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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백규(白圭): 중국상인의 비조

by 중은우시 2010. 3. 20.

글: 유계흥(劉繼興)

 

상(商)나라때부터 청나라말기까지, 중국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나타났다. 그중 학계에서 상성(商聖)으로 공인된 사람은 오직 3명 뿐이다: 도주공(陶朱公), 백규(白圭) 그리고 호광용(胡光鏞)

 

도주공은 바로 범려이다. 호광용은 호설암이다. 이 두 사람의 사적은 모두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상성인 백규에 대하여는 아마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 백규는 바로 중국상인의 비조(鼻祖)이다.

 

백규는 풍운이 교차하는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났고, 위(魏)나라의 고관을 지낸 바 있다. 그는 동주시대 낙양사람이다. 상업에 뛰어나서 부를 이루었고, 천하에 명성을 얻었다. 사마천은 <<사기.화식열전>>에 그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며 그를 "치생조(治生祖)", 즉 민생을 경영하는데 비조, 즉 상업의 조사(祖師)라고 칭했다. 또한 사마천은 백규는 상업경험이 풍부할 뿐아니라, 그는 이를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그의 경상(經商) 이론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식견도 있었고, 효과도 있는 것이었다.

 

상업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백규는 오랫동안 상업에 종사하면서, 경상이론을 확립한다. 그는 경상은 반드시 "낙관시변(樂觀時變)"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자주 농업생산의 동향변화와 시장의 시세변화에 주의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시기를 잘 잡아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다른 사람이 취하면 나는 내놓는다"는 경영원칙을 취했다. 매년 양식이 풍성하게 나올 때면 오곡을 사들이고, 비단, 칠등을 팔았다. 양잠으로 비단이 나올 때면 비단을 사들이고, 양식을 팔았다. 그는 민중의 생활필수품을 운영하면 시장이 넓고 판로도 많으며, 다른 사람과 매매가격으로 다툴 필요가 없이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는 시기에 따른 가격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한번은 상인들이 한꺼번에 면화를 투매했고 가격이 아주 낮아졌다. 백규는 이를 보고, 수하에게 시켜서 면화를 구매한다는 팻말을 내걸게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재고를 모두 사들였다. 나중에 장마가 오래 지속되면서, 면화수확이 좋지 않았다. 수중에 면화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인들은 사방으로 면화를 찾아다녔다. 이때 백규는 비싼 가격으로 재고를 모조리 팔아넘겨서 큰 이윤을 보았다.

 

백규는 매 해의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의 예측을 아주 중시했다. 그리하여 기후변화를 열심히 연구한다. 그는 양식생산의 풍년흉년에 대한 규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2년을 한 주기로 하면, 약간의 변화발전의 규율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매3년마다 큰 변화가 있다. 예를 들의 앞의 3년간이 풍년이었으면, 그후 삼년은 왕왕 가뭄이 든다. 가뭄이 든 후에는 홍수가 난다. 홍수가 난 후에는 다시 풍년이 든다. 풍년과 흉년사이에, 곡물의 가격은 배이상 차이가 난다. 백규는 또한 상업을 하는데 있어서 "취여관(取與觀)"을 확실히 정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기회가 오면 독수리가 사냥감을 채가듯이 과감해야하고 조그만큼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된다. 재산관리에서 우물쭈물하며 관망하는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백규는 나라의 재산을 관리할 때도 큰 것부터 챙겼고,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했다. 그리고 경영에서는 작은 이익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궤계를 써서 속이지 않았다. 그는 화물유통을 생산발전과 연계시켰고, 이렇게 하면 경영으로 돈을 벌 ㅅ 있을 뿐아니라, 생산에도 유리했다. 그는 남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메우고, 풍년에 거둔 것으로 흉년에 부족한 것을 메우고, 전국각지의 물자를 서로 모자라는 곳에 지원하게 해주면 보국안민이 이루어지고 국가는 부유해진다고 보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러했다: 만일 어느 지방에서 양잠을 하여 비단이 많이 나면, 이들 제품을 구매하는데, 이 동네에서 부족한 곡식등을 주고 바꾼다. 만일 어느 지방에서는 양식이 많이 생산된다면, 그들의 양식을 사는데, 비단 칠 등의 필수품을 가지고 교환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화물이 유통되면 인민생활에 유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은 일거양득이고, 나라에도 이롭고 백성에게도 이롭다.

 

<<사기.화식열전>>에는 백규가 "욕장전, 취하곡; 장석두, 취상종(欲長錢, 取下穀, 長石頭, 取上種)"의 경제사상을 주장했다고 적었다. 그 뜻은 자신의 경제적이익을 늘이기 위하여 장사를 하거나 자신이 먹을 때는 좋지 않은 곡식을 먹고, 만일 종자로 삼는 것이라면 다음해의 풍성한 수확을 위한 것이므로 가장 좋은 곡식으로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최상의 곡물만이 다음해의 풍성한 수확을 보장해줄 수 있다. 백규가 생활하던 시대에 곡물은 시장에서 가장 주요한 상품이었다. 소비자들은 통상적으로 일반 평민이다. 그들의 소비수준은 그저 배만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그러므로 상인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상품은 하등급의 곡물이었다. 귀족이나 대지주등에게만 상등급의 곡물을 제공했다. 우수한 종자는 농삿꾼들에게는 재부의 기초이다. 그리고 상인들에게도 공급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좋은 곡물은 농민들이 파종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농민의 이익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상인의 장기적인 안목이기도 하다.

 

박리다매의 경영원칙은 백규가 숭상하던 경영원칙이다. 백규는 큰 이익을 추구했다. 그러나, 큰 이익은 반드시 값비싼 상품을 거래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값비싼 상품은 일반인들이 구매할 수 없는 것이었고, 판매량도 한계가 있다; 저렴한 상품은 반대로 일반민중의 필수품이고, 수요량이 많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상품의 품질도 중시했다; 품질이 가장 좋은 상품만이 신용을 얻을 수 있고, 시장에서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백규가 살던 시대는 정치,군사의 지위가 경제의 지위보다 높았다. 그러나, 백규는 경제의 중요성을 정치,군사와 동등시했다. 그는 "내가 생산을 주관하는 것은 이윤, 여상이 모략을 세우고, 손자오자가 병법을 쓰고, 상앙이 법을 행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경상에도 큰 지혜와 자질이 있어야 하고 인의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에 재난과 전쟁과 세금부담이 가중되면서, 투기전매, 매점매석, 값후려치기등의 현상이 성행했다. 일부 부유하지만 어질지 못한 상인들은 이를 통해서 단기적인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것은 백규의 "이민후재취재(利民後再取財, 백성을 이롭게 한 후에 재물을 취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백규가 보기에, 맹목적으로 이익최대화를 추구하는 자는 사실 안목이 짧은 쥐새끼와 같은 무리들이다. 치국평천하의 기백을 가진 자만이, 항상 생산자를 고려해주고, 장사도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다.

 

백규는 일대의 상업대가이다. 후세 상인들이 업종의 조사로 모실만하다. 송나라 경덕4년 송진종은 백규를 "상성(商聖)"에 봉한다; 민간에서는 백규를 "인간재신(人間財神)"이라고 부르고 신패를 만들어 공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