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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영수공주(榮壽公主): 중국의 마지막 공주

by 중은우시 2010. 4. 13.

작자: 미상

 

고륜영수공주(固倫榮壽公主, 1854-1924)는 도광제의 여섯째 아들 공친왕(恭親王)의 장녀이다. 함풍4년 이월 초이틀(1854년 2월 28일) 사시(巳時)에 적푸진(嫡福晉, 정실부인) 과얼자(瓜爾佳)씨에게서 태어났다.

 

함풍11년 십이월초아흐레(1862년 1월 8일), 양궁황태후(동태후, 서태후)는 공친왕의 장녀를 궁중에서 기르고, 고륜공주(固倫公主)로 승격시키겠다고 선언한다. 동치3년 정월 초이틀(1864년 2월 9일), 양궁황태후는 정식으로 공친왕의 장녀를 고륜공주에 책봉한다.

 

동치4년 구월(10-11월), 공친왕이 굳이 장녀에게서 '고륜'의 명호를 취소해줄 것을 요청하여, 양궁황태후가 허락한다. 이렇게 하여 다시 "영수공주"로 봉한다. 같은 해 구월초엿새(10월 14일), 장녀 영수공주는 서태후에 의하여 고륜부마 경수(景壽)의 아들인 지단(志端)와 정혼한다. 동치9년 구월초이레, 정식으로 지단에게 시집가고, 5년후 지단이 죽는다.

 

1881년, 황태후가 의지를 내려, 그녀를 '고륜공주'에 다시 봉한다. 1894년 정월, 황태후는 의지를 내려 고륜공주에게 두 배의 봉록(약800냥백은)을 내리게 한다.

 

영수공주는 죽은 후에 뇌교촌에 묻혔는데, 1937년 기동보안대에 의하여 도굴된다. 1961년, 지방정부는 댐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공주묘를 철거한다.

 

영수공주는 <<청사고(淸史稿)>>에 수록된 마지막 공주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서태후와 함께 생활했고, 서태후의 임종시까지 거의 반세기를 함께 살았다. 서태후의 양녀이자 심복으로 청나라말기 궁중의 내막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그녀의 눈아래, 그녀의 손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영수공주는 원래 공친왕의 장녀이다. 7살때 서태후가 양녀로 삼아, 궁중에서 자란다. 사람들은 그녀를 대공주(大公主)라고 불렀다. 공친왕은 서태후의 시동생이다. '신유정변'때 중요한 역할을 하여, 서태후가 47년에 걸친 통치를 하도록 해준 인물이다. 그리하여, 영수공주는 서태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다. 서태후는 얘쁘고 활발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여자는 싫어했다. 영수공주는 어려서부터 눈도 작고, 나이든 얼굴인데다 신중하고 착실하여 서태후가 아주 좋아했다.

 

그리하여, 영수공주는 7살때, 고륜공주가 되는데, 친왕의 딸로서 공주중 가장 높은 등급에 오른 것이다. 이는 특례중의 특례이다. 청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황제의 딸 중에서 중궁이 낳으면 고륜공주(固倫公主)에 봉하고; 비빈이 낳으면 화석공주(和碩公主)에 봉한다. 고륜공주는 등급이 친왕(親王)과 같고, 화석공주는 등급이 군왕(郡王)과 같다" 이를 보면, 영수공주가 고륜공주가 된 것은 공친왕 혁흔에 있어서 커다란 영광이었다.

 

그녀가 12살이 되었을 때, 서태후가 나서서, 이 차분하고 착실한 아가씨를 위하여 사위를 구해준다.

 

청나라 태감의 회고에 따르면, 이 날 영수공주는 화장을 하고, 거거(格格)의 화려한 예복을 입고, 어른처럼 천천히 궁정의 발걸음으로, 왕비등 귀부인의 인도를 받아, 먼저 후궁으로 가서 서태후를 배알했다. 그후 어두운 방안으로 들어가서, 문에 죽렴을 내리고, 조용히 그녀의 미래 남편을 기다렸다.

 

차례대로 세 명의 소년이 들어왔다. 그리고 줄을 서서 공주에게 안부인사를 드린다. 그 후에 고개를 숙이고 손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조금 지나서 태감이 세 소년에게 물러나도 좋다고 말한다. 공주는 이미 선택을 마친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뽑힌 남자는 당연히 그녀가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영수공주의 혼인에서의 자주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어쨌든 절차는 절차이고, 태후가 준비한 후보자들이니 어떻게 하든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공주는 남자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있거나 고르고 고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같다.

 

여기서 뽑힌 소년은 푸차(富察)씨인 지단이었다. 온화하고 글을 잘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경수의 아들인데, 경수도 공주와 결혼했다. 바로 도광제의 딸인 고륜수은공주(固倫壽恩公主)였다. 황실의 인척으로 다시한번 혼인을 하게 되었다. 영수공주의 혼인에는 아무런 이의나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정혼한 후, 지안문밖의 관가(寬街)에 공주부(公主府)를 만들었다. 공주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마제(駙馬第)도 동시에 만들었다. 공주부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점차 모양을 갖추어갔고, 아주 기세가 대단했다.

 

공주가 시집간지 5년가량이 지나서, 부마인 지단이 병사한다. 그녀는 17살때 과부가 된 것이다. 자식도 없었다. 청나라때의 공주에 대한 법도에 따르면, 공주의 자식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제도는 이러했다: 공주가 출가하는 당일에 소위 화촉동방은 없다. 혼인대례를 치르고 나면,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후 부마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공주부로 문안을 하러 간다. 문안을 한 후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온다. 공주가 그를 불러야 비로소 머물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많은 규정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중년여인인 사람은 없다. 영수공주가 과부가 된 것은 17살이다. 아직도 '소녀'일 때이다. 기나긴 적막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돌로 만든 사람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었을까? 청나라궁중의 노태감에 따르면, 영수공주가 혼자서 집안에서 말을 타고 노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서태후는 그녀가 젊어서 과부가 된 것을 보고, 가련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궁중으로 부른다. 서태후 자신도 젊어서 과부가 되었으므로, 친왕의 딸들 중에서 과부가 되고 자식이 없으면, 서태후는 모두 궁안으로 불러들여서, 함께 지냈다. 서태후의 곁에는 과부들이 가득했다. 나중의 융유황후(隆裕皇后)와 근비(瑾妃)는 광서제가 그녀들이 못생기고 재미없다고 그녀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과부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 과부중 영수공주가 가장 그럴 듯한 과부였다. 그녀는 원래 나이든 얼굴인데다가, 과부가 된 후에 전혀 예쁘거나 꽃이 든 옷을 입지 않았다. 아무런 장식이나 화장도 하지 않았다. "스물 몇살인데도 바라보면 노파같았다."

 

영수공주는 예쁘지 않았다. 노태감은 이렇게 말한다. 뒤에서 보면, 자주 광서제의 융유황후와 혼동한다. 융유황후는 얼굴색이 누렇고, 이빨이 튀어나오고, 비썩마르고 키는 컸다. 너무 키가 컸기 때문에, 자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영수공주는 정면에서 보면 그녀보다는 예뻤다. 걸음걸이나 앉음새도 단정했고, 겉으로 보기에 더욱 위엄이 있었다.

 

사실 영수공주는 그냥 재미없고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서태후에게는 충성을 다했다. 황궁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생활해서 가장 잘 아는 곳이다. 복잡한 후궁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고려해서, 처리가 공평했고, 희노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연영을 싫어한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궁안의 어느 누구와도 잘 지냈다. 그녀는 친왕의 딸이고, 서태후의 양녀이며, 귀족과 황궁의 예의범절을 잘 알았다. 왕공대신의 부인이 서태후를 만날 때면, 먼저 그녀가 안배했다. 외국사절의 부인들이 입궁할 때도 그녀가 함께 했다.

 

그리고, 영수공주는 취미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무 일이 없으면, 그녀는 화조화를 그렸다. 그림을 그럴 듯하게 그려서, 유귀비(瑜貴妃)의 산수화와 함께 궁안의 이묘(二妙)라고 불리웠다.

 

서태후는 그녀를 아주 신임했다. 그리고 그녀를 항상 가까이 두었다. 그녀만이 서태후의 앞에서 진언을 했다. 영수공주가 진언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꺼내면 서태후도 거의 그녀의 말을 따랐다. 왕공대신들도 그녀의 무게를 알고, 그녀를 존중해주었다.

 

서태후조차도 그녀를 약간은 두려워했다. 서태후는 호화로운 의복을 입기를 좋아했는데, 대공주가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돈을 들여서 뭐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그저 청나라의 늙은 과부일 뿐인데, 무슨 마음으로 요사스럽게 치장을 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책잡히지 않겠습니까..." 서태후도 대공주가 올 때면 상대적으로 소박한 옷을 입곤 했고, 화장도 지나치게 하지 않았으며, 보석도 많이 달지 않았다. 궁안의 사람들은 대공주가 마치 서태후의 엄마같다고 말했다.

 

한번은 태후가 몰래 아주 화려한 치파오를 만들었다. 강남의 장인이 비단으로 아주 정성들여 만든 것이다. 비용도 적지 않게 들였다. 서태후는 좌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대공주에게 말하지 말라." 그래도 대공주가 알아버렸다. 서태후를 보고는 불쾌한듯이 투덜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게 있느냐? 나는 매일 모친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입기를 좋아하는지, 뭘 쓰기를 좋아하는지, 뭘 먹기를 좋아하는지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서 만들게 한다. 모친은 그런데도, 몰래 옷을 만들어 입고, 다른 사람은 알고 있고...우리 모녀는 도대체 뭐냐..." 서태후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좌우사람들이 함부로 말한 것이라고. 대공주가 가고나서, 서태후는 주위사람들에게 말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대공주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녀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겠는가. 모두 너희때문이다. 너희가 말이많아서이다."

 

젊었을 때 영수공주는 이렇게 온건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만하고 발호했으며 세력을 믿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모두 그녀를 두려워했다. 도광, 함풍연간에 대학사 백준의 손자 숭이가 쓴 <<도함이래조야잡기>>에는 고륜영수공주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공주가 길을 나설 때면 모든 사람이 피한다. 마차도 길을 멈추고 양보하고, 말을 타고 가던 사람들도 모두 골목길로 숨어 들어간다. 한번은 그녀의 마차와 석상서의 마차가 만났다. 상서의 말이 말을 듣지 않아 공주의 마차의 앞길을 막았다. 공주는 마부를 붙잡아놓고 풀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석상서가 공주의 가마앞에서 고두사죄를 한 후에야 풀어주었다.

 

고륜영수공주는 아주 방자했고, 조야에서 모두 백안시했다. 고관대작들도 그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사람들은 더더구나 피하기 바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대공주의 성격은 좋아졌고, 가면갈수록 널리 사람들과 잘 사귀게 되었다.

 

어떤 일은 그녀가 대국을 잘 고려했다. 그녀와 광서제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광서제가 등극한 후, 공친왕 일가는 그를 아주 질시했다. 그러나, 영수공주는 대국을 고려해서, 광서제와 아주 잘 지냈다. 서태후의 말년에, 대공주는 더더구나 서태후와 광서제의 갈등을 봉합하려고 애썼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황제로 삼았지만, 그를 아주 싫어했다. 문약하고 부끄럼을 타지만,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있던 젊은이는 변법을 지지하여, 서태후의 분노를 산다. 하마터면 그는 죽음을 당할 뻔했다. 대공주는 자주 사람들에게 말했다: "황제는 가련하다. 5살에 입궁하여 다시는 친엄마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광서제는 영수공주가 서태후의 심복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수공주가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그를 개인적으로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었다.

 

광서제의 변법이 실패하자, 처지가 아주 위험해졌다. 서태후의 생각대로라면 건청문앞에서 조훈에 따라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방망이로 때려서 죽이려는 것이었다. 진비(珍妃)가 이를 듣고 광서제를 살려달라고 말하다가 미움을 사서 나중에 사사하려고 한다. 이때 대공주는 마침 열하로 부모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서태후가 대공주가 없는 틈을 타서 광서제를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이 소식을 전해주었고, 대공주는 황급히 밤을 세워 서원으로 간다. 그리고 꿇어앉아 서태후에게 간청한다. 이렇게 하여 광서제는 황제위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영대에 연금되고, 진비도 사사되지 않는다. 나중에 서태후는 대공주가 이렇게 빨리온 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알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사를 벌이기도 한다.

 

사실 대공주가 가장 많이 보살펴준 것은 광서제가 가장 총애하던 진비였다. 진비는 예쁘게 생겼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진비는 서태후와 갈등이 깊었다. 광서제를 제외하고 아무도 진비를 좋게 보지 않았다. 단지 대공주만이 그녀를 암중으로 보살펴 주었다. 진비도 자주 대공주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대공주가 구해달라고 했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해 들어왔을 때,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떠나기 전에 태감을 시켜 진비를 고공의 우물에 빠뜨려 죽이게 한다. 이때, 대공주는 이미 궁을 빠져나가서 피난갔다. 서태후는 대공주가 없는 틈을 타서, 진비를 죽인 것이다. 대공주는 나중에 궁으로 돌아와서 진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난감해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진비를 볼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