여하게 하였다.

 

각 전문가와 관련 지도자들의 연구를 거쳐, 가장 먼저 제출한 건축장소는 세 곳이었다: 첫째는 향산, 둘째는 천안문광장, 셋째는 경산. 처음에 모두 제출한 방안인 향산과 경산방안의 규모는 아주 컸다. 천안문광장방안의 건축규모도 아주 컸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모두는 모주석을 그리워했고, 중국인민에 대한 위대한 공헌을 그리워했다. 거대한 건축물만이 모주석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체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건축방안은 천안문광장의 남쪽을 거의 전부 차지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안은 면적이 십여만평방미터에 달하기도 하였다.

 

모든 전문가들 중에서, 남경공학원 양정보 교수가 제출한 방안만이 50평방미터의 2층높이 건축이었다. 양정보 교수는 냉정하게 천안문광장의 전체환경을 고려했다. 기념당은 천안문광장의 유기적인 구성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건축규모가 합리적이어야 기념당의 휘황한 이미지를 돌출시킬 수 있고, 천추만대에 그 빛을 빛나게 할 수 있다. 양교수가 내놓은 방안은 우리들에게 큰 계시를 주었다.

 

전국의 저명한 건축전문가들이 방안을 제출하고 북경을 떠난 이후, 남은 것은 청화대학, 서안설계원, 건공부설계원, 북경시설계원의 교수와 건축가들이었다. 종합방안의 장점을 모아서 실시방안을 제출하는 것을 책임졌다. 다만, 당시 지하공정에 관련된 것은 기밀유지에 엄격했다. 건축가들도 몰랐다; 기념당은 군중들이 참배하는 외에 다른 무슨 활동이 있을 수 있는데, 아무도 확실히 말하지 못했다; 또한, 기념당의 관리업무, 유체보호, 경비업무등은 모두 효과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은밀해야 했고, 참배활동을 방해해서는 안되었다. 이런 주제를 표현하기에는 상당히 복잡했다. 그러다보니 건축가들도 일시에 어떻게 업무를 시작해야할지를 몰랐다. 당시 시공을 책임지던 총지휘 이서환(李瑞環)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설계방안이 확정되지 않다보니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재촉했다. 하루빨리 시행방안을 내놓으라고. 조붕비 동지와 나도 마음이 급해서 머리에 불이 날 정도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붕비동지와 상의를 거쳐, 내가 시작했다. 각 교수와 건축가들이 연구한 기초 위에서,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하룻밤의 시간을 들여, 기념당설계방안의 초안설계도를 내놓는다.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북경시 건축설계원 방백의 건축가에게 정식방안을 그리도록 한다. 이 방안은 65평방미터의 평면이고, 나중에 모두 함께 연구와 수정을 거쳐, 경비와 관리용 방을 증가시켰다. 평면은 72평방미터로 늘어났다. 곡목 부총리는 섭검영, 화국봉에 보고하여 승인받은 후, 기념당공정실시방안을 확정된다. 곧이어 다음단계 설계업무와 굴토작업은 시작되었다.

 

기념당의 전체설계를 할 때,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기념당의 정문이 북쪽을 향하는데, 만일 천안문광장의 군중이 집회를 할 때, 군중은 모두 천안문을 향하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기념당을 등지게 된다. 이것은 부적절한 것같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연구검토를 거쳐, 이것은 확실히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모두 일시에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다. 나중에 조붕비가 한 가지 의견을 제기한다. 기념당의 동서 양쪽을 약간 줄여서, 양측 광장면적을 확대하여, 일단 군중대회가 개최되면, 기념당의 동서양측 및 남북방향이 모두 군중으로 둘러싸이게 하였다. 이렇게 하면 모주석이 군중들의 속에 들어있게 된다. 군중들이 등지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의견은 금방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기념당의 정원의 동서양측은 안으로 20미터 축소되어, 현재의 배치로 되었다.

 

1976년 9월 18일 오후, 당중앙은 천안문광장에서 <<위대한 영수 및 도사 모택동 주석 추도대회>>를 개최한다. 군중은 위의 방식대로 배치되었고, 효과는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