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이연영(李蓮英)의 거액재산은 어디로 갔는가?

중은우시 2009. 10. 17. 16:07

글: 사종의(史宗義)

 

광서34년(1908년), 광서황제가 죽은 후, 24시간도 되지 않아, 중국을 근 반세기나 통치하던 서태후도 명을 다했다. 그러면서, 이연영은 위풍을 잃어버린다. 다행히 융유(隆裕)황후가 은혜를 베풀어, "원품휴치(原品休致)"를 허용한다. 그는 남화원(南花園)을 양로하는 곳으로 선택했다.

 

수십년동안, 이연영이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의 2품봉록으로도 그는 영화부귀를 누릴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생활대우를 받았다. 그는 친아들은 없었지만, 그와 혈연관계가 있는 4명의 양자(4명의 양자는 모두 그의 형제의 아들이었다)가 있었다. 이들 양자는 모두 조정에서 낮지 않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화원을 양로장소로 선택한 것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 목적은 한가지이다. 그는 문무백관들에게 그의 청나라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비록 황궁을 떠나지만, 황실의 기반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연영이 남화연에 도착한 후에도, 몇몇 어린환관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다. 황궁을 떠난 다른 환관들보다는 훨씬 대단했다. 절대다수의 환관은 청나라황궁내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말년이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궁에서 쫓겨난다. 그들은 자녀도 없고, 의탁할 사람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다. 대다수는 북경의 사묘(寺廟)에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궁을 떠난 이연영은 예전의 이연영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전처럼 하고싶은대로 다 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교만과 패기는 없어지면서, 극도의 고민과 피로가 따라왔다. 그는 하루종일 기운이 없었고, 눈은 푹 파였다. 아무도 그가 옛날에 위풍당당하던 그 대환관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궁을 떠난 다음 해, 즉 선통2년(1910년) 봄, 62세의 이연영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이미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의 양자들과 조카들은 그의 후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선통3년(1911년), 이연영이 궁을 나온지 이미 2년이 되었다. 이때 그의 병은 이미 뼛속까지 들어갔었다.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양자, 조카들을 한꺼번에 불러모아서, 후사를 부탁했다. 그는 먼저 후대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9살때 환관이 되어 궁에 들어간 일부터 이야기 했다. 나중에 서태후의 은총을 입어 대총관의 지위까지 차례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씨집안을 위하여 풍성한 가산을 남겼다. 그리고 후대들에게 조심스럽게 집안을 관리해서 재물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또한 후대들에게 그가 죽은 후에 맹목적으로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했다. 그의 장례는 모두 조정에 알리고, 융유태후가 지시하는대로 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연영은 이성무(李成武, 이연영의 넷째동생 이승태의 차남. 이연영에 의하여 양자로 받아들여짐)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은냥을 몇명 양자와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4명의 양자들은 각각 백은40만냥을 받았고, 한 주머니의 보석을 받았다. 나머지 조카들은 각각 백은20만냥씩을 받았다. 그의 두 양녀는 각각 백은17만냥을 받았다. 이외에, 이연영이 궁중에 300여만냥의 백은과 두 상자의 보석을 남겨두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 재물은 이미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지혜롭게 후대들에게 그 일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이들 재물은 그가 긁어모았던 재물중 일부분이다. 여기에는 금액이 거대하고 가치가 엄청난 몇몇 부동산을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부동산등 재물을 제외하고, 이연영이 후대들에게 남긴 재물은 그가 모았던 재물의 총액과 차이가 컸다. 원래, 이연영이 청나라궁중을 떠난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물에 눈독을 들였다. 그의 후임자인 소덕장(小德張)과 같은 환관들 뿐아니라, 그의 친척과 몇몇 양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이연영의 거처를 드나든 것은 바로 그 재물때문이었다. 이외에 신분이 불명확한 이발장, 체두장, 신발을 수리하는 사람등등도 자주 허가없이 이연영의 주택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들은 실제로 소덕장등이 파견한 심복이었다. 이곳에서 허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4 양자들 외에, 그의 손자, 손자며느리, 조카, 질녀, 조카며느리등 여러 친척들도 하루종일 이연영의 집안에서 시끄러웠다. 모두 그의 재산을 나눠갖기 위한 것이었다.

 

재산분할이 끝난 후, 파란은 계속 일었다. 이연영은 양자들에게 백은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그저 사택(賜宅)과 외원(外院) 두 곳의 지하에 묻어둔 일부 은자들을 나눠준 것이고, 은호(銀號)에 예금한 은자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 네 양자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파낸 은자, 보석을 바로 이 네명의 이리같은 양잘이 순식간에 나눠가졌다. 이연영의 이 방법은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은표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재산을 분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4명의 양자는 아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하여 사방을 파헤쳤다. 그저 은자만 발견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심지어 말싸움과 주먹질까지 벌어졌다. 이연영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가 남겨놓은 우환이었다. 이제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양자, 조카, 친구들이 재산을 가지고 끊없이 다투고 있을 때, 이연영이 생명도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연영은 선통3년 이월 초사일에 숨을 거둔다.

 

이연영이 죽은 후, 그의 형제 후손들은 그가 생전에 부탁한대로, 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이성무등은 조정에 글을 올려서, 융유태후의 지시를 기다려, 이연영의 장례를 치렀다. 이월초육일, 융유태후가 지시를 내린다. 조종가법에 따라, 이연영은 육품이상의 태감이므로 묘지부지를 내려준다. 은제장 대공지내에 안장하도록 하고, 제단과 백은 1000냥을 내린다.

 

이씨집안에서는 명을 받은 후, 즉시 장례를 위한 각종 안배와 날짜를 정한다. 이어서, 이씨집안은 융유태후에게 글을 올려 국가원훈의 등급으로 이연영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국고가 빠듯하므로, 비용은 이씨집안에서 내겠다고 한다. 융유태후는 이씨집안의 요구를 응락한다.

 

권모술수로 집안을 일으킨 환관으로서, 사후에도 국가원훈의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씨집안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경성내외에 장례소식을 전하였고, 이연영이 살아있을 때의 친구들 및 이연영에게 도움을 받았단 사람들이 속속 문상을 왔거나 재물을 보냈다. 조정의 일부 문무대신들도 조문을 왔다. 1개월의 조문활동기간에 이씨집안은 백은 수만냥을 썼다.

 

은제장의 환관분묘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의 분묘도 이연영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이연영의 분묘는 태감분묘에 독립한 원락(院落)을 구성했다. 앞에는 석교(石橋)와 패방(牌坊)을 설치했는데, 패방에는 가로로 "흠사이대총관지묘(欽賜李大總官之墓)"라는 여덟글자가 쓰여 있었다. 거기에 지은 건축물만 모두 4,5십칸이고, 이씨집안사람들이 성묘를 할 때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은제장내에는 관제묘가 하나 있는데, 관제묘의 동쪽에 이연영의 사당을 하나 건축했다. 사당에는 이연영의 화상을 걸어놓았다. 이연영의 분묘는 지면건축면적을 합쳐서 점유부지가 최소한 10무(1무는 200평)이상이었다. 묘앞의 석패방, 공탁은 청릉(淸陵)의 양식으로 마들었다. 다만 크기가 약간 작을 뿐이었다.

 

이씨집안에서는 이연영을 위하여 3.5미터, 너비 1미터가량의 한백옥석비를 마련한다. 석비에는 "영수불후(永垂不朽)"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 전체 청나라 수백년동안, 환관이 죽은 후에 이런 묘비를 세운 것은 공전절후이다. 이연영은 생전에 권력이 대단했지만, 명성은 좋지 못했다. 사후에 그의 비문을 적어줄 명사를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의 후대들이 그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수백자의 비문 속에는 이연영을 추켜세우고 미화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연영의 후대들이 아무리 잘 미화하더라도, 이연영은 청나라말기 궁전의 권력을 지닌 환관으로서 그가 한 나쁜 짓들은 아무리 미화해도 모두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