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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청나라말기 내무부(內務府)의 사대세가(四大世家)

by 중은우시 2010. 9. 8.

글: 앵화수(櫻花樹)

 

청나라때 내무부에는 찰사삼원(七司三院, 광저사, 도우사, 장의사, 회계사, 영조사, 경풍사, 신형사, 상사원, 무비원, 봉신원)이 있었고, 관리, 예의, 재정, 상업, 사법, 정공, 건설, 제조등 아주 많은 일들을 관장했다. 그리하여 외정(外廷)의 부원(部院)과 견제관계에 있었다. 내무부 기인(旗人)의 구성은 만주족, 몽골족, 한족 뿐아니라, 조선족, 회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이들 민족이 팔기에 편입되어, 내무부의 관리를 받았고, 이들을 내무부팔기(內務府八旗)라고 부른다. 약칭하여 내팔기(內八旗)이다. 내팔기중에서 상황기, 정황기, 정백기는 상삼기이고, 황제가 이끌며 직접 황제를 위하여 봉사한다. 내무무 상삼기는 직접 황제를 위하여 봉사하므로, 아주 신임이 두텁고, 왕왕 삼직조(소주직조, 항주직조, 강녕직조), 염정 혹은 월해감독과 같이 수입이 짭짤한 보직으로 외근을 나가기도 한다.  이들은 황제를 위하여 지방의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거나 지발관리를 감독하는 직책도 수행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특수한 지위를 누렸고, 고관대작보다도 부유했다. <<홍루몽>>의 작가인 조설근은 전형적인 내무부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조인은 내무부정백기 사람이다. 소주직조, 강녕직조를 거쳤다. 바로 내무부세가의 특수한 환경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홍루몽>>과 같은 광세기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왕종한 선생의 <<내무무세가고>>는 청나라 내무부세가를 깊이있고 계통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필자는 청나라말기의 내무부 4대세가를 언급하고 있다.

 

영정(榮廷). 자는 우신(虞臣)이고 호는 문죽주인(問竹主人), 또는 졸원노인(拙園老人)이다. 내무부 정백기 사람이다. 영정의 선조는 몽골족으로, 보얼지지터씨이다. 즉 징기스칸의 후손이다. 청나라초기에 내무부에 들어와, 한성(漢姓)으로 윤(尹)을 하사받는다. 내무부기인의 성씨에 따라 사람을 부를 때에는 한성과 같이 부른다. 성씨를 이름의 뒤에 붙여서 모모가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영윤가(榮尹家)"라고 불렀다. 영정은 젊었을 때 하북형태에서 수리공정을 맡은 적이 있었고, 광서17년에는 소주직조를 지낸다. 관직이 내무부좌판당랑중에 이르렀는데, 광서시기에 내무부대신은 허명이고 권력은 당랑중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경자년(1900년)에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정원에 물을 끌어들이고, 곤충과 물고기를 기르며, 시와 술로 손님을 맞이한다. 정원의 이름은 "상심낙사원(賞心樂事園)"이라고 부른다. 저택은 지안문 동괴봉후통에 있다. 저서로는 <<충어아집>>, <<졸원등미초>>, <<오하시존>>등이 있다. 그의 형인 영고(榮誥)도 역시 내무부에서 일했다. 두 집은 괴봉후통의 남북 두 집으로 나뉘어 있었는데,마치 <<홍루몽>>에서 녕(寧), 영(榮)의 동서이부와 같았다.

 

명선(明善). 자는 원보(元甫)이고, 만주 상황기 차하라씨이다. 조상은 옹정,건륭연간의 대학사 소주(索柱)이다. 명선은 함풍십년(1860년) 총관내무부대신을 맡아서 동치십삼년(1874년)까지 지낸다. 아들 문석(文錫), 손자 증숭(增崇)도 동치, 광서, 선통의 3황제 때 전후로 총관내무부대신을 맡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명색" "문색" "증색"이라고 불렀다. 숭이의 <<도함이래조야잡기>>에 따르면, 청나라때 조손3대에 걸쳐 내무부총관대신을 지낸 경우는 이 집안 뿐이다. 저택은 진로후통에 있고, 집의 이름은 "기원(綺園)"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색가화원(索家花園)"이라고 부른다. 색가의 집은 비록 규모가 매우 크지만, 격국은 계통적이지 못하다. 이를 보면 역대이래로 합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종상(鍾祥). 자는 운정(雲亭)이고 한성은 양(楊)이다. 한군상황기에 속하고, 가경13년에 진사가 된다. 산동안찰사, 절강포정사, 산동순무등의 직책을 지낸다. 도광16년(1836년) 민절총독이 되고, 22년에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돌아와서 쿠룬판사대신이 된다. 그후 동하하도총관을 지낸다. 세상에서는 '종양가(鍾楊家)'라고 불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거부이고, 저택은 구고루대가 마가창에 있다. "집이 연이어있으며, 전후의 두 거리에 걸쳐 있고, 4향에 밭이 많아서, 평생 다 쓸 수 없을 정도의 임차료가 들어온다." 후세사람들은 내무부기인들의 성씨칭호습관을 잘 알지 못하여, 어떤 사람은 '종양가'라는 것을 보고 시계(鍾表)를 만드는 장인집안이라고 생각하여, 경성의 시계수리업종을 독점하여 돈을 번 줄로 아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저 이름을 보고 억측을 한 것일 뿐이다.

 

문풍(文豊). 한성은 동(董)이다. 내무부 한군정황기 사람읻. 내무부 필첩식, 당주사, 원외랑, 조판처랑중, 항주직조를 지낸다. 도광21년, 월해감독을 지내고, 26년 3월, 열하부총관이 되고, 소주직조를 맡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당랑중이 된다. 함풍4년, 총관내무부대신의 직위를 받는다. 십년팔월, 원명원의 관리업무를 맡는데, 그 달에 영국인이 원명원을 쳐들어온다. 문풍은 복해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의 동생인 문렴(文廉)은 내무무대신을 맡는다. 세상에서는 "문동가"라고 부른다. 저택은 지안문 동우아후통에 있고, 동서로 나뉘어 있다.

 

이들 내무무세가는 궁중사무를 처리하고 황실창고를 지키므로, 기진이보를 많이 보게 되고, 성대한 장면도 많이 본다. 그리하여 가정의 장식이나 씀씀이가 남다르다. 보통집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완가(玩家)를 배출한다. 위에서 언급한 영윤가에서, 영정은 어려서부터 귀뚜라미싸움이나 물고기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저서인 <<충어아집>>은 귀뚜라미를 고르는 법, 기르는 법, 싸우는 법, 진흙판에 대하여 연구했고, 금붕어를 고르는 법, 번식, 종류등도 언급했다. 귀뚜라미싸움, 양어, 귀뚜라미진흙판수장등에 가장 권위있는 저술이다. <<졸원등미초>>는 자신이 만든 등미(燈謎)이다. 북파등미를 대표한다. 아들 윤중기는 자전거가 막 수입되었을 때, 영국의 유명브랜드자전거를 대량 수입하여, 서양인들에게 배워서, 자전거를 세우고, 자전거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등의 동작을 할 수 있었다. 영고의 후손인 영윤생은 서예작품수장에 미쳤다. 1950년 소장한 서예작품을 모조리 고궁박물원에 기증하다. 그가 쓴 서예감상저작은 지금도 서예수장가들에게 가장 권위있는 참고자료이다. 종양가의 양계진은 골동을 좋아하여, 고전(古錢)을 수집했다. 역대왕조의 동전을 모두 모았는데, 저명한 <<홍루몽>>의 초본인 몽고본(夢稿本)도 그가 소장한 것이다.