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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관중(管仲): 중국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인물

by 중은우시 2010. 3. 14.

글: 조염(趙焰)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관중도 공자와 동시대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관중은 공자보다 나이가 확실히 많았다. 시간을 추산해보면, 공자가 출생했을 때는 이미 관중이 사망한지 몇년이 지난 때였다. 만일 관중과 공자를 비교하자면, 관중의 위대함을 바로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비록 <<논어>>에서 스스로 "누구든지 나에게 집정하게 해준다면, 일년이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삼년이면 큰 성과를 낼 것이다"라고 자랑한 바 있지만, 사실은 공자가 말로 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공자가 52세가 되던 해에 노나라 임금의 요청으로 중용되는데, 3년후에 노나라를 떠날 때, '삼년이면 큰 성과를 낼 것이다'라는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소정묘(少正卯)를 죽여서 노나라의 사상자유를 제한하고, 노나라의 경제발전도 제약했다. 관중과 비교하자면, 공자는 관중처럼 농민들에게 어떻게 농사지을지를 교육시킬 줄도 몰랐고, 어떻게 인재를 선발할 지도 몰랐으며, 더더구나 경제에는 비상한 수단을 써야 발전한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고, 군사에는 음모를 써야 하고, 외교에는 겉과 속이 달라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공자는 그저 주례를 회복해야한다는 논조만을 내세웠고, 천진하게 그가 주창하는 이데올로기만 실현하면 치국평천하를 이룰 수 있고, 국가와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를 벗어난 이상주의자도 그 자체의 가치는 있겠지만, 이렇게만 해서는 도저히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현대정치의 각도에서 보자면, 관중의 재능은 군사적, 정치적인 것을 제외하고도 경제, 철학, 법률, 외교, 교육, 인재, 경영 및 도덕윤리의 각 방면에 걸쳐 있다. 치국평천하의 실천경험이 있을 뿐아니라 이론적인 기초도 튼튼했다. 이치대로 보자면, 이처럼 정치적인 국면을 개척하고, 역사발전에 영향을 주고, 사회생산의 거대한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숭고한 사상적인 지위와 역사적인 지위를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관중의 지위는 동시대에 소위 재능은 있으나 시대를 잘못만난 '공리공담'자들, 예를 들어, 공자, 맹자, 노자, 장자만 못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조차 관중은 <<관안열전(管晏列傳)>>에 포함시켜 합쳐서 겨우 수백자만 할애했을 뿐이다. 기나긴 중국역사에서 청나라말기의 양계초만이 제대로 그를 평가했다. 관중을 '중국최대의 정치가'라고 한 것이다. 지금 보자면, 양계초의 이러한 견해는 정확하기 그지없다고 할 수 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공자가 관중에 대하여 평가한 것이 <<논어>>의 두 곳에 나온 다는 점이다. 한 곳은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관중이 '검박(儉朴)'하냐고 물은데 대하여 공자는 '관중은 시장의 점포를 자기 것으로 하였으니, 검박하다고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자공과 자로가 공자에게 관중이 공자규를 배신하고 제환공을 보좌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은 데 대한 답변이다. 공자의 답변은 "관중이 제환공을 도와서 천하의 패주가 되게 하였다. 만일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머리를 흐트리고 소매를 열고, 야만족의 통치하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취지이다. 이를 보면, 공자는 전체적으로 관중에 대하여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관중의 인간됨됨이에 대하여는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점이 있는 인물이므로 극력 제창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관중은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 이는 중국전통문화의 원인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문화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인식'에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이 항상 깊이가 불충분했다. 이해능력이 부족하고 편차가 있었다. 중화문명은 지금까지 계속하여 농업문명이었다. 일정한 정도로, 협소하고 진부한 면허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자각을 지나치게 믿으면서, 인도(人道)를 중시하지 않고, 이성의식이 강하지 못했고, 과학정신이 결핍되어 있다. 허위를 가려내는 시스템, 혁신의식 및 법제정신이 박약하다는 등등의 문제가 있다. 그중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은 공자,맹자가 제창한 "군자의 도'라는 것이 공중누각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성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이것은 허황된 논의가 되고 만다. 현대철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공자,맹자의 군자지도는 '성선설'의 전제하에서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생활에서 인간성은 원래 시와 비가 없는 것이고, 선이나 악을 논할 것도 없다. 그저 복잡다단할 뿐이다. 유가는 출발점에 문제가 있다. '군자지도'를 결정하는 전체 철학체계에 문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군자지도로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나라를 다스리려는 방식은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인은 말을 중시하고 행동을 중시하지 않는다. 명분을 중시하고 실질을 중시하지 않는 습관과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는 중국문화를 오랜 기간동안 실무자와 조작자에 대한 충분한 연구나 존중이 없었다. 관중은 관리자이다. 그리고 제도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역사는 후세인들이 쓴 것이다. 관리자에 있어서, 여러 사상과 인식은 대부분 구체적인 조치에 반영된다. 세월이 흐른 후, 진정으로 후세인들의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이미 바뀌어 흐릿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역사시기를 정리할 때, 왕왕 옛날의 문자자료를 통해서 찾았지, 세속의 사람들을 통하여 비교하고 감별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은 역사의 정리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부 관리자들의 뛰어난 점과 고민한 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역사의 정리자들은 대부분 실무경험이 없는 문인들이다. 이전의 관리자들에 대하여 현실에 부합하는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그들은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잠재의식 속에서 질투를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의 평가는 항상 층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 중의 차이는 아마도 인성의 어두운 성분일 것이다. 역사는 복잡하다. 역사를 분석할 때, 이런 세부적이고 지엽말단적인 것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고습관과 전통으로 인하여, 중국문화는 실질적으로 진부하지만, 비장한 색채를 지닌 방식을 더욱 숭상했다; 혹은 구속받지 않고 장난정신을 지닌 노자장자를 숭상했다; 관중의 이성과 실제와 비교하자면, 공자맹자의 방식은 '안되는 줄 알면서 이를 하는 것'이었고, 중국문화와 개인의 도덕적 요구에 더욱 부합했다; 노자장자는 더욱 순수했고, 하나의 완벽한 인생사상이었다. 그리고, 공자맹자, 노자장자와 같이 일생동안을 '수신(修身)'만 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할 수가 있다; 관중과 같이 도덕적으로 하자는 없게 된다. 역사의 기술자들은 항상 감정적인 요소에 좌우된다. 사람들은 공자의 고산앙지(高山仰止), 노자의 지혜무변(知慧無邊). 맹자의 영기발발(英氣勃發). 장자의 소탈자연(瀟脫自然)을 더욱 좋아하고, 그들의 문화와 사상이 관중보다 높다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