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당소의(唐紹儀)의 부침

by 중은우시 2009. 11. 18.

글: 설이(雪珥)

 

"당승(唐僧)"은 채식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나라의 관료라면 다 아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적 기본지식이 너무나 모자란 것이다.

 

"당승"의 이름은 "당소의(唐紹儀)"이다. 그는 청나라의 장관급 고위관료이고, 나중에 중화민국의 초대 총리를 맡는다. 당시 사람들은 일기나, 서신에서 그를 "삼장(三藏)"이라고 지칭했다.

 

당소의는 당승처럼 외모가 아주 단정했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로는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걸출한 외모를 가지고 중국의 외교부장 내지 총리를 지내면서, 나라의 체면을 드높였다.

 

"삼장"은 채식을 하지 않았고, 잡식이었고, 뭐든지 다 먹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졸업생인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미국식의 정치 '양식'인 민주, 문명을 항상 입에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이 그를 아주 좋아했다. <<뉴욕타임즈>>등 유명한 신문에서도 그에 대한 보도를 수시로 내보냈다. "양식"이외에 당소의는 중국특색의 요리도 아주 잘했다. 굽고, 삶고, 지지고, 볶으면서,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두었다.

 

중국역사 특히 근현대사에서 "풍파(風派,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는 사람)"인물이 적지 않은데, "풍파" 인물들 중에서 진정으로 수준있고, 고급이며 규모를 갖춘 사람은 당소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1909년은 당소의에 있어서, 좋지 않은 해였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연초에 그는 미국에서 외교일로 바빴다. 하나는 동북의 개발에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일황제의 요청에 따라 중국,미국,독일의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전세계에서 주목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당소의가 1908년 가을에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에 도착한 후, 미국신문은 그를 추적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심지어 2면에 걸친 장문의 보도를 내놓고, 당소의의 사진에 지면을 크게 할애했다.

 

당승이 서천(西天)에 도달하니,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것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글자가 없는 불경밖에 가져올 수가 없었다: 대청국의 개혁개방의 기수인 원세개가 돌연히 그리고 기이하게 '건강원인'을 들어 2선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1주일후(1월 8일), 북경은 당소의를 소환한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 <<로스앤젤레스타임즈>>등을 포함한 미국의 유명신문들은 동시에 이 소식을 실었다. 그리고 당소의가 소환된 것은 원세개사건에 연루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의 <<크리스쳔사이언스모니터>>는 1면을 할애하여, <<근대중국은 젊은 미국에 큰 기회를 제공한다(Modern China Offers Great Opportunities to the Young American>>는 글을 실었다. 당소의의 사진은 섭정왕 재풍의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그리고 큰 글자체로 이렇게 밝혔다: "원세개의 운명은 중국의 외교정책과 중미관계의 발전에 관계된다"

 

원파(袁派)인물들 중에서 당소의는 원세개를 따라 가장 먼저 물러난 인물이었다. 그후 민정부시랑 조병균(趙秉鈞), 우전부상서 진벽(陳璧), 동삼성총독 서세창(徐世昌)등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혹은 건강문제로 혹은 부패문제로 혹은 업무상 필요에 따라 겉으로는 승진했지만 속으로는 배제되었다.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당소의와 원세개가 한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전영웅주의의 미담이 있다.

 

당소의는 광동사람이다. 부친인 당거천(唐巨川)은 차상인으로 대외무역을 했다. 아주 평범했는데, 그에게는 비범한 숙부가 있었다. 이름은 당정추(唐廷樞)이다. 당정추는 청나라의 첫번째 외자기업의 '수석대표'였고, 저명한 Jardine Matheson & Co(怡和洋行)의 매판(買辦)이었다. 나중에 이홍장이 경제개혁을 할 때 그의 심복이 되어 윤선초상국, 개평광무국의 설립을 주재하고 참여하고한다.  관료사회와 상인사회, 국내기업과 외국기업, 민영기업과 국영기업의 사이를 오가면서 모조리 다 섭렵했다.

 

개혁개방덕분에, 대청국은 내우외환의 와중에 시대를 따라서 집권기반을 확대했다. 당씨집안과 같은 '신흥계층'은 금방 대청국 조직인사부서의 핵심배양대상으로 떠오른다. 당소의는 12살이 되던 해(1874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7년간이나 생활했다. 나중에 당소의의 행동을 보면, 이 기간동안 그는 유려한 영어실력을 닦았을 뿐아니라, 정치를 쇼처럼 생각하는 미국식 품격도 배워온다. 칭찬할만한 일이라면, "양복을 걸치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중국의 마음이다". 당소의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야면서 중국실정에 맞지 않는 바나나식 인물로 바뀌지 않았고, 중국과 서양을 잘 융합하여, 다문화소양을 기초로 미국식 정치쇼의 무기를 가지고, 신속하게 청나라의 관료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1881년, 나이 겨우 19살의 당소의는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정부에서 전문성과 충성심을 인정받은 차세대 주자로서, 조선에 파견된다. 그리하여 조선의 해관방판인 독일인 P.G. von Mullendorff의 비서가 된다. 광활한 대지에서 그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중일이 각축하는 조선은 당소의에게 무대를 제공해주었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22세의 당소의는 이로 인하여 26세의 원세개와 만난다. 당시 조선의 친중국고관들은 친일파에 쫓겨서 해관공서로 피신와 있었는데, 원세개가 이들을 보러 찾아왔다. 이때 당소의가 친히 총을 들고, 문입구를 지켰다. 그의 영준한 모습은 원세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막역지교가 된다. 원세개는 이때부터 당소의의 정치적 발전을 많이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이끌어준다. 더욱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0년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정보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항일에서 가장 강력한 원세개를 암살하려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를 피난하게 하기 위하여 당소의는 친히 두 자루의 총, 두 자루의 칼, 두 필의 말을 가지고 밤을 세워 원세개를 영국군함까지 호송한다.

 

바로 원세개의 적극적인 도움에다가 원래 이홍장과의 특수한 관계까지 덧붙여져서, 당소의는 청일전쟁이후, 중국의 초대 조선총영사가 된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후 다시 양광총독으로 가게 된 이홍장을 따라 고향으로 가서 광동에서 관직을 지낸다.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나갈 때는, 그가 원세개를 도와서 가장 난감하고 미묘한 외교사무를 처리해주었다. 원세개가 1900년 봄여름교체기의 의화단의 난과 팔국연합군의 화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많은 공로를 세운다. 1901년, 원세개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어 조정의 중신중 하나가 된다. 당소의는 천진해관도로 임명되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유명한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요직이었다.

 

1904년, 영국인들이 티벳으로 쳐들어왔다. 중앙정부는 당소의에게 대표간을 이끌고 인도로 가서 영국과 담판을 하도록 결정한다. 이때부터 42세의 당소의는 홀로 나르기 시작한다. 당연히 관료사회의 잠규칙에 따르면, 그는 원세개파의 인물이다. 협상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당소의의 외교재능이 조야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신속히 발탁되어 외교, 국세, 교통등의 분야을 맡게 된다.

 

당소의의 업무스타일은 시원시원했고, 다른 사람의 체면을 고려해주지 않는 것이어서 상당히 미국식이었다. 그리하여 적이 적지 않았다. 그는 개인생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신보>>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당소의가 차관을 맡고 있을 때, 급여가 낮아서, "들어오는 돈이 쓰는 것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세개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원세개는 그를 광동으로 가서 월한(광동-무한)철도를 담당하고록 하려 하나, 중앙정부에서 거절당한다. <<신보>>의 당소의에 대한 평가는 "배금주의자이다"라는 것이다.

 

한림원시독 마길장의 탄핵내용을 보면, 당소의가 우전부 부부장을 맡고 있을 때, '그가 쓰는 사람은 모조리 고향의 친척이고, 뇌물을 받았다. 부하들중 많은 사람은 뇌물을 주어서 관직을 맡은 것이었다'고 한다. 비록 사료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당소의가 1910년 우전부장을 맡은 후 한 행동을 보면 탄핵내용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닌 것같다.

 

<<민립보>>의 보도에 따르면, 당소의가 우전부장이 된 후, "매일 백금을 들여서 먹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거동은 서양을 본받아 호화스러웠다. 중국의 왕공대신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오직 우전부내의 부하들에게는 각박했다. 듣기로 최근들어 다시 인원을 줄인다고 한다. 우전부의 관원들중에서 그를 원망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 당시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당소의는 "널리 교유하고, 돈을 잘 쓰며, 하루에 4끼를 먹는데, 매 끼니마다 10금씩 쓰지 않으면,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 사토(佐藤)의 기록에서는 아예 "당은 원래 교사음일(驕奢淫佚)하며, 이익이 없으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약간 광오하고, 그다지 스스로의 규율에 엄격하지 않았던 당소의는 동료관계 및 '부하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민립보>>에서는 "당소의의 사람됨은 북경의 관리들 중에서 배척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당소의는 개인업무능력이 뛰어났고 원세개가 돌봐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관직은 반석처럼 단단했다.

 

공금으로 먹고마시는데 능한 당소의는 정치적인 능력도 괜찮았다. 오는 자는 막지 않았다. 민국시대가 되어, 원세개가 대총통에 올랐다. 당소의는 국무원 총리가 된다. 수십년의 친구는 이때부터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후세사가들은 두 사람의 갈등을 '인치'와 '법치', '독재'와 '민주'의 정치적 견해싸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 당소의는 뼛속부터 위연(魏延)과 같은 인물이었다. 뒷머리에 반골이 있었다. 그와 아주 잘아는 섭공작(葉恭綽)은 만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당소의는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치가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물러나는 것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청나라 부의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원세개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단기서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손중산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장개석에게 물러나라고 권했다. 청나라 부의가 강제로 물러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개석은 게다가 오해까지 하여 그가 화를 입기도 했다."

 

뭐든지 먹는 습관이 있는 당소의는 일본이 대거 중국을 침략할 때, 각계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상해에 남아서, 일본측과 의심스러운 교류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결국 중경에서 제거대상으로 올려버린다. 군통특무는 골동상을 위장하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 날카로운 도끼로 그를 죽여버린다. 당소의는 청말민초의 명인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은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에는 강호의 도리가 있다. 정치에는 정치의 법도가 있다. 나왔으면 언젠가 들어가야 한다. 당소의의 비극은 정치신용이 너무나 없었고,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는데 있다. 나름대로 교묘하게 한다고 했을지 몰라도 혐의는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총명하게 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망치게 한 꼴이 되었다. 청나라말기와 중화민국의 비정상적인 시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세였다. 아끼고 보호할만한 동지나 형제도 찾기 어려웠고, 존경하고 인정할만한 적수도 찾기 어려웠다. '잠규칙' 혹은 '무규칙'이 진정한 규칙이 된 시대였다. 약한 자는 강한자를 두려워하고, 강한 자는 횡포한 자를 두려워하고, 횡포한 자는 무뢰한을 두려워한다. 유방같이 전형적인 무원칙의 깡패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