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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말기의 영국인들

by 중은우시 2010. 2. 28.

글: 설이(雪珥)

 

"대청국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영제국은 힘을 아끼지 말고 대청국이 전면적인 개혁을 진행하도록 도와야 하고, 대청제국이 모든 반란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중국의 안정을 유지하고, 중국유럽의 무역을 추진하는 것이 대영제국의 최대이익에 부합한다. 영국의 대중국정책은 반드시 '충성, 솔직, 우호적'이어야 한다. 영국이 대청국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논조가 무슨 '대청인민의 친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영국의 유명한 매파이자 두번의 아편전쟁의 의사결정자인 Henry John Temple Palmerston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일찌기 중국을 쳐야한다고 주장한 강경주의자이다. 그런데, 1863년 7월 6일, 수상의 신분으로 영국의회에서 장문의 연설을 했는데, 거기에서는 명확하게 중국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밝혔다.

 

도대에 무슨 이유로 이 강경한 인물이 온순하고 우호적인 비둘기로 바뀌었을까?

 

모든 것은 공친왕 혁흔의 실용적인 외교정책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엉망이고 부패한 정권이라 하더라도, 생사존망의 위기에 닥치면 마지막 고함을 질러야할 때가 오면, 어느 정도 시류에 맞게 바뀌기 시작하는 법이다. 1862년초, 태평군이 동남의 주요도시 닝보와 항저우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상하이로 창끝을 향하자, 대청국의 상층핵심부는 엄청난 압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중앙의 일상정무를 처리하던 공친왕은 민감하게 느꼈다. 반드시 동원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에는 얼마전까지 총끝을 마주하고 싸웠던 영국, 프랑스등 열강도 포함된다. 이들과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야 비로소 대청제국의 동남부를 지킬 수 있고, 대청제국을 구할 수 있다. 시간을 오랫동안 지체시킨 함대구매계획도 신속히 의사일정에 올렸다.

 

일찌기 전해인 1861년, 대청제국에서 외국인으로서 대리총세무사(代理總稅務司)를 맡고 있던 영국인 Robert Hart는 공친왕에게 건의한다. 영국으로부터 수십척의 함정을 구매하여 신식해군을 만들도록. 그렇게 하면 전선에서 태평군에 대한 우세가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건의는 영국공사인 Fredrick Wright Bruct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하트는 소요비용은 아편관세를 인상시키고 아편에 대하여 화물세를 징수함으로써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브루스는 첫번째 상주영국공사였다. 그의 형은 바로 유명한 James Bruce(Earl of Elgin)이며, 공친왕의 첫번째 외국인적수였다.

 

하트와 브루스의 계획은 즉시 공친왕의 주목을 받는다. 그의 계산으로, 이것은 일거양득의 좋은 일이었다. '태평군'을 타격하면서, '열강'을 다독거릴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 병이 위중하던 함풍제에게 보고서를 쓴다. 함풍황제도 아주 흥분해서 바로 증국번, 관문, 호림익등 전선의 장수들에게 내려보내어 의견을 구한다. 조야상하의 지지를 획득했지만, 하트가 내놓은 예산은 엄청난 숫자였다. 150여만냥백은이었다. 이 숫자는 당시에 빈약했던 재정의 대청왕조 중앙지도자들에게 어려움을 남겼다. 할 수 없이 절충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을 깍아야 했다. 태평군이 항저우를 차지하고 난 후에, 하트는 예산을 80만냥으로 깍는다. 공친왕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하트에게 영국의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던 총세무사 Hotario Nelson Lay(당시 Hart는 Lay의 업무를 대리하고 있었다)에게 보고하여 이들 군함을 구매하도록 지시한다.

 

이것은 큰 주문이다. 중국의 구매능력은 영국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6척의 포함과 3척의 쾌속정, 그리고 인원을 풀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포함 1척마다. 함장 1명, 장교 2명, 조타수 2명, 포수 2명, 수병 10명을 배치했고, 쾌속정에는 함장 1명, 장교 1명, 조타수 1명, 포수 4명, 수병 30명을 배치했다. 이는 영국의 군수물자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영국장병이 해외에서 취업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영국의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대청제국의 첫번째 대형국제조달이었다. 공친왕 혁흔이 중앙의 일상정무를 주재한 이래로 그가 결정한 최대의 재정지출이었다. 그런데, 기괴한 일은 이같은 개혁조치에 대하여 전혀 예상밖으로 보수파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았다. 흉맹한 태평군의 앞에서 보수파들도 대국을 살피는 지혜는 있었던 것이다.

 

이는 대청제국이 기술과 인재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시험이었다. 이렇게 하여 완벽한 '서양' 함대를 구매하고, '국유자산'으로 되면서, 대청제국의 중앙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국내외의 적대세력과 마주할 자신이 생겼고, 특히 국내의 적대세력의 도전을 물리칠 자신이 생긴다. 이때 청나라정부는 또 하나의 "도입-소화-흡수"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그것은 "양창대(洋槍隊)"(나중에 常勝軍 - Ever Vitorious Army - 로 명칭을 변경함)이다. 이는 대평천국과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다.

 

대청제국의 중앙집권체제는 이런 핵심적인 순간에 아주 효율적으로 체제의 장점을 발휘한다. 중앙정부의 신속한 결정으로 하트는 즉시 (1862년 2월 24일) 영국에 급전을 보내어, 영국의 Lay에게 북경이 이미 양광총독 노숭광에게 함대의 제1차대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고 알린다.

 

이때, Lay는 이미 영국의 해군대령이자 유명한 북극탐험가인 Sherard Osborn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오스본으로 하여금 함대사령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구매가 개시되었다. 그런데, 이때, 영국의회는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군수물자판매프로젝트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과 초기에 영국의 대중국정채의 주류는 여전히 '함포정책'이었다. 청나라정부에 대한 압박이 위주였다. 그러나, 중국내전으로 인한 거대한 파괴력은 영국의 중국내 상업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이때 비로소 청나라정부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그리하여 정책을 조정해서 청나라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중국의 개혁과 개방과정에 더욱 침투하여 중국정권의 '영국화'를 시도한다. 이는 영국정계의 장기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컨센서스를 이룬다.

 

이들은 단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통적인 함포정책의 지지자들 및 종교 혹은 정치이념등 각종 이유로 태평천국에 호의적인 사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오스본이 중국에 파견나가 근무하겠다고 신청하자, 영국내부는 중국정책을 놓고 갈등이 공개화 표면화된다. 1862년 7월 25일, 영국하원의 변론에서 Sir J. Hay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스본은 영국장교로서 도대체 "중국의 반란자" 혹은 "부패한 왕조"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것인가? 일단 잘못 처리하게 되면 이는 완전히 영국을 예상도 못한 중국내전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원인 Colonel Syke는 이렇게 지적했다. 영국,프랑스군대는 중국관군과 협력하여 닝보를 해방시킨 후, '해방자'들이 이도시에서 행한 파괴약탈은 태평군보다 훨씬 심했다. 당시 중국에 있는 일부 영문신문에서도 이를 보도했다: "(관군)이 수시간내에 파괴한 것은 반란군이 닝보를 점령한 5개월동안 파괴한 것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연합군이 태평군의 손에서 닝보를 재탈환한 것보다 더욱 황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고, 불의한 것은 없다. 우리는 공정하게 영국황실함대 함장의 후안무치한 행위를 역사책에 영원히 기록해야 한다" 1년여후의 타임지(1863년 7월 17일)에서도 군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관청이 고용한 양창대는 닝보에서 대규모의 파괴를 자행하고, 서양상인과 중국관청이 모두 싫어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을 철수하도록 조치했다.

 

Syke는 이렇게 말했다. 상해에서 어떤 서양인도 태평군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태평군은 계속하여 서방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서방인들은 적극적으로 관군을 도와서 참전했다. "우리가 태평천국을 대하는 태도는, 이리가 양을 대하는 태도이다. 양이 상류에서 물을 마시건 하류에서 물을 마시건, 결과는 모두 같다는 것이다" "황포강의 평정은 테임즈강과 같다" 그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중국에서의 이런 군사행동을 중국에 주재하는 영국관리들이 알고는 있는가? 의회에 보고는 했는가?"

 

Syke는 영국에서 태평천국에 호의적인 소수의 의원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영국의 외교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했다. 왜 중국에서 출판된 영문신문상 태평천국에 유리한 보도는 런던으로 보내지 않는가? 이는 유럽에서의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그는 브루스등이 태평군을 토비(土匪)라고 칭하는데 대하여 이는 고의로 흑백을 전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을 통하여 극단적으로 말했다: "만일 그들이 토비라면, 그렇다면, 네덜란드인들이 스페인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투쟁한 것도 모두 토비인가? 우리 자신의 영연방도 토비들이 만든 것인가? 아메리카 식민지 인민이 종주국의 수중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것도 토비인가? 미국의 남부연맹이 북부연맹에 대항한 것도 토비인가? 만일 영국의 주닝보영사인 샤프리영사가 역사를 더욱 잘 공부했더라면, 그는 감히 단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Whitebread의원은 영국군관들이 중국정부를 위하여 일한다면, 그 근무연한은 영국해군의 근무기간으로 볼 수 없고, 영국에서 얻은 급여, 진급등은 영국정부와 무관하며, 황실해군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며, 만일 중국에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더라도, 영국의 여하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런 논쟁에서 최종적으로 '친중국'측이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오스본의 함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 의회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영국수상 Palmerston이 친히 나서서 의회에서 장문의 연설을 하면서 오스본함대를 변호하고, 친중국정책을 제시한다.

 

매파로서, Palmerston은 두차례의 아편전쟁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할 뿐아니라, 인도민족의거도 진압했고, 러시아에 대하여 크리미아전쟁도 일으키고, 미국내전시 남부군을 지지하는 등 여러 사건에서 대활약을 했었다. 그는 연설에서 일부 의원들이 오스본이 '해적'을 소탕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크게 화를내면서, 오스본이 중국해안의 '토비'들을 소탕해야만, 중국유럽의 무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중국을 노린지 이미 오래되었고, 영국은 중국이 재정체계를 대거 정비하고, 강대한 육해군을 건립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야 침략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량이 있어야, 비로소 러시아, 프랑스가 경거망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거의 공친왕이 분석한 것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열강들간에는 비록 동상(同床)이지만 이몽(異夢)을 꾸고 있었다. 중국은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Palmerston의 연설은 대영제국의 대중국정책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타임스에 따르면, Palmerston의 연설이 끝날 때,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1개월여후, 빅토리아여왕은 오스본함대계획을 승인한다. 영국추밀원은 곧이어 칙령을 반포하고 이 계획을 비준한다.

 

공친왕은 적합한 시점에 적합한 패를 내놓았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자신의 수도로 진격했던 무장한 강적을 동지로 바ㅜㄴ다. 이때부터 대청제국과 대영제국은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대청국이 30년간의 국제평화시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동안 '양무운동' 및 '동치중흥'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