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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고홍명(辜鴻銘): 청나라의 마지막 유민

by 중은우시 2009. 11. 6.

글: 홍촉(洪燭)

 

대청제국은 1912년에 와해되고 붕괴되었다. 그저 우충(愚忠)한 유민(遺民)들의 변밞머리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깃발을 지키는 것처럼 자신의 변발을 지켰다. 이를 통하여 몰락한 왕조의 시신을 지킨 것이다. 왕국유와 마찬가지로 변발을 유지한 사람으로 고홍명이 있다. 고홍명은 '과피소모(瓜皮小帽)와 그 아래의 변발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러 갔다"(장중행의 말). 그는 고희의 나이로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고홍명은 장지동(張之洞)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장지동의 양광총독서와 호광총독서에서 막료를 지낸다. 그리고는 다시 외무부로 가서 원외랑에서 랑중으로 승진하고 나중에 좌승(左丞)에까지 이르니, 관운이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대청제국이 망하였지만, 그는 의관을 바꾸지 않았고, 예전처럼 변발을 길렀고, 홍정과피소모를 썼으며, 비단장포마괘를 입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청나라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고, 황제제도의 복벽을 주장했다.

 

왕국유와 고홍명은 모두 문화 '변발파'에 속한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변발을 정치태도에 대한 부호로 삼았다. 새로운 시대에 그들은 서로 다른 저항방식을 채택한다. 왕국유는 죽음을, 고홍명은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고홍명이 전투력은 왕국유에 못지 않았다. 장훈의 복벽시에 고홍명은 이를 고무시킨다. 그리하여 외교부차장에 이름이 오른다. <<청사고>>에서는 "변론을 좋아하고, 세상을 욕하기를 즐겼다. 나라에 변고가 생긴 후로는 더욱 비분강개했다"고 적었다. 이를 보면 그는 욕을 함으로써 싸웠다. 그는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변발머리를 하고 시내를 당당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청나라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모델역할을 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장수한 원인일 것이다(72세). 고홍명과 백중을 이루는 사람으로는 임서(林紓), 엄복(嚴復)이 있다.

 

채원배는 손중산의 명을 받아 북경대학을 접수했고, 이대쇠(李大釗), 진독수, 노신등 급진혁명파를 영입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학술적으로 실력있는 구식학자들도 빼놓지 않았다. 고홍명을 북경대학에서 영문학과 라틴어교수로 모셔갔다. 호적이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바 있었다. 채원배는 그러나 고홍명을 위해서 변명해주었다: "우리가 존중하는 것은 고홍명의 변발이 아니다. 그의 학문이다." 이렇게 청나라의 유민이라 하더라도 그 쓸모를 다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고홍명은 친히 나서서 여러 사람의 편견을 반박한 적이 있다: "머리 뒤를 박박밀은 소위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사상적인 변발은 여전히 고집스럽다." 그는 자신의 물질적인 변발을 그다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어떤 사람은 고홍명이 그저 표면적인 청나라유민이라고 말한다. 뼛속은 여전히 반역적이라고 한다. "그는 천성적은 반역인물일 뿐이다. 그가 변발을 남긴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그의 전체적인 표지로 삼았다. 그는 아주 성격이 괴퍅하다. 다른 사람과 반대편에 서는 것을 즐겼다. 다른 사람이 모두 받아들이면 그는 반대한다. 모두사 숭배하면 그는 멸시한다. 그가 득의양양한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적으로 변발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변발을 남긴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변발을 길렀다면, 나는 고홍명이 제일 먼저 변발을 잘라버렸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다. 그의 군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대하여, 이것은 원칙문제가 아니다. 그저 마음 속으로 특별한 것을 항상 생각했다...군주주의를 고취시키는 반동파이고, 공자를 인생철학으로 삼은 낭만파이며, 자신의 노예표지(변발)을 자랑으로 여겼던 독재자이다. 이렇게 스스로 모순되는 것때문에 고홍명은 현대중국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중 하나가 된 것이다'(온원녕의 말). 이는 고홍명의 성격에서의 패러독스를 잘 분석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고홍명을 잘 드러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홍명은 왕국유보다 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끈질긴 전투를 선택했다. 그는 방약무인하게 새로운 사조가 풍미하던 북대의 캠퍼스를 누볐다. 그는 살아있는 골동품이었다. 그는 신문화운동을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 폄하했다. 심지어 '끈질긴 투쟁'의 모범인 노신마저도 격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말싸움을 벌이게 된다: "분명히 현대인이고, 현대의 공기를 마시면서, 썩어빠진 명교 죽어버린 언어를 고집하고 있다. 현재를 능멸하고 있다 이는 바로 현재의 도살자이다. 현재를 죽이면 장래도 죽는다. 장래는 자손의 시대이다" 노신은 고홍명이 자손들을 잘못 이끈다고 비난했다. 그는 문화'변발파'들이 일찌감치 후대가 끊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는 너죽고나살기식의 투쟁이었다. 그는 변발 하나를 가지고 신청년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다보니 그를 없애지 못하는 것은 한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다. 노신은 바로 이 변발(봉건예교와 국민의 비열한 근성)과 싸우면서 유명해졌다.

 

고홍명은 세상사람들에게 수구적인 유민으로 보여졌는데, 그 이유는 변발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여자들이 전족을 해야하나고 주장했고, 남자들이 첩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서양여성이 그의 일부다처의 견해에 반박했다. 그러면서 일처다부제를 시행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고홍명은 여유만만하게 유명한 '차주전자이론(茶壺理論) 내세운다. 차주전자 1개에 찻잔 4개는 있을 수 있지만, 찻잔 1개에 차주전자 4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관념은 봉건사회의 대지주와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서양에 유학을 한 바 있고, 서양학문에 정통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유가적인 전통의 훈도를 완전히 받은 것도 아니다. 그는 공자가 들으면 땀을 흘릴 이야기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친구에게는 기녀의 품격에 대하여 대거 찬양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중국문화의 정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팔대후통에 가서 친히 그곳 기녀들의 우아함, 은근함 및 아름다움과 그러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풍모를 보아야 한다. 그녀들이게 지저분한 얘기를 하면 바로 그녀들은 얼굴이 발그레질 것이다."

 

자유사회에서 온 서양인들 마저도 구중국유민의 사상에 있어서의 개방성과 신조류에는 감탄해마지 않았다. 학술괴걸이라는 별호가 붙은 고홍명은 청나라유민중에서는 특수한 경우이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느껴지기도 한다. 유민이라고 해서 다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같다.

 

고홍명은 철두철미한 보황파(保皇派)이다. 그러나 왕국유처럼 순국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서 상대방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는 어떤 기회에 군주에 충성해야한다는 사상을 대거 선전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5.4운동때 채원배 총장이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다. 북대교수들이 회의를 열어서 사퇴를 만류했다. 고홍명의 발언차례가 되자 그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특이한 주장을 내놓았다: "총장은 학교의 황제이다. 그러므로 만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을 듣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교육과 황제제도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고홍명은 연결을 시켰다.

 

고홍명은 황제제도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저 힘들게 자신의 변발을 지켜냈을 뿐이다. 1921년 일본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중국을 방문했다. 국제통신사의 존스가 그의 가이드가 되었다. 북경에 와서 자금성은 보지 않아도 되지만 고홍명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쿠다가와가 고홍명의 집을 찾아갔을 때, 마침 그가 중국식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홍명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네가 서양옷을 입지 않다니, 드문 경우이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아쉽게도 한 가지가 빠졌다 그래서 고홍명은 유감스럽게 말한다: "아쉽게도 변발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손님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쿠다가와는 뒷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역시 존스가 헛소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분은 정말 인물이다."

 

고홍명은 문화괴물이다. 고홍명의 삶은 왕국유의 죽음고 비교하여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모두 변발로 인하여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